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스크랩] 국어독립운동 길에 들어선 이야기_ 1. 젊은이들이여, 큰 뜻과 꿈을 가져라!

한글빛 2015. 6. 15. 09:54

 


[이대로의 한글사랑] 국어독립운동 길에 들어선 이야기_ 1.

 

젊은이들이여, 큰 뜻과 꿈을 가져라!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

나는 1962년 예산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한글을 사랑하게 되었고, 1967년 동국대학교 2학년 때 국어운동학생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어독립운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국어독립운동 꿈을 꾸게 된 것은 50년이 되었고, 이 운동에 앞장서게 된 것은 45년째이다. 그러니 이 일에 내 한 삶을 모두 바친 셈이다. 언젠가 누구에겐가 내가 어쩌다가, 왜 이 일에 빠지게 되었는지 말하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때 함께 하숙하던 박형석 (태안읍 삭선리)님 앞에서 고향 젊은이들에게 말하게 되어 가슴이 설렌다. 아직 박 형도 내 속 마음과 지난 일들을 모를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일은 한국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비웃음도 당하고, 가로막는 이들이 많았고 지금도 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엉뚱한 일처럼 보여서 더 어려웠다. 처음엔 바닷물을 퍼내는 겪이어서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느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자나 깨나 한글 조심, 앉으나 서나 배달말 사랑’ 속에 살았다. 참으로 소처럼 바보같이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한글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의문 때문이었다. 1962년 예산농고에 다닐 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열람해 읽으려니 우리 말글로 된 전문 서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했기에 학교에 다니는 동안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넓히려고 했다. 그 때는 학교에 가지 않고 통신강의록으로 학교 공부도 하던 때라 대학에 안 가도 책을 많이 읽고 지식만 넓히면 대학에 나온 사람 못지않게 똑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농업 책을 열람해보니 일본 말글로 된 책이었다. 더러 우리 말글로 된 책이 있어도 한자 혼용에 우리 말투가 아니라 읽기 힘들었다.


광복 뒤에 바로 6.25전쟁이 일어나 혼란기를 겪은 때라 변변한 책도 학문도 발달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책보다 한글로 된 소설과 신문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좀 무게가 있다는 경제와 정치면은 한자혼용이고 어두운 사건을 알리는 사회면과 체육 문화면만 한글이었다. 한글로만 써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데 한자를 섞어 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정부는 1964년부터 한글로만 쓰는 교과서를 한자혼용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 발표가 있으니 농업 선생님도 ‘가치치기’란 말을 剪枝(전지), ‘꽃따기’란 말을 摘花(적화)라고 쓰며 한자공부를 강조했다. 농업시간이 한자공부시간이 되고 재미있던 농업공부도 흥미가 떨어졌다.


나는 그때 쉬운 우리말로 하는 교육이 효과도 좋고 우리가 가야할 말글살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른과 정부는 어린 학생들에게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로서 우리의 으뜸가는 자랑거리이며, 세종대왕은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어른들은 말로만 ‘한글을 사랑하자’고 하면서 실제로 쓰지 않았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거북선은 세계 최초 철갑선으로서 우리의 위대한 발명품이고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물리친 영웅이었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거북선이 어찌 생겼는지도 잘 모르고 있으며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훌륭한 한글을 잘 이용해서 우리 자주문화를 꽃피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또한 대단한 발명품인 거북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서 더 훌륭한 전투함도 만들고 기선을 만들지도 않았다. 한글이 진짜 좋은 글자라면 써야만 그 빛이 나고, 거북선이 진짜 대단한 군함이었으면 그걸 바탕으로 더 좋은 군함도 만들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는 교육이고, 잘못된 세상이며 모순이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국어학자들과 교수들이 한글 쓰기를 싫어했다. 정부는 1964년부터 한글만 써서 만들던 교과서에 한자를 섞어 쓰겠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국어정책이 그렇게 갈 것이라고 하니, 우리 농업학교 선생님들도 한자를 강조하고 농업용어도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쓰면서 가르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던 농업공부도 흥미가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정부가 국어정책 깃발을 잘못된 쪽으로 드니 국어교육과 생활이 뒤틀리고 모든 교육까지 삐뚤어지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예산농고 교훈이 ‘국토개발’이고,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유명 인사를 초빙해서 교양교육을 자주 했다. 그 여러 분들 가운데, 내게 사회운동에 나서도록 감동을 많이 주신 분은 농촌 운동가로서 새마을운동을 일으킨 한인수 선배와, 예산이 고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기술원을 만들어달라고 불러서 귀국한 미국 유타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이태규(이회창 전 국무총리 삼촌) 박사다. 이 두 분은 모두 자신만 잘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잘되게 힘써야 하고, 시골 사람이라도 큰 꿈을 가지고 더 큰일을 하라고 외치셨다.


웅변가이기도 한 한인수 선배는 “농촌이 잘 살아야 이 나라가 일어난다. 젊은 우리가 농촌을 부흥시켜야 한다.”라고 외치셨다. 이태규 박사는 “시골 농촌에 태어났다고 기죽지 말라. 지금 나와 내 아들과 며느리가 모두 박사로 미국에서 이름 날리고 있다. 젊은 고향 후배들이여, 큰 뜻을 세우고 꿈을 가져라! ”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 때 나는 신문을 보면서 느낀 것도 있기에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을 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죽는 날까지 이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야기 앞으로 이어감]

출처 : 한말글 사랑, 리대로.
글쓴이 : 나라임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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