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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25일 Facebook 이야기

한글빛 2013. 3. 25. 23:59
  • <임원 개선 결과 김종택 회장 연임>  
    - 2013년도 한글학회 정기 평의원회/회원총회 -  
     
     
    한글학회는 3월 23일(토) 오후 2시부터 한글회관 얼말글교육관에서 2013년도 정기 평의원회를 열어 새해 사업 계획과 예산안을 심의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이 날 임원 개선은 이사 11명과 감사 2명 선출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사 선출 결과: 구 현정(상명대 교수), 권 재일(서울대 교수, 전 국립국어원 원장), 김 봉모(부산대 명예교수), 김 종택(경북대 명예교수), 김 차균(충남대 명예교수), 리 의도(춘천교대 교수), 이 관규(고려대 교수), 이 상규(경북대 교수, 전 국립국어원 원장), 임 지룡(경북대 교수, 경북대 부총장), 정 동환(협성대 교수), 하 치근(동아대 명예교수).  
    ▶감사 선출 결과: 양 태식(서울교대 교수), 오 동춘(짚신문학회 회장).  
     
    평의원회에 이어, 새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첫 회의를 열고, 김 종택(경북대 명예교수) 이사를 회장으로, 김 차균(충남대 명예교수) 이사를 부회장으로 뽑아, 앞으로 3년 임기 동안 연임하게 되었다.  
     
    오후 4시부터는 같은 자리에서 2013년도 정기 회원총회를 열었는데, 이날 총회에서는 지난해의 사업 실적을 보고 받고, 새해 사업 계획과 예산안, 그리고 지회 사업 실적과 사업 계획을 의결하였다.  
    한편, 회원총회에 앞서 2012년도 "한글"에 실린 논문 가운데서 우수 논문을 선정하여 연구 보조비(100만 원)와 함께 상장을 드렸다. 이번 우수논문상에는 윤 애선(부산대) 교수의 <한국어 어휘 의미망 KorLex 2.0-의미 처리와 지식 공학을 위한 기반 언어 자원->과 양 정석(연세대) 교수의 <'느' 분석론과 '있다', '없다'의 문제>가 상을 받았다.  
     
    2013. 3. 25.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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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루 이극로 선생님께서 작사한 "한글노래"
    -박 용규(여의도고 교사, 이극로연구소 소장) 선생에게서 받음(2012.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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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11.26. 조선어연구회의 조직 확대를 위한 발기회를 가짐.
    1921.12.03. 조선어연구회의 확대․강화를 위한 총회를 열어 임 경재(간사장), 장 지영, 최 두선을 간사로 선출함. 사무실: 휘문고등보통학교.

    ▲1922년 4월에 준공된 휘문고등보통학교의 '회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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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01.03~06. 05.23~28. 06.13~18. 조선어 강습회를 엶.
    1927.02.08. 동인지 "한글" 첫 호를 펴냄(4×6판, 세로짜기). 제2호부터는 4×6배판으로 바꿈.
    1927.09.29(음력).(양력 10.24.) 한글사와 함께 경성 명월관 지점에서 가갸날 기념 축하회를 엶.
    1927.11.09. 한글사와 함께 가갸날 기념 강연회를 엶.

    ▼동인지 종간호가 된 제9호(1928.10.)의 앞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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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로 이름 바꿈: 조선어학회로 19년(1931~1949)

