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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13일 Facebook 이야기
한글빛
2013. 6. 1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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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 ㅅ쌍!media.daum.net
【서울=뉴시스】표주연 기자 = 주요 학원들이 100% 선행교육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학원은 선행 학습 기간이 최장 10년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15개 주요학원에 대한 선행학습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13일 밝혔다.15개 학원들이 제공하는 사교육 프로그램을 조사한 결과 모두 선행 교육 상품인 -
신문이나 방송, 학자나 정치인들은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백성들이 나쁜지 좋은지 가리지 않고 따라하기 때문에...저는 지난날 할 말은 하고 살았습니다. 세종임금께서 어린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글자를 몰라 못하다시며 배우고 쓰기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들어 주셨기에 정치인이고 언론인이고 학자고 잘난체 하는 놈들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나보다 어린 백성들이 아니고 나보다 젊은이들에게 비굴하게 살지말고 떳떳하게 살라고 하고 싶습니다.백두산, 분홍바늘꽃 / 낮은 곳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고산 식물이기 때문에 이 아랫녘에서는 만나기가 힘들죠. 우리나라에서는 야생의 상태로 만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설악산 고산에서 누가 만났다는 말은 있습디마만 이렇게 군락으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희귀한 꽃이 백두산에는 지천입니다.
7월 25일 시민행동21에서 백두산 식물을 소개할 계획입니다. 8월에 백두산 탐사 떠나는 우리 회원님들 예비 학습 차원에서 옛날 비슷한. 시기에 만났던 꽃들을 정리해 보는 것이죠.
야생화에 미쳐 살던 때라 사진에 대한 욕심이 많았었습니다. 카메라 3대를 들고 올랐었지요. 마미야 중형 카메라, FM2, 소니707 거기에 삼각대까지.... 제대로된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으로. 참고로 마미야는 렌즈 3개 합하면 무게만 4키로가 넘습니다. 삼각대 합하면 정신나간 사람이나 할 짓을 했었지요. 결국 10시를 넘기지 못하고 다 포기 하고 소니만 들고 다녔습니다.
백두산 사진은 18미리 정도 광각을 꼭 지참하라는 권고를 하고 싶습니다. 105미리 접사렌즈와 편광필터도 필요합니다. 비가 내리면 잎에 번쩍거리는 느낌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짐은 줄일 수록 좋습니다. 필요 없는 짐 지고 다니느라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백두산 식물에 관심 있는 분들은 25일 저녁 7시 30분 시민행동21 사무실로 오세요.뜻은 좋은데 발음하기가 민망합니다.
* 据緊安代(거긴안대) : 편안함 대신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을 택한다
* 苦患强咤(고환강타) : 당신은 괴로운 근심도 굳센 마음으로 이겨내는 강한 사람
* 足加示悟(족가시오) : 만족을 더하여 깨달음이 보인다는 뜻으로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미덕
의미만 가슴에 새기세요. ㅋㅋ ^.^~삶은 하나의 거울이다. 당신의 웃음에 따라 웃고 당신의 울음에 따라 운다.푸른 꿈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한 발, 한 발 오를 거다.
처음엔 높아보이지만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바로 꼭대기에 다달을 것이다.
걸을 때는 꼭대기는 안 보고
발 아래만 보고
한 발, 한 발 오를 거다.
한 발에 꼭대기까지
가려고 하지 않고
한 층씩 오를 거다.중국 절강성 소흥은 강남이다. 그러나 거기도 겨울엔 서리가 내린다. 봄 나물에 서리가 내린 것을 보면서 내 나라가 그리웠다.저는 130년 전 이 나라가 망해 갈 때 이 나라에 와서 한글을 우습게 여기는 이 나라의 관리들을 보고 한심해 하면서 3년만에 한글로 세계지리 사민필지(선비나 백성 모두 꼭 알아야 할 지식)교과서를 만들어 이완용, 이승만,주시경 들을 가르친 미국인 헐버트가 한글로만 쓴 [사민필지] 머릿글을 보면서 부끄럽다는 생각과 함께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떨굽니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흰머리산 오르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이날 꼭대기에서
한글날을 공휴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하늘과 조상께
빌겠다는 마음으로
죽어라 오르고 또 올라갔다.
