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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박사와 같이한 한글사랑 운동(1)

한글빛 2012. 3. 9. 04:47

[이대로의 우리말글 사랑]공병우 박사와 같이한 한글사랑 운동(1) 
공병우 박사(1906-1995) 웃는 모습 ⓒ e-교육신문
 [e-교육신문 www.newsedu.kr] 
내가 이 땅에 태어나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우러러보는 스승이 어떤 분이냐고 말하면 나는 서슴없이 공병우님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분이 미국에서 돌아온 1988년부터 1995년 돌아가실 때까지 7년 동안 모시고 한글사랑 운동을 함께 한 일이 있다. 나는 그동안 나 개인은 힘들었지만 이 분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감동했다. 돌아가신 지 17년이 되었지만 이 분을 잊지 않고 있으니 지금까지 함께 활동하는 셈이다. 이 분과 함께 한글운동을 하면서 있었던 숨은 이야기들을 적어 보련다. 나도 이제 경로 증을 받을 나이가 되니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공 박사는 한국 최초 실용 타자기를 발명한 한글기계화 선구자로 잘못된 타자기 자판 표준을 바로잡으려고 정부와 싸우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통도 받고 수백억 원에 이를 재산을 군사정권 세력에 빼앗기고 미국으로 망명해 반독재운동도 하면서 셈틀(컴퓨터)연구를 하고 민주화바람이 부는 1988년에 미국에서 돌아오셨다. 그 때 83살이었는데 마음은 3살 어른애 같았고, 20살 젊은이처럼 활동했다. 80대 할아버지지만 웃는 모습이 어린애 같아서 꼭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신문 기자를 만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한글을 빛내야 이 겨레가 잘 산다고 말씀을 하실 때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이 넘어갈 거처럼 뜨겁게 큰소리로 쉬지 않고 말해서 그러다가 쓰러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남다른 모습을 우습게보거나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분 마음을 알기에 우러러보이고 더욱 가슴이 아렸다. 80이 넘었으니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의 뜻을 심어주고 싶고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조급함에 그러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이 분으로부터 배우고 감동한 것은 “몸은 늙어도 어린애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젊은이처럼 힘차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감동했다. 나이가 들고 이름나면 어깨에 힘주고 거드름을 떠는 데 이 분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는 이는 이런 모습을 보고 유치하다며 우습게 여겼지만 내 눈에는 어떤 성직자나 학자, 권력과 돈이 많은 이름난 사람들보다도 더 큰 사람으로 보였다. 그 때 벌써 이 분은 이름난 분이지만 나를 아주 편하게 참마음으로 맞이해 주셨다.
 
1. 모일 방을 줄 터이니 같이 활동하자.
 
1988년 초 공병우 박사가 미국에서 오셔서 종로구 창덕궁 앞 와룡동 95번지 옛 공안과 자리에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한글사랑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공 박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1960년 대 국어운동대학생회가 처음 활동을 할 때 공병우타자기로 학생들 주장을 찍어서 세상에 뿌린 일이 있는데 모두 공 박사님이 공짜로 해주셨다. 연필로 글씨를 쓰던 때에 깨끗하게 타자기로 찍은 성명서나 건의문은 언론과 정부의 눈길을 끌었고 박정희 정부가 한글전용 정책을 펴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런 고마움이 있기에 뵈려고 갔었다.
 
그 때 내가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으로 전국 30여 대학의 국어운동대학생회 후배들을 이끌고 한글운동을 한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당신의 연구실 옆방을 우리 학생들이 모일 수 있는 곳으로 줄 터이니 같이 손잡고 활발하게 하자고 하셨다. 참으로 고마웠다. 대학생 때부터 한글사랑 길을 걸으면서 힘들고 외로웠으며 설움이 많았는데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니 가슴이 뭉클했다. 20년이 넘게 한글학회와 같이 한글운동을 했지만 학회는 그렇게 참마음으로 따뜻한 손을 내민 일도 없었고, 그런 어른이 없었다.
 
그 때 공 박사는 한글문화원 안에 강태진, 정래권, 이찬진 들 젊은이들에게도 방을 주고 한글문서편집기 연구를 하게했고, 글쓰기연구회를 이끄는 이오덕 선생에게도 방을 주고 같이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을 하게 하셨다. 모두 우리 겨레에 좋은 일을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이찬진 들은 공병우 박사 품에서 ‘글’이란 한글 문서편집기를 만들고 ‘한글과컴퓨터’란 회사까지 꾸렸다. 이오덕 선생도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한글사랑 운동과 우리말 지키기 일을 열심히 했다. 나도 한글 빛내기 운동을 땀나게 했다. 모두 역사에 남을 일들이고 사람들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17개 대학에 국어운동대학생회가 있었고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 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치 때는 국어운동대학생회도 거의 반독재 투쟁모임으로 바뀌거나 없어졌다. 집회 허가도 안 해주고, 모이면 잡아가니 학술이나 문화운동 모임도 힘들었다. 그러나 한글날이 공휴일이어서 해마나 한글날에는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 선후배가 모여서 정보를 주고받고 기회를 찾다가 1986년쯤부터 각 대학 학생모임도 부활하고 동문회를 조직해 활동을 도왔다.
 
공병우 박사도 그 때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해서 활동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박사도 나이가 드시고 돈도 없으니 그 옆에 가는 사람이 적어서 공박사는 외로워하셨다. 나는 그 때 그 분 옆에 갔고, 그 분은 젊은이들을 좋아하고 고마워하면서 도와주시려고 했다. 어렵고 힘들 때 가깝게 있는 벗이 참 벗임을 그 때 깨달았다. 나는 거의 날마다 한글문화원에 가서 공 박사와 의논하고 함께 활동을 했다. (계속 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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