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스크랩] 조선 침략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자혼용 퍼트린 `이노우에 가꾸고로` 글

한글빛 2015. 10. 13. 07:52

[아래 글은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발행 고문으로 와 있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꾸고로'가 1886년 한성주보를 왜 한자혼용으로 만들었는지 쓴 글이다. 조선 침략하기 좋게 하려고 일본과 같은 문체를 길들이려는 것이었다는 말을 털어놨다.

 

지금도 일본은 우리가 한글전용을 못하게 하려고 한자혼용 주장자들을 돕고 있다. 정치인 김종필, 박태준, 민관식, 이한동이 일본인이 바라는 한자혼용 운동을 하고 있고, 경성제대 출신 이희승, 이숭녕, 김형규 서울대 교수와 그 제자들이 일본이 바라는 한자혼용을 꾀하는 대표 인물이다.  그리고 포항제철, 대한항공, 농심, 효성 들들 대기업이 그들을 도왔다. 이들을 유교 세력과 친일, 수구 세력이 우러러보고 따르고 있다.

 

한국인들이 한자혼용 참 모습을 똑바로 알기 바란다. 우리가 또 중국과 일본에 짓밟히지 않고 어깨를 펴고 살려면 우리 정신인 우리 말글부터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것을....

 

 - 아래 '이노우에 가꾸고로'가 쓴 글을 번역한 김슬옹 박사 글 -

 

이 글은 朝鮮新聞社에서 간행한 朝鮮 統治回顧批判(조선통치의 회고와 비판), 소화 11/1936)에 실려 있는 協力融合, 福祉增進’(97-101)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통치의 여러 분야에서 직접·간접으로 관여한 핵심 일본인 87명의 글 90편 실려있다.

 

거의 중수필 형식으로 쓴 것으로 지은이들이 식민지 통치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라 정사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함과 그 만큼의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이다. 여기 번역한 글의 지은이 이노우에는 우리나라 초기의 신문 발행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다.

 

그동안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국한문 혼용이 줄기차게 남아 있는 것이 일본의 영향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이 입증하였는데(려증동, 1977, 한자 - 한글 섞어쓰기 줄글에 관한 연구. ‘한국언어문학’ 15/허재영, 1994, 일제 강점기의 한글운동, ‘국어교육과 말글운동, 서광학술자료사/김슬옹, 1995, 국한문혼용은 일제 침략의 산물이다, 사회평론·길지 1월호), 일본인으로서 주된 구실을 한 사람이 이노우에 가꾸고로오이고 이 글은 그의 행적을 스스로 고백한 글이다.

 

일본의 영향이 큰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국한문혼용 문체가 전적으로 일본 영향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문체변혁기에 일본이 끼어들어 그런 문체가 가속화되었을 뿐이다.

 

아무튼 일본인에 의한 국한문 혼용문의 가속화는 일본인이 신문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전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원문의 생생함을 위해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살렸다. 이를테면 閔氏, 韓日合邦명성왕후, 경술국치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민씨, 한일합방이라 하였다.

 

이노우에는 그 당시 일본 수구보수 세력의 논조를 그대로 따르는 전형적인 언론인이다. 이 글에서도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나 있고 식민사관에 철두철미한 점을 보여 주지만 그의 비판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현실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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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하고 융합하여 복지를 도모하자(번역)

 

경응의숙(慶應義塾) 국민공학원 이사장(國民工學院理事長) 이노우에 가꾸고로오(井上角五郞)

 