아 저 푸른 하늘같은
하늘못 물을 보니
힘이 손았다.
나는 해내고 말겠다고
다짐했고 느꼈다.
그리고 이 해가 가기 전에
해냈다.저는 독섬에 가서도 한글날 공휴일을 외쳤습니다.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해냈습니다. 기쁩니다. 한글 만세! 배달 겨레 만세! 그 길이 외놈을 이기고 미국과 중국에 떳떳하게 사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1950년 남북은 왜 누구를 위해서
서로 총뿌리를 겨누고 싸웠을까?
지금 남북은 왜 누구를 위해서
이를 갈고 욕을 하면서 싸우려 할까?
알 수 없는 전쟁,
아무도 이익되지 않는 바보같은 전쟁
꼭 해야만 할까?
이름 없는 백성은
알 수 없어 답답하다.기다림
저는 꽃 피는 봄을 기다립니다.
저 꽃은 기다리기만 해도
봄이면 핍니다.
그러나 나는 저 나무 꽃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사는 나라, 사람들 마음 속에도
밝은 꽃이 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 마음대로 아니 됩니다.
힘 세고, 돈 많은 놈들이 제 멋대로
제 마음 속에만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기다립니다.
그리고 몸부림을 처봅니다.
언제간 피리라 믿고...하늘연못
가장 시원하고 깨끗한 물
저는 새벽마다 저 물을 가슴 속으로 마십니다.
숨을 들이 쉬면서
마음으로 마십니다.
가슴과 배와 온 몸으로
마십니다.
그리고 입과 손끝과 발끝으로
내 보냅니다.
수십 번, 수백 번 마시고
내 보냅니다.
제 마음과 몸에
저 하늘연못 물이 들어와서
힘을 솟아나게 합니다.
그 힘으로 날마다 힘차게 삽니다.
저는 흰머리뫼
하늘연못 물로 삽니다.꽃집에 꽃 바구니가
내 발길을 잡습니다.
꽃은 보기 아름답고
기분 좋게 하는 향기가 나서
언제 봐도 좋습니다.
봄 바람과 함께
눈과 코를 즐겁게 합니다.
한참 바라보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단비
언땅을 녹이는 봄비가 되고 싶다.
하루 밤 사이에 새싹을 돋아나게 하는
봄비가 되고 싶다.
무더운 여름 갈라긴 논을
촉촉하게 적시는 단비가 되고 싶다.
반비를 맞고 돋아나는 새싹을 보니
힘이 솟아나고 얼굴이 밝아진다.
참 좋은 봄날 아침이다.산수유
드디어 서울에도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봄비를 마시고 노랗게 빛나고 있습니다.
내 마음도 밝아집니다.
또 봄비가 오면
온 땅위에 새싹들이 더 많이 돋아나겠지요.
그리고 무더위에 열매가 익어서
가을에 또 잎이 지고 앙상한 나무가지만 남겠지요.