    조선어연구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순한 연구 단체에 머물 수 없을 만큼 외연이 확장되고 사업은 커졌다. 1929년의 한글날 대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고, 뒤이어 사전 편찬을 위한 여러 일들을 추진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확장의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어느 일본인이 일본인 관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조직한, 같은 이름의 단체가 서울에 있어 갖가지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자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1931년 1월 10일(토)의 정기총회에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하였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고치기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 되고 역사가 있는 이름을 고칠 까닭이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연구회”는 보기에 따라 유약한 느낌이 든다는 말도 나왔고, 이름을 바꿈으로써 모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왔다. 이러저러한 토론 끝에 마침내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기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그날 수정․채택한 규칙의 원문은 접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어학회 19년의 중요 활동을 보면, 1931년 1월 10일에 “조선어학회”로 학회 이름을 고치면서부터 회원의 참여도 활발해졌으며, 학회의 활동도 점차 규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다. 월례회도 계속하면서, 회원들의 뜻을 모아 동인지 한글을 학회의 기관지로 성격을 바꾸어 19 32년 5월치부터 간행하였다. 한편 1931년과 1932년의 여름방학 중에는 여러 회원들이, 동아일보사에서 전국적으로 펼치는 조선어 강습회에 강사로 나서서 조선어와 한글에 관한 것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조선어와 관련되는 각종 규정을 제정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30년 12월에 결의한 ‘조선어철자 통일’ 사업은 치밀한 작업과 치열한 토론을 거쳐 2년 10달 뒤인 1933년 한글날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간행함으로써 마침내 완성을 보았으니, 그것은 한겨레의 머리와 손으로 공동 제정한 최초의 표기법이었다. 1936년 한글날에는 표준어 사정(査定) 작업을 완료하였고, 1940년 6월에는 10년 가까이 공을 들여 얻어낸 결과물로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비롯한 4가지 표기법을 완성하여 발표하였다. 그것도 모두 한겨레 역사상 최초의 일들이었다.
    최종 목표는 조선어사전 편찬이었으니, 사전 편찬 사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1936년 3월에는 기존의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모든 업무를 조선어학회에서 통합하여 전담하였다. 전국 유지의 재정 원조로 사전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내 1942년 봄에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의 판짜기를 시작하여 인쇄 교정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10월부터 학회의 중심인물 30여 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갔으니, 그로부터 1945년의 8‧15 광복 때까지 조선어학회의 모든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것을 ‘조선어학회 수난’이라 한다.
    8‧15 광복 직후에는 동시에 많은 일들을 수행하였다. 조직을 정비하고 나서 가장 먼저 국민 교육에 사용할 각종 교과서를 편찬하고 발행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국어교사 양성에 주력하였다. 왜말 몰아내기에도 많은 힘을 쏟았으며, 각종 한글 강습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회원들이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힘을 나누어 흩어진 원고와 자료를 수습하여 조선어학회의 역사적 과업인 사전 편찬 작업을 다시 정상화하여, 마침내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 겨레 앞에 바치었다. 그리고 1949년 5월에는 제2권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글자살이의 합리화를 위하여 「한글전용법(1948)」 제정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어서 한글전용 운동을 거국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1949년 6월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글전용촉진회’를 창립하였다.
    1949년 3월 24일에는 한글학회의 재정을 뒷받침할 “재단법인 한글집”을 설립하였다.

    ▼화동 회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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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 수난'의 전말

