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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반포 569돌을 맞은 올해 한글날을 기념하며 정부 주도의 한글 알리기 행사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수많은 정부 시책과 사업에서 뜻을 알기 어려운 외래어 사용이 난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눈총을 받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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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반포 569돌을 맞은 올해 한글날을 기념하며 정부 주도의 한글 알리기 행사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수많은 정부 시책과 사업에서 뜻을 알기 어려운 외래어 사용이 난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눈총을 받고 있다.
매년 한글날이 돌아올 즈음이면 행정기관의 외래어 사용 지적과 함께 우리말 사용에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새다.
무분별한 외래어 더 불편해진 '도로명 주소'
정부가 4000억여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한 '도로명 주소'가 지난해 1월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일부 도로는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채 뜻 모를 외래어로 작명돼 논란이 일고 있다.
도로명 주소란 부여된 도로명, 기초 번호, 건물 번호, 상세 주소로 건물 주소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도로에는 도로명을 부여하고 건물에는 도로에 따라 규칙적으로 건물 번호를 부여해 표기하는 주소 제도다.
일제 잔재로 알려진 지번 체계를 청산할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살리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세계화 정책'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은 지난달 10일 행정자치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서구식 도로명, 동·리명 상실, 무분별한 외래어 도로명주소 사용으로 우리문화의 고유성이 상실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은 'APEC로', 울산시 북구 효문동은 '모듈화산업로',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갈곶리는 '엘지로', 인천시 청라지구는 '루비로·사파이어로·에메랄드로'라는 외래어 명칭이 생겼다. 엘씨디로(경기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디지털로(경기 광명시 철산동), 모듈화산업로(울산광역시 북구 연암동) 등도 비슷한 사례다.
특히 이 같은 외래어 도로명주소의 경우 지역과의 연결성을 추측하려 해도 짐작조차 어렵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가 바뀐 '파인토피아로'는 'Pine(소나무)'과 'Utopia(천국)'를 합쳐 만든 합성어다. 영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단어로 선뜻 그 뜻을 이해 하기 어렵다.
또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는 조선시대에 농사짓는 농소(옛 세력가들의 농장)가 있었다고 해 오랜 기간 쓰여온 지명이지만, 정부는 도로명주소에서 '농소리'를 빼고 '골든루트로'란 이름을 붙였다. 지역 유래와 전혀 무관한 낯선 외래어로 바뀐 것이다.
결국 서울 종로구처럼 조선 초기부터 행정구역명으로 지정돼 500년 넘게 유지해온 지역 고유의 지명들이 사라지고 외래어로 도배된 정체불명의 도로명주소가 생겨났다.
'외래어 합성' 헷갈리는 행정용어
도로명주소 사용에서 보이는 정부의 무분별한 '외래어 사랑'은 각종 시책과 사업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행정자치부는 지난 2007년 전국에 있는 동사무소를 모두 '주민센터'로 명칭을 바꿨다. 동(洞)에 대한 사무를 보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던 동사무소는 '주민'과 장소를 의미하는 센터(Center)로 합성됐다.
파출소도 치안센터로, 소방서는 119안전센터로 표기하는 등 본래의 뜻을 알 수 없는 외래어 표기에 대한 지적은 매년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정부 기관들은 테스크포스(특별전담조직), 랜드마크(표지물), 벤치마킹(본따르기), 턴키(일괄), 스타트업(신생기업), 거버넌스(민관협력) 등 한글보다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20대 직장인 A씨는 '테스크포스' 명칭에 대해 "전혀 무엇을 하는 기구인지 모르겠다"며 "한 번 들었을 때 정부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글로도 충분히 전달 가능한 말들을 굳이 외래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외래어가 곧 세계화 흐름이라는 착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글사용성평가위원회가 지난 7일 일부 매체를 통해 발표한 '공공문서 사용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 부처·청·위원회 등 정부기관 44곳의 주요 문서를 수집한 결과 국방부와 해양수산부 등 전체 조사대상의 절반에 가까운 21개 기관의 문서에서 1000어절(띄어쓰기 단위)당 10어절 이상의 외국어표기 위반 사례가 발견됐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관 사건 케이스 Study 운영"(국가인권위원회), "외과 정형외과 등 협진으로 one-stop 재활치료"(국가보훈처) 등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 용어를 두고 영어, 외래어를 사용해 의미 파악을 어렵게 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어기본법에 따르면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춰 한글로 작성하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문자를 쓸 수 있다. 사실상 공공문서에서 외래어 등이 비일비재하게 사용돼 국어기본법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황인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한글의 우수성이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부터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한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인 한글을 알리는 활동도 물론 중요하지만 먼저 '국어사랑은 나라사랑' 의미를 잊어선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한글날을 맞아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한글문화큰잔치'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정신과 한글의 우수성 및 과학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으로 서울 광화문 중앙 및 북측광장, 세종로 공원, 국립한글박물관 등을 중심으로 열린다.
각 지방자치단체, 학계, 유통업계 등도 이날 한글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
방위사업청은 청 직원들에게 올바른 공공언어 사용을 위한 교육과 국어 사랑 마음을 북돋기 위한 '국어문화학교'를 개최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불만닷컴=임지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