봄꽃처럼 사람들 마음을
아름답고 밝아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1500년 전에 신라가 중국 말글과 문화 식민지가 되는 길을 갔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미국 말글과 문화 식민지로 가고 있어서 그걸 막아보려고 나름대로 애써봤습니다. 그러나 힘이 듭니다. 도와주세요.1968년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우리 말글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 허웅 지도교수님과 뜻벗들이 북한산에 들놀이 갔을 때 찍그림입니다. 우리는 그 때 박정희 정부가 한글전용 정책을 펴게 했고, 광화문 현판도 한글로 달게 했었지요. 한글과 세종을 되살려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외치면서... 이제 허웅 교수님은 하늘나라로 가셨고 나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 뜻을 이어 살려주면 고맙겠습니다.고마운 동무들. 17년 전 쯤 관악산에 함께 동무들이 그립습니다. 나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정치인과 공무원들보다 국민이 더 우리 말글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25년 전 쯤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만났던 이 찍그림에 있는 국어운동대학생회 후배들이 보고 싶습니다.19년 전 14대 국회 때 국회의원들 이름패를 한글로 만들어다 주면서 한글로 바꾸라고 하던 찍그림입니다. 벌써 여기 계신 어른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안 계십니다.27년 전 한글날에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 꽃을 바치고 후배들과 앞으로 할 일을 논의하던 찍그림입니다. 이 동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만 아직도 이렇게 혼자 떠들고 있으니...1990년부터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지면서 우리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원들은 한글날에 덕수궁에서 만나지 못하고 그 다음 일요일에 잠실 몽촌토성에서 가족들과 함께 만났습니다. 이제 한글날이 공휴일이 되었지만 문화재청놈들이 세종대왕 동상을 덕수궁에서 없애버렸으니 우리는 다시 덕수궁에서 만나지 못합니다.청계천국민석유 출범식.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앞장서서 하는 일입니다.종로 4가 기독교백주년기념관제가 닮고 싶은 분, 제가 모시던 분, 오리 전택부 선생님이십니다. 93살 할아버지였지만 웃으시는 모습이 어린애 같습니다.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른 분을 모시고, 이 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공병우 스승님입니다. 저는 예수나 석가나 공자는 잘 모릅니다. 제가 감히 닮을 수는 없고 우러러보는 스승입니다. 오늘 아침은 제 두 스승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올려다본 하늘
거꾸로 매달려
하늘을 보니
어듭지만 참 아름다웠습니다.
나무 잎이 하나도 없는
앙상한 나무가지도 멋있었습니다.
오늘 날씨 참 좋습니다.
어두운 새벽이 열리는 모습이
아주 아름답습니다.벗이여!
오늘도 새날이 밝고 있습니다.
춥다고 방에서 움추리지 말고
일어나 시원한 새날을 맞이하세요.
굳은 몸이 풀리고
얼어붙은 마음도 녹아요.
힘이 손아나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벗이여!
오늘도 힘차게 삽시다.김종택 새 한글학회 회장이 총회 진행중입니다.제 아내가 만든 제 외손자 백일 축하 떡입니다. 쌀을 방앗간에 가서 빻아서 집에서 찐 떡입니다. 제 생일 때도 아내가 가끔 이렇게 축하 떡을 해줍니다. 이런 제 아내가 고맙습니다.백일 된 제 외손자입니다.고양이가 약을까요, 쥐가 약을까요? 쥐가 약더군요. 제가 중국 소흥에 있을 때 저는 회계산에 자주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조그만 암자에서 쉬고 있는데 그 마당에서 고양이가 쥡을 잡아가지고 먹지 않고 굴리고 물어 던지며 놀고 있더군요. 그런데 고양이가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죽은 체하던 쥐가 쏜살같이 도망을 갔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애기봉, 김포, 임진강,황해도. 저 땅에도 빨리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길 바란다. 저 강에서 함께 고기를 잡고 놀 수 있기 바란다.봄나물
된장에 봄나물을 넣고
끓여 먹으면 힘이 납니다.
새싹에 새힘이 담겼나 봅니다.
새싹은 보기만 해도 힘이 납니다.
어린이도 그렇습니다.
새싹과 어린이를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북녁 땅
애기봉에서 내려다 본 북녁 땅
임진강 건너 마을 양지바른 산아래
볼록하게 잘 생긴 아래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
평화 새싹이 돋아나고
산에 나무가 우거지면
저 예쁜 봉우리 아래
내집을 짓고 살고 싶다.
멀리 송악산이 북풍을 막아주는
엄마 젖가슴 같은 산아래 집을 짓고
임진강을 바라보는 창문을 내고 싶다.
