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사랑

[스크랩] 한자병기 주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게 해 주는 글

한글빛 2015. 8. 1. 08:08

아래 글은 일본어를 잘 아시는 어느 한국분께서 인터넷 검색중에 어느 일본 사이트에 올라온 한글과 관련한 조금 황당한 글을 보고 답변을 하려고 자문을 구한다며 해석을 달아 쓴 것으로,

작금의 한자병기 주장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의 출처로 밝힌 주소는 이미 폐쇄되었거나 들어갈 수 없어 조금 아쉬웠습니다. (글이 조금 깁니다)





・朝鮮語に使われる表音記号文字. 創案されされたのは1443(嘉吉3)年, 李氏朝鮮第4代世宗の時代で, 1446(文安3)年に "訓民正音" の名で公布された, つまり官製の文字である.


조선어에 사용되는 표음기호문자 창안된 것은 1443년 이씨조선 제4대 세종의 시대로 1446년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즉 관제(기관에서 만든)문자이다.




・なお, これは「文字であって言語ではない」. 言語をハングル語などというのは, 日本語をひらがな語・カタカナ語・漢字語などというのと同じくらいの大きな誤りである.


더우기 이것(한글)은 문자이고 언어가 아니다. 언어를 한글어라고 하는 것은 일본어를 히라가나어 카타가나어 한자어 등 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잘못이다.




・ハングルは, 同様に表音文字である日本語のひらがなは大和言葉の発音記号であるのに対し, このハングルは漢字の発音記号である. ハングルは, 一つの漢字の朝鮮語発音を一文字で表現できるように作られている.


한글은 같은 표음문자인 일본어의 히라가나는 야마토언어의 발음기호인 것에 비해 이 한글은 한자 발음기호이다. 한글은 한글자의 한자어의 조선어 발음을 한문자로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ハングルには14個(制定当時は17個)の子音字(C)と10個(制定当時は11個)の母音字(V)があり, この24個を "Jomo" と呼ぶ. また "Jomo" を組み合わせ, Cが30個Vが21個作られる. ハングル1字はC+VかC+V+Cの組み合わせで形成され, 先頭に置けるCは19個, 末尾に置けるCは27個である. この全ての組み合わせは19×21+19×21×27で, 合計11,172個となる. これらのうち日常的に使用されるのは3,000~4,000個である.


한글에는 14개(제정당시는 17개)의 자음(C) 와 10개(제정당시는 11개)의 모음자(V) 가 있고, 이 24개를 jomo('자모'를 잘못 쓴것 같음)라고 부른다. 또 Jomo를 조합하여 C가 30개 V가 21개만들어 진다. 한글 1자는 C+V 나C+V+C의 조합으로 형성되어 선두에 오는 C는 19개 끝에 오는 C는 27개이다. 이 모든 조합은19×21+19×21×27으로 11,172개가 된다. 이것들 중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3,000~4,000개이다.




・もっとも, 日本語のかな文字がある日突然出来たわけではないように, ハングルも突如として出てきたわけではない. 最も有力な説は, 対馬の占部阿比留(ウラベ-アヒル)家に伝えられた神代文字(古代日本の文字)である "阿比留文字" (アヒル文字)を参考に作られているとされる.


원래 일본어 가나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 듯 한글도 돌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쓰시마의 우라베아히루 집에 전해진 신요문자(고대 일본문자)인 “아히루문자”를 참고로 만들어졌다고 보여진다.




・この文字が作られた当時は, 正字として漢文が使用されていた. そのため漢文で十分だとする保守派(反対派)の存在により訓民正音は蔑まされてきた. しかし朝鮮民族の民衆に漢文は難しすぎたため一部の知識階級の人しか利用できず, 大衆は不満を持っていた. つまり朝鮮では民衆の識字率が極めて低かったのである. そこで李氏朝鮮の王(世宗大王)や学者達によって訓民正音が作られたのである. 学者の言葉によると, 賢人なら一朝で, そうでなくとも10日で修得できる, とされた.