    ○일제의 조선어 탄압: 1919년 3‧1 항쟁에 놀란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무단 정치’를 누그러뜨리고, 잠시 언론·집회·결사 등을 허용하는 등 ‘문화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은 변하지 않았고, 갈수록 학정을 자행하였다. 1936년 12월에는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만들어 그들의 비위에 거슬린 사람들을 ‘요시찰인’이라 하여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6월 7일에는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무조건 검거하였고, 1938년 2월에는 ‘흥업구락부’ 회원들을 검거하였다. 1938년 4월 1일부터는 ‘조선교육령 개정령’에 따라 그나마 이름만 남아 있던 ‘조선어’를 모든 학교의 교과목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고, 1940년 2월 11일부터는 ‘조선인 씨명(氏名)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제로 시행하였다. 그 해 8월 10일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고, 조선어 잡지들도 점차로 폐간시켰다. 1941년 3월 10일에는 ‘사상범 예비구금령’을 내리어 독립 운동을 할 우려가 있는 사람을 미리 구속할 수 있게 하였다. 12월 8일에는 미국과 전쟁을 벌여 조선 학도병을 모집하여 전장 최전선으로 내몰았고, 1942년 봄부터는 조선 국산 장려 단체와 국사 연구 단체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조선어학회의 연구 및 편찬 활동: 조선어학회는 이처럼 일제의 강압 정책이 시행되는 가운데서도 묵묵히 할 일을 해 나갔다. 1926년부터는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을 가졌고, 1929년 10월에는 경향의 각계 인사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사전 편찬의 불씨를 지폈다. 1930년 12월에는 총회에서 조선어철자법 제정을 결의하여 1933년 10월에 완성하여 공표하였다. 1931년부터는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조선어 강습회를 열었으며, 1932년 5월부터는 기관지 한글을 월간으로 간행하여 민족을 계몽하였다. 1934년 10월부터는 표준말 사정(査定)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에 그 결과를 간행하였다. 1940년 6월에는 10년 가까이 연구하여 완성한, 서양 외래어 표기법, 일본어 표기법, 조선어 로마자 표기법, 조선어 음성 기호 표기법 등을 발표하였다.
    그런 일들을 수행하는 한편, 그런 결과를 바탕으로 1936년부터는 궁극적인 목표인 사전 편찬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학회 임원진과는 별개로 정 인승, 이 극로, 이 중화, 한 징, 이 윤재, 권 덕규, 정 태진, 권 승욱 등이 편찬 실무에 종사하였다. 일제의 태도를 주시하면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940년 3월 3일에는 조선어사전 출판 허가를 간신히 받았고, 원고 작성이 90%쯤 이루어진 1942년 3월에 이르러 대동출판사 노 성식 사장의 헌신적인 협조로 원고 일부의 조판과 교정에 착수하였다. 그렇게 사전 간행의 막바지를 향하여 달리던 9월 5일에 사전 편찬원으로 일하던 정 태진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붙들려 가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여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사전 편찬원으로 일하고 있던 터였다.
    ○‘조선어학회 수난’의 발단: 영생여학교 학생 중에 박 영희가 있었다. 그 학생이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7월, 한집에 살던 그의 삼촌 박 병엽이 친구를 만나러 함흥 이웃에 있는 흥원읍의 전진역에 갔다가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반일 감정이 컸던 박 병엽은 경찰의 물음에 고분고분 응하지 않았고, 그것을 빌미로 경찰은 가택 수색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찰이, 영희가 2학년 때 쓴 일기장에서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는 문구를 발견하였다.
    영희는 조선어를 쓰다 꾸지람 들은 일을 그렇게 표현했으나, 그 경찰은 일본어를 사용하다 꾸지람을 들은 것으로 몰아갔다. 일본측에서 보면 당시의 “국어”는 일본어였으니, 그럴 해석을 할 여지도 없지 않았다. 경찰은 일본말을 썼다고 꾸지람을 한 선생이 누구냐고 다그쳤으나, 철없던 2학년 때에 동급생끼리 조선어를 “국어”라고 썼다는 자백만 받아냈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을 종료하지 않았다. 2년 전의 선생이 조선어학회로 옮긴 정 태진과, 공민 담당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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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에서 "한글학회"로 이름 바꿈(1949)
    -한글학회 제1기 21년(1949~1970)-

    학회 이름을 바꾼 배경: 8‧15 광복은 되었으나 한겨레는 남북으로 나누어졌고, 급기야 남쪽에서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을 수립하였고, 북쪽에서는 9월 9일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북쪽에 “조선”이란 나라가 선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조선어학회”란 이름이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조선어학회를 앞장서서 이끌던 이 극로가 평양에서 돌아오지 않는 일까지 겹쳤다. 그는 1930년 1월 5일의 정기총회에서 처음 간사로 선출된 이후 줄곧 간사 또는 간사장을 맡아 학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큰사전의 편찬과 발행에도 그의 이바지가 매우 컸다.
    8‧15 광복이 되자 그는 몇몇 정치 단체와도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런 연고로 1948년에 열린 남북 협상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이 났고 돌아올 사람은 모두 돌아왔으나, 그는 끝내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하루아침에 조선어학회는 불순한 단체로 오인받게 되었다. 그런 오해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 전까지 "조선말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발행했던 사전은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찍어 내었고, 학회 이름은 “한글학회”로 고쳤으니 1949년 10월 2일의 일이다. (북쪽에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조선”을 기피하게 된 것은 조선어학회만의 일은 아니었다. “조선체육회”는 1948년 9월 4일에 “대한체육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조선기독교서회”도 “대한기독교서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글학회”로 바꾸기까지의 과정: “한글학회”로 바꾸기까지의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서울 회원 64명 중에서 42명의 출석으로 1949년 9월 25일―애초에 9월 18일에 열 계획이었으나 뇌염이 번져 연기함―에 정기총회를 열었으나 “회원 여러 분의 열성 있는 토의로 말미암아 하루 동안에 회의를 다 마치지 못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정도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10월 2일에 35명이 출석한 가운데 속개하여 회원들이 제안한, 다음과 같은 이름들(괄호 속은 제안자)을 두고 장시간 토론하였다.