내가 처음 조선에 간 것은 그 유명한 대원군 사변이 있은지 얼마 안된 명치 15(1882) 12이었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민씨(閔氏) 일파가 정권을 잡고, 나라정책의 개혁을 도모하기 위하여, 우리 군인을 불러들이고, 또한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게 하고, 점차 혁신의 기운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대원군 등의 수구파는 이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크게 그 대책을 강구하게 되고, 마침내 명치 15 7, 폭도는 왕궁에 난입하여 중요한 직책의 사람들과 우리 사관을 죽이고, 게다가 우리 공사관을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당시의 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다다(花房義質)는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가 변고를 정부에 보고했다. 이리하여 이 사변도 이른바 제물포 조약으로 결말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 타께소에 신이찌로오(竹添進一郞)씨가 조선공사로서 부임하게 되고, 나는 이 분과 같은 배로 그 곳에 건너가게 되었다. 나는 경성(서울)에 도착한 후에 정부에서 준 저동의 집에 들었다. 당시의 일본 공사관은 진고개(泥峴)에 있고, 타께소에(竹添) 공사를 우두머리로 공사관원과 호위병 등을 포함하여 약 300명 정도의 일본인과 그 외 불과 십여 명의 일본 상인이 경성에 있었다. 실로 적적하고 쓸쓸한 상황이었다. 요전에 돌아가신 야마구찌타로오베에(山口太兵衛) 씨 등도 그 무렵부터 조선에서 터를 닦기 시작했던 분이다.

 

그리고 대원군은 그 난 때문에 중국 정부에 잡혀가 보정부(保定府)에 감금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원세개(袁世凱)와 진수당(陳樹棠), 그 밖의 참모와 함께 3천 명 정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경성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들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중국 상인은 크게 기뻐하여 속속 찾아와서 종로 부근에는 중국 상점이 줄지어 늘어설 정도였다. 그런데도 우리 쪽은 불과 12 명이라는 거의 보잘 것 없는 상태였다.

 

나는 조선 정부 아래에서 새롭게 신문 발행의 계획을 세워, 경성 남부의 저동(苧洞)에 있던 어용저(御用邸) 자리를 신문 공장으로 정하고, 여기에 인쇄 기계와 그 밖의 것을 설치하고, 그 옆에 새로 지은 집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교육 사무를 관장하는 박문국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그 총재로는 외어문독변(外衙門督辨) 민영목(閔泳穆), 부총재는 한성판윤 김면식(金冕植) 씨 등이고, 나는 외어문(外衙門) 고문으로서 그것을 주재하고, 신문의 발행에 임하게 되었다.

 

먼저 여기서 발행되었던 것이 한자만으로 쓰였던 한성순보이고, 그것에 대해서는 조선인 또는 중국인 중에서도 이러니저러니 비난이 있었는데, 호를 거듭함에 따라서 세간에서도 차츰 그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층 일반에 보급시키기 위해서는 한문체만이 아니라, 한문에 언문을 혼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깊이 느꼈다.

 

언문은 예부터 내려온 조선 문자인, 중국 숭배 사상에 사로잡혀 상류 계층은 한문만을 쓰고, 언문은 이른바 하층민들만이 썼었다. 일찍이 조선에서 쓰던 동몽선집(童蒙選集)은 한문만의 기술이고, 중국을 선진국으로 숭배하고 제나라를 그 속국으로 여기고, 제나라 글자인 언문을 천대하여 어디까지나 중국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이와 같이 동몽선집이 조선 사람들에게 심한 잘못된 생각을 품게 했기 때문에 후 러일전쟁을 거쳐 우리나라가 한국에 통감부를 둔지 얼마안 될 무렵, 즉 한일합방 전에 한국 정부는 명령하여 이 동몽선집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귀족도 한문 외에 언문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에는 이 언문 외에 이두(吏文)라고 하여 정부의 사무 취급에 주로 쓰이고 있었던 문자가 있었다. 그것은 중인이라고 일컫는 무리로, 즉 관리도 아니고, 노비라고도 할 수 없는 자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많이 있었다. 이 중인 계급이 관청의 사무에 이 이두를 언제나 썼다. 이와 같이 당시에 있어서는 한문, 이두, 언문이라는 세 갈래의 문자가 조선의 계급에 따라서 유통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선의 언문으로써 우리나라의 가명(가나:히라가나와 가다가나)과 비슷한 문체를 만들어 그것을 널리 조선 사람에게 사용하게 하여 우리나라(일본)와 한국을 같은 문체의 국가 상태로 만들고, 또 문명 지식을 주어, 일본에서 옛날의 고루한 사상을 바꾸고자 계획했던 후끼자와(福澤) 선생 뜻을 받들어 한문에 언문을 섞은 문체에 의해 신문을 발행하기로 했다. 그것이 곧 한성주보이다.