그리고 임진강에서 낙시도 하면서
물고기를 잡고 싶다.중국 절강성 대우릉 산에 있는 쉼터입니다. 중국인들도 우리처럼 낙서를 좋아합니다. 이태리인들도 그렇더군요.중국 회계산 아래 향로봉선사 옆에 풍경입니다. 중국인들도 동전을 던지며 복을 많이 빌고 있습니다.몇 해 전 날씨 좋은 가을에 애기봉에서 찍은 임진강 건너 북쪽 땅이다. 개성 송악산이 뚜렸하게 보인다.이제 봄이다.이끼도 봄이란다.여러분! 동아일보가 저 한자로 쓴 제호를 언제 쯤 한글로 바꿀까요? 저는 7년 안에 바꿀 것으로 봅니다. 그 때가 창간 100년이 된다니까요. 어쩌면 조선일보가 그 안에 먼저 제호를 한글로 바꿀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동아일보가 먼저 빨리 한글로 바꾸길 바라고 있습니다.봄꽃
꽃은 여름에도 가을에도 핀다.
그러나 봄꽃이 가장 반갑고 예쁘다.
노랑꽃이 가장 봄꽃다웁다.
겨울이 있었기 때문인가보다.
겨울동안 꽃 보기 힘들었기에
더욱 좋아보이나 보다.
아름다운 꽃을 마음껏 보고
사랑하고 즐기자.
꽃처럼 웃자. 밝게 바라보자.나를 찡그리게 하는 사람 이름패. ㅇㅇㅇ1965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싶은 데 갈 길이 막막해 고민을 할 때에 내게 용기를 주시고 한글마당으로 이끌어주신 김윤경 교수님 얼굴 그림을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보고 옛일을 생각했던 사진입니다. 1942년 왜정 때에 한글을 지키려다가 왜놈들에게 끌려갔던 조선어학회 선열들 얼굴 그림을 정리하다가 뵈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신문과 방송에서 알려졌으며 8살에 미국 대학원에 들어갔다는 분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공감이 갔습니다. 저는 한글운동을 하고 싶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국회의원 299명 가운데 14명이 제 이름을 한자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왜 한자로 이름을 쓸까요?나무를 뽑고 다시 심으려면 바로 심어야 합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다행이지 저 나무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말라 죽을 때까지 놔두려나 봅니다. 며칠 전에도 저 꼴이더니 오늘 아침에도 그래서 사진을 찍었습니다.오늘도해가 뜹니다. 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하도 전쟁놀이 하는 얼빠진 놈들이 많아서... 그렇지만 밟고 힘차게 또 하루를 시작합니다.할미꽃
내 어릴 때 봄날
학교에 갈 때 누런 잔디 무덤 옆에
수줍게 피었던 정다운 꽃
이제 나도 늙어 할애비가 되어가니
어릴 때 봄날이 더욱 그리워진누나.저는 20여 년 전에는 제 이름표를 [리 대로]라고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리 대로]라고 이름표를 만들려고 합니다.미르말뫼에 뜨는 해
1300년 전 구리 지킴이들이
있던 미르말되 꼭대기에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없지만
그 발자취는 남아 있어
뒷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그 때도 뜨고 졌을 저 해는
그 때 사람들 삶을 알고 있을까?부처
금강산이 바라보이는
통일전망대에 서있는 부처
오늘도 동해 바다와
금강산을 바라보면서
남북이 하나가 될 날을
빌어주고 있겠지
그러나 그러나
남북 지배자들은
서로 잘났다고 싸움질이니
부처도 답답해 할 거야.
힘 없는 나도
저 부처처럼 홀로 서서
마음으로 빌고만 있어야 하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로다.오늘 서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초등학생이 버스를 타고 1000원을 냈답니다. 그런데 운전수가 찰깍찰깍 거스름돈을 떨어지게 하고 학생에게 가져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 그 학생이 그 동전을 가져갔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운전수가 학생을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너 그 돈을 다 가져가면 어떻게 해?”하니 학생이 움찔 놀라서 그 돈을 모두 다시 돈통에 넣더랍니다. 그리고 다시 받으라면서 동전을 50원짜리로 찰깍찰깍 떨어트리니 학생이 그 동전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한참을 가다가 운전수가 학생을 또 부르더니 “야, 100원 받아가.”라고 하니 학생이 또 100원을 받아가더랍니다.