    한글학회(정 인승) 국어 학회(정 태진)
    국어 연구회(이 희승, 방 종현) 우리말 학회(이 강로, 유 열)
    한글갈 모임(최 상수) 대한 국어학회(최 현배)
    한국 어학회(김 윤경) 대한 어학회(최 현배)

    토론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증언은 아직 접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글학회” 쪽으로 기울어진 데에는 이미 20여 년 발행되어 온 기관지 한글의 존재와, 당시에 학회에서 힘차게 펼치던 한글만 쓰기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게는 정치 중립적인 고려도 했지 않았나 싶다. 어떻든 8개 가운데 “한글”을 내세운 이름은 둘밖에 없었으나 표결 결과 그렇게 결정되었으며, 회칙에 등장하는 “조선”도 모두 “대한”으로 바꾸었다.
    그러한 속내는 잘 모른 채 “한글학회”라는 이름에만 기대어 학회의 목표를 아주 수정한 것으로, 다시 말하면 한글 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을 그렇게 바꾼 것으로 오해하거나 해석하는 이가 많은데, 활동 방향을 수정한 것은 없었다. 그 뒤로도 “한글학회”라는 명칭에 대한 재검토 요구는 참참이 이어졌는데, 예컨대 1981년 5월 6일의 정기총회에서 김 계원 회원은 “조선어학회”로 되돌리든지 “한국어학회”로 고치자는 제안을 정식으로 한 바 있다.

    ▼신문로 회관(옛 회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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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비즈"에 대한 대체 용어를 생각해 보셨는지요?
    한글학회는 지난해 연말 다른 10여 개 기관, 단체와 함께 서울특별시와 '공공언어 바르게 쓰기' 업무 협약을 맺었습니다.
    따라서 그 동안 서울시에서는 여러 일들을 준비하고 시행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쿨비즈"를 대신할 우리말을 서울시 행정용어순화위원회를 열어 "시원맵시", "시원차림", "간편차림", "간편복"을 내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뽑아 주시면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 서울시에 내놓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의견은 이번 주 일요일(6월 24일)까지만 받습니다.
    아래 그림은 서울시에서 서울마니아(서울시 트위터)를 통해 알리고 있는 내용인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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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새소식" 제480호(2012. 08.)

    [추모사]
    ● 우리 겨레의 영원한 스승, 헐버트: 김 종택 … #표2

    [머리글]
    ● 우리 말글의 위기와 희망-올해는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 70돌 기념의 해: 민 현식 … 2

    [우리말과 우리]
    ● 우리 말글 빛나고 있다: 박 홍길 … 4
    ● 우리말 추방에 앞장선 공공기관: 방 석순 … 6
    ● 우리말 '이자'를 살리자: 정 재도 … 8

    [글 이삭]
    ● 성적 표기는 '가나다라마'로: 김 경수 기자 … 9

    [한글과 우리]
    ● 한글로 힘센 나라를 만듭시다: 이 대로 … 10
    ● '한자 문맹'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정 환영 … 12