 

조선에서 이조 선조 이후의 정치사는 실질적으로는 당쟁사이고, 권력 투쟁사이다. 문관과 무관끼리 당을 만들고, 파를 이루어 서로 싸우고, 게다가 이것을 계속하며 또 스스로 여러 당파를 생기게 하여 격렬한 싸움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파 싸움 때문에 또는 국왕파, 왕비파가 되어 서로 싸우며 밀어내고, 또 어떤 사람은 중국과 손잡고, 또는 일본에 의존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그 외에 다른 곳에 매달리는 자도 있는 가지각색의 당파를 생기게 하고, 여기에도 누구인가의 당이 있고, 거기에도 누구인가의 파가 있는 상태에서 국왕은 그 거취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내가 갔을 무렵의 궁정에서는 국왕은 온 종일 주무시고, 오후 세 시 무렵이 되어 눈을 뜨시고, 네 시 무렵부터 입내(入內)라고 부르는 별입시(別入侍)란 자가 배알을 위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별입시는 국왕을 뵙고 다양한 의견을 말씀드리는 자이고, 이들 가운데는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는 인물도 있는가 하면, 또 아첨만을 일삼는 아무런 포부도 없는 자도 있고, 여러 종류의 인물이 별입시로서의 자격 아래에 궁중에 출입하며 국왕에 대하여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말씀드렸었다.

 

아울러 당시의 국정은 국왕의 전제(專制)에 의해 행해졌던 관계상, 한 분의 생각에 따라서 제멋대로 방침이 정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럿의 별입시를 대하기 때문에 앞 사람에게 한 이야기와 다음 사람에게 한 말이 앞뒤가 맞지 않을 때가 적지 않아서 그 말씀을 들은 별입시는 마침내 외부에서의 충돌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 싸움이 끊이질 않았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드셔야만 궁중에 불러들이시고, 그것에 기초하여 정치를 행하시기 때문에, 각종의 병폐를 낳게 되고, 점점 그것이 심해지기 때문에, 우리 공사도 이것을 국왕에게 간하고, 원세개도 또 별입시 제도가 불가한 까닭을 말씀드렸다. 즉 국왕의 측근인 자가 여러 가지를 말씀드린다는 것이 이미 나라를 어지럽히는 바탕이고, 이 별입시인 자가 조선을 그르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귀족을 양반이라고 하는데, 이 양반 가운데는 사대부라는 계급이 있었다. 이것은 어떤 나이에 이르면 관찰사라든가 군수라든가 하는 중요한 관직에 오르게 된다. 사대부의 가문 이외의 자도 양반이라고는 일컫지만, 좋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자는 아니더라도 기인(其人)이라고 부르는 계급이 아니면 영달은 불가능했다.

 

앞에 언급한 중인은 지방청에서의 회계를 담당, 조세의 징수를 맡았던 자이고, 현재에 상당한 사람들은 이 중인 출신인 자가 다수이다. 그런데도 당시는 기인」 「중인은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자가 많았지만, 그들이 관직을 얻는 일은 극히 곤란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당시의 정치를 구가(謳歌)하지 않을 뿐더러, 이것에 대하여 반항적 기분을 품고 있었다. 여기에도 또 조선의 혼란이 잦은 원인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송병준 씨와 같은 이는 뛰어난 중인 출신이었다.

 

한편, 귀족은 좋은 관직에 나가기 위한 등용문인 과거에 응시해야 하는데, 무인은 활, , (弓矢劍槍)에 의해, 문인은 문장에 의해 이를 시험했다. 급제하면 진사(進士)가 되어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리고 과거를 실시하기 위한 위원을 국왕이 선임하여 그들이 문제를 결정했다. 이 시험에도 여러 가지 폐혜가 따라 미리 문제를 숙지하고 있는 사대부는 용이하게 진사가 될 수 있었다.

 

또는 무관의 가문이 좋은 자의 자제가 활을 쏘는 경우는 과녁이 자연히 따라다니며 맞는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제도가 있어도 그것에 급제하는 일은 보통으로는 곤란했다. 또 실제로 과거의 문장 등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것도 특수 계급 이외의 일반 사람은 이 과거에 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불평불만을 품고 정치를 저주하고 당시의 정부를 저주하는 결과에 빠지는 것이었다.