이 문자가 만들어진 당시는 정자로서 한문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문으로 충분하다는 보수파(반대파)의 존재에 의해 훈민정음은 업신여겨졌다. 하지만 조선민족의 민중에게 한문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일부의 지식계급층밖에 이용할 수 없었고 민중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조선에서는 민중의 문맹률이 대단히 낮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씨조선의 왕(세종대왕)이나 학자들에 의해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だが, 漢字に慣れ親しんできた学者や上流階級は, 全く読み書きが出来無かった女性でも文字の修得が可能だった訓民正音を "女文字" などと呼ぶなどして嘲り, 普及に反対したのである. 朝鮮が日本に併合されてから大いなる文字という意味の "ハングル" という名が考案されたが, なお地位の改善も識字率の改善も無かった.


하지만 한자에 익숙해진 학자나 상류계급은 전혀 읽고 쓰기가 안되었던 여성들도 문자의 습득이 가능한 훈민정음을 여자들의 문자라고 부르면서 조롱하고 보급에 반대했던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고 나서부터 큰 문자라는 의미의 한글이라는 이름이 고안되었지만 지위의 개선도 문맹률의 개선도 없었다.




・これに悲観したのは民族文化を誇る朝鮮人ではなく, 実は日本人である慶応義塾塾長, 福澤諭吉だった. 彼は, 朝鮮を文明国にするためには世界で起こっていることを知り, 文明開化の意味を知る必要があると考えたのである. そこで自腹でハングル活字を作り漢字ハングル混じりの新聞を発行して普及に勤めた. 清国官憲や朝鮮人の一部から激しい反発があったものの, 福澤の弟子, 井上が朝鮮で初の新開 "漢城旬報" の発行に成功した. この新聞は漢文の読めない多くの民衆でも読めるとあって人気を博した. 後期には漢文の比率が高まり, やがて廃刊に追い込まれるが, 後に漢字・ハングル混合文の新聞や雑誌などが登場することになり, 漢城旬報がハングルの普及に一役買ったことは疑いようがない.


이것을 비관한 사람은 민족문화를 자랑하는 조선인이 아니라 실은 일본인인 케이오대학장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그는 조선을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문명개화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비로 한글활자를 만들고 한자, 한글 병기신문을 발행해 보급하는데 힘썼다. 청국관헌이나 조선인의 일부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후쿠자와의 제자 이노우에가 조선에서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발행에 성공했다. 이 신문은 한문을 읽을 수 없는 많은 민중도 읽을 수 있어서 인기를 넓혀갔다. 후기에는 한문의 비율이 높아지고, 결국은 폐간에 이르게 되지만, 나중에 한자한글혼합문의 신문과 잡지 등이 등장하게 되어, 한성순보가 한글의 보급에 일약을 담당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以前は散々貶されていたハングルだったが, 後に民族の誇りとして扱われるようにまで地位が向上, 遂に漢字を駆逐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 現在では簡単な漢字の読み方などの教育が復活しているが, それでも漢字に対する需要意識の少ない韓国では, 自分の名前すら漢字で書けない韓国人は普通に存在する.


예전에는 굉장히 업신여겨졌던 한글이었지만, 나중에 민족의 자랑으로 취급받게 되기까지 지위가 상승되어 마침내 한자를 몰아내 버리게 된 것이다. 현재로서는 간단한 한자의 읽기정도의 교육은 부활되어 있지만, 그래도 한자에 대한 수요의식이 적은 한국에서는 자신의 이름조차 한자로 쓸 수 없는 한국인들이 있는 것은 보통이다.




・しかしハングルだけでは日本語のカナ文字と同様に表音文字であるため, 同音異義語の問題がどうしても避けられない. 朝鮮人が合理的な思考が出来ないのは, 漢字を失ったことが原因だとさえ言われているのである. 問題は日本語と同様に, 漢字ハングル混じり文にすれば概ね解決する.


하지만 한글만으로는 일본어의 가나문자와 마찬가지로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동음이의어의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조선인이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은 한자를 잃어버린 것이 원인이라고 조차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한자 한글 혼용문으로 하면 대강 해결된다.




・ そこで金大中(きんだいちゅう/キム・デジュン)大統領の時代になり, 漢字復活が検討されるが, 民族主義者の猛烈な反発によりかなり苦しい状況であるようだ. それでも道路標識や駅名標などから徐々に漢字表記を始めている.


그래서 김대중대통령 때에 한자부활이 검토되지만 민족주의자의 맹렬한 반발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인거 같다. 그래도 도로표식이나 역명 등은 서서히 한자표기를 시작하고 있다.

출처 :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글쓴이 : 행복만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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