    [눈길이 머무는 곳]
    ● 이런 글도 있습니다 / 이런 말도 있습니다 … 13

    [기자회견문]
    ● 통합진보당 노 회찬 의원입니다 … 14

    [청원서]
    ● 강 창희 국회의장님께 … 15

    [다문화 한글가족]
    ● 아르바이트와 팁 1만 원: 유 아린 … 16

    [시]
    ● 거룩한 마음: 권 순채 … 19

    [말샘 글샘]
    ● 우리말 속의 놀림말들 … 20

    [새소식]
    ● '한글 국회 만들기'에 나선 노 회찬 의원 … 21
    ● (사)석인정태진선생기념사업회 해산 결의 … 22
    ● 제36회 전국 학술 대회 … 23
    ● 제275차 논문 발표회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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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hangeul.or.kr/board/zboard.php?id=cm03&categor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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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한글단체 대표들은 서울에서 대전 문화재청까지 가서 한글단체와 국민의 뜻을 알렸다. 그 때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어딘가 일이 있다고 가서 김찬 문화재청 차장에게 건의문을 준 일이 있다.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달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못들은체 했다. 그리고 한자로 달았으나 바로 금이 가서 다시 만들어단다고 하면서 지난 4월에 공청회까지 했는데 아직 꿀먹은 벙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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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을 공휴일로!'라고 쓴 옷을 입고 백두산에 올라 한글날을 공휴일로 되돌리고, 광화문 문패도 한글로 바꾸겠다고 다짐하고 빌었습니다. 지난날 두 번 천지에 갔었는데 그 때마다 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불어서 제대로 못 보았는데 이번에는 하늘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어서 고맙고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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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4묘역에 있는 외솔 최현배 선생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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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국립묘지에 있는 건재 정인승 선생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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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지하철 알림글입니다. 세금으로 나라말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한자를 섞어서 쓰지 못해 환장한, 한심한 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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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문패를 한글로 달자는 시민이 많습니다. 지금 광화문은 조선시대 경복궁의 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얼굴이고 서울 상징입니다. 그 문패를 오늘날 글자인 한글로 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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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허경무 박사가 발표한 훈민정음 해례본체가 가장 좋아보였습니다. 광화문에 이 문패를 달면 우리 말꽃이 활짝 피고 힘센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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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대통령이 스승의 날에 일본 선생을 청와대로 모시니,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습니다. 그 땐 일본인들이 참 좋은 때였습니다. 한글은 어려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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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국회의장을 만나서 국회 깃발과 본회의장 정면, 그리고 국회의원들 가슴에 달고 다니는 보람에 쓰인 한자 國자를 우리 한글 [국회]로 바꾸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때 강창희 국회의장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해가 저물어가는 오늘까지 아직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어째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한인국 글자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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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옆 통의동 근처에 사는 분들이 그 지역을 '세종마을'이라 부르자고 행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서촌'이라고 하자더군요. 옛 부터 경복궁 옆 동쪽에 북촌이란 마을은 있었지만 서촌은 덕수궁 서쪽에 있다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서촌'이란 한자말이 좋다면서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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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학회 직원들들이 내일 기자회견 때 쓸 구호판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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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연구소 소장 반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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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사시는 안마태신부님께서 며칠 전에 서울에 오셔서 한국어정보학회 진용옥 회장, 정달영 부회장님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게 한글날을 공휴일로 만드느라 애썼다고 말하면서 한글학회에 후원금 200달라를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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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한글이 태어난 경복궁 문인 광화문에 이런 문패를 걸어선 안 됩니다. 한글로 당장 바꾸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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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잘하는 일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이들이 문화재위원들인가요? 아닙니다. 문화재위원들도 이제 한글이 태어난 경복궁 문인 광화문 문패는 한글로 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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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원 개선 결과 김종택 회장 연임>
    - 2013년도 한글학회 정기 평의원회/회원총회 -


    한글학회는 3월 23일(토) 오후 2시부터 한글회관 얼말글교육관에서 2013년도 정기 평의원회를 열어 새해 사업 계획과 예산안을 심의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이 날 임원 개선은 이사 11명과 감사 2명 선출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사 선출 결과: 구 현정(상명대 교수), 권 재일(서울대 교수, 전 국립국어원 원장), 김 봉모(부산대 명예교수), 김 종택(경북대 명예교수), 김 차균(충남대 명예교수), 리 의도(춘천교대 교수), 이 관규(고려대 교수), 이 상규(경북대 교수, 전 국립국어원 원장), 임 지룡(경북대 교수, 경북대 부총장), 정 동환(협성대 교수), 하 치근(동아대 명예교수).
    ▶감사 선출 결과: 양 태식(서울교대 교수), 오 동춘(짚신문학회 회장).