한참 뒤에 그 학생이 내릴 때 마침 함께 내린 한 아줌마가 그 학생에게 “차비가 얼마냐?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초등학생 차비는 450원인데 1000원을 내니 운전수가 그러더랍니다. 누가 잘못을 한 일인지 모르지만 초등학생에게 좀 불친절한 거 같다고 아줌마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잔돈으로 준비해 타거나 버스카드로 요금을 내면 운전수가 편할 것인데 그게 문제였던 거 같습니다.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 무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망우리 고개에서 포장된 길을 가다보면 제 찍그림에 있는 한용운님 무덤을 알리는 돌기둥이 있습니다. 7호선 사가정역에서 내려서 가면 한강도 내래다보이고 고구려 유적도 있고, 경치도 좋습니다. 내일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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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 방정환은 1899년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7살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의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방정환의 집은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서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래서 방정환은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들이 상업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가업을 이을 것을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 만에 선린상업고등학교(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아들이 공부를 계속하기 바랐으나,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편집] 천도교와의 만남1916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곧 사직하고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가 천도교 기관에서 일한 이유는 부친이 성실한 천도교 신자였고, 방정환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결혼하였다.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으며, 당시 손병희선생이 지도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편집] 독립신문 발행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등사기로 찍은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일경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렸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하지만 같이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다.
[편집] 일본유학1919년 말,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방정환》전기에 따르면, 당시 일본경찰은 독립운동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을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였다. 1920년 《개벽》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였다.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동안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 선생이 살아있을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다음과 같은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2]
# 난파선
1.산드룡의 유리구두
2.왕좌와 제비
3.요술왕 아아
4.한네레의 죽음
5.어린음악가
6.잠자는 왕녀
7.천당가는길
8.마음의 꽃
9.꽃속의 작이어령 교수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 영문 이름이 좀 이상하다. 아무리 읽어봐도 [이어령]이 아니다. 요즘 문광부에서 발표한 영문 이름 표기방식에도 어긋났다.꽃 이름은 모릅니다.
그러나 예뻐서 찍었습니다.세종대왕님, 오늘도 세종대왕님께 고마워하면서 한글 자랑을 많이 했습니다.경희궁 정문이다. 내가 60년대에 동국대학에 다닐 때 이 문이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서 동국대학 정문으로 서 있었다. 그 때 문 이름이 황건문이었다. 한글회관 근처에 있어서 오랫만에 그 모습을 보니 여러 생각이 맴들았다.제가 어려서 살던 집입니다. 충남 서산군 해미면 언암리. 집 뒤 북쪽에 소나무가 우거져서 겨울에 따뜻했던 집인데 지금은 나라 시설이 들어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이 찍그림 갓난애가 백일 쯤 된 접니다. 오늘 제 외손자를 보면서 제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이 찍그림을 올리고 옛 생각을 합니다. 서 계신 두 분은 제 사촌 누님과 형님인데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어려서 많이 울었다는 데 지금도 무척 떠듭니다. 세월은 참 빠릅니다.http://cafe.daum.net/malel/9teA/708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데 가장 애쓴 신기남 의원께 고마운 마음을 표하면서 2003년에 신향식 뜻벗이 쓴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우리 사는 꼴이 너무 답답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할 게 없어서 한글역사문화관을 짓자고 해서 짓게 했더니 한글박물관이라고 하더군요. 이제 그 한글박물관을 재단법인으로 하자네요. 못난 놈들이라고 해야 할지, 가련한 애들이라고 해야 할지..저는 지난날 할 말은 하고 살았습니다. 세종임금께서 어린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글자를 몰라 못하다시며 배우고 쓰기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들어 주셨기에 정치인이고 언론인이고 학자고 잘난체 하는 놈들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나보다 어린 백성들이 아니고 나보다 젊은이들에게 비굴하게 살지말고 떳떳하게 살라고 하고 싶습니다.THE BEST ART PORTAL click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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