 

내가 박문국(博文局)에 있을 때, 주사(主事), 사사(司事)로서 수십 명의 조선 사람을 썼는데, 이 중에는 중인 계급 출신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 중인 계급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모든 점에서 뛰어났다. 그러므로 조선의 정치도 그것을 선도하고, 개혁하여 그 고루한 병폐를 없애고, 그것에 참신한 기를 살려 가면, 또는 그 혁신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을 지도 모를 텐, 결국 당파 싸움으로 일관하여 그 전도를 그르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조선에서 민중의 생활 상태를 시찰하고, 행정, 세제의 실제를 살피고, 또한 토지가 많고 적은가 또는 교통이 편리한가 아닌가를 보기 위해, 명치 19(1986)1115일에 경성을 출발하여 경기, 충청, 전라, 경상의 각도 조선말을 타고 시찰 여행을 다녀왔다.

험한 길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 지방 관청(地方官衙)의 상황을 조사하고, 게다가 끊임없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조사 서류는 그것을 두 갈래로 나누고, 하나를 행정세제조사서(行政稅制調査書)라 하고, 하나를 지방산업개발조서(地方産業開發調査書)라고 하여 그것을 국왕 전하께 올리고, 다시 이 행정세제조사서에는 애초의 내 견해를 추가하여 그것을 조선개혁의견서(朝鮮改革意見書)”라고 제목을 붙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가 조선정부고문으로서 부임할 때에 그에게 보냈던 것인데, 이 내 의견은 대개 이 이노우에씨가 인용하였다.

 

그리고 또 지방산업개발조사 가운데의 수리관개(水利灌漑)에 관한 것만을 정리하여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 공이 한국 총감으로서 한국에 부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보냈던 것이다. 경성을 출발한 이래 바야흐로 해도 저물어 가는 12월 말일까지 약 40일간의 추운 겨울 여행은, 여전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추억거리이다.

 

그로부터 50년이 되는 지금, 그 때를 돌이켜보면, 정말 꿈만 같다. 그 무렵의 조선에 대한 감상으로서는 그저 변변치 못했을 따름이다. 길도 다리도 거의 없고, 물론 교통 기관도 없고, 전보 한 번 치고 싶어도 나가사끼(長崎)까지 오지 않으면 안 되다. 경성, 인천에도 그러한 설비는 없었다. 동경과 경성 간의 여행에도 반달을 필요로 하는 상태이고, 우선 요꼬하마(橫濱)로 와서 고오베(神戶)까지 배로 가서, 여기서 또 갈아타고 에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지나 나가사끼에 가서, 거기서 또 배를 갈아타고 이즈가하라()에 기항(寄港)하고, 그리고 나서 부산을 거쳐 인천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인천에서 경성으로는 물론 기차는 없고, 가마를 타고 하루 걸려 가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고오베, 나가사끼, 나가사끼 조선 사이에의 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체재에 여러 날을 필요로 하는 셈이었다. 당시는 그러한 불편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가 조선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까딱하면 사대주의로부터 중국에게만 억눌리기 쉬워서 상당한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후, 청일, 러일의 두 전쟁에 이겨 통감부가 설치되고, 명치 43(1910)년에는 드디어 한일합방이 되어 조선 사람들도 한결같이 우리 천황의 은혜를 받아 문명의 혜택을 입게 되었던 것은 조선 민중에게 있어서 한없는 행복이다. 그때부터 역대 총감이 열심히 이룬 시설에 의해 더 한층 조선을 문명으로 이끌고, 그 복지를 증진시킨 일,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나는 옛날의 눈으로써 조선의 진보 상황을 보고, 상당히 경탄했다. 바라건대 그들 동포를 위해 융합 협력하고, 그 바탕 위에 더욱 더 행복의 증진을 도모하게 되기를 바란다.

 

* 출전: 이노우에/김슬옹 옮김. 한글새소식 308(19984)

출처 :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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