    평의원회에 이어, 새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첫 회의를 열고, 김 종택(경북대 명예교수) 이사를 회장으로, 김 차균(충남대 명예교수) 이사를 부회장으로 뽑아, 앞으로 3년 임기 동안 연임하게 되었다.

    오후 4시부터는 같은 자리에서 2013년도 정기 회원총회를 열었는데, 이날 총회에서는 지난해의 사업 실적을 보고 받고, 새해 사업 계획과 예산안, 그리고 지회 사업 실적과 사업 계획을 의결하였다.
    한편, 회원총회에 앞서 2012년도 "한글"에 실린 논문 가운데서 우수 논문을 선정하여 연구 보조비(100만 원)와 함께 상장을 드렸다. 이번 우수논문상에는 윤 애선(부산대) 교수의 <한국어 어휘 의미망 KorLex 2.0-의미 처리와 지식 공학을 위한 기반 언어 자원->과 양 정석(연세대) 교수의 <'느' 분석론과 '있다', '없다'의 문제>가 상을 받았다.

    2013. 3. 25.

    한글학회
  • 1972년에 처음 한글학회가 낸 한글새소식 1호에 한글이 태어나면서 한글을 살리고 빛내려고 애쓴 정치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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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면도 몽산포해수욕장에서 꽃지 24킬로 완주 환상의 코스 
  • 한국 사람이면 한국말을 모두 잘알고 잘하지만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말을 더 바르고 잘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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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말 달력, 참 좋습니다.
    cafe.daum.net 
  • 지난달 18일 새누리당 박인숙 외 9명의 국회의원이 초중등교육법의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초중등교육법 제29조는 교과용 도서의 사용에 관한 법률 규정이다. 제29조의 2항에 "교과용 도서는 한글로 작성하되, 그 뜻을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한 한문교육용 기초 한자를 함께 쓸 수 있다"라는 규정을 새로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즉 초중등 교과서를 한글로만 기술하지 말고, 한자를 병기하자는 주장이다.

    www.ohmynews.com  
    지난달 18일 새누리당 박인숙 외 9명의 국회의원이 초중등교육법의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초중등교육법 제29조는 교과용 도서의 사용에 관한 법률 규정이다. 제29조의 2항에 "교과용 도서는 한글로 작성하되, 그 뜻을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한 한문교육용 기초 한자를 함께 쓸 수 있다"라는 규정을 새로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즉 초중등 교과서를 한글로만 기술하지 말고, 한자를 병기하자는 주장이다. 법률안 개정의 이유로, 10명의 국회의원은 국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어휘력을 신장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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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우리 입맛에 맞는 누리그물(인터넷) 통신 환경을 만들자.
    오늘날 21세기는 누리그물(인터넷)을 이용한 지식정보화 시대요 문화 경쟁시대라고 말한다. 나도 이 말을 실감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지식과 정보를 만들기에 매우 편리한 셈틀(컴퓨터)이란 기계가 나오고, 그 지식과 정보를 아주 빠르게 서로 주고받는 최신 누리그물(인터넷)통신 수단이 생기면서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www.jabo.co.kr  
    1. 우리 입맛에 맞는 누리그물(인터넷) 통신 환경을 만들자. 오늘날 21세기는 누리그물(인터넷)을 이용한 지식정보화 시대요 문화 경쟁시대라고 말한다. 나도 이 말을 실감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지식과 정보를 만들기에 매우 편리한 셈틀(컴퓨터)이란 기계가 나오고, 그 지식과 정보를 아주 빠르게 서로 주고받는 최신 누리그물(인터넷)통신 수단이 생기면서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더욱이 우리 나라는 셈틀과 찰떡궁합인 한글이 있기에 국민이 쉽게 셈틀과 친해지고 이용하게 되면서 누리그물통신도 빨리 발달하고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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