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 교재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1929~1935년) 한글교재 3種, 문화재로
언론사 자료 최초 등록
조선일보가 일제강점기인 1929년부터 '문자보급운동'을 펼치며 발행한 '한글원번' 등 한글 교재 3종이 문화재로 등록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24일 조선일보 사료관에 소장 중인 조선일보 문자 보급 교재 3종에 대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끝에 보존·활용해야 할 가치가 크다고 판단해 '등록문화재'로 예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언론사 소장 사료가 문화재로 등록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28일 이 같은 사실을 관보에 예고한 뒤 12월 말쯤 문화재 등록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되는 본사 사료는 1929년 발행된 최초의 한글 교재인 '한글원번', 1930년판 소책자인 '문자보급반 한글원본', 1936년판 '문자보급교재' 등이다.
조선일보사는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문자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수십만 명을 문맹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이 한글 교재들을 수만~수십만 부씩 인쇄해 전국에 무료로 배포했다.
[조선일보] 김명환 기자 wine813@chosun.com
[오늘의 세상]본지 문자보급운동, 문맹퇴치 넘어서 '문화독립운동'으로 인정
한글원번 등 한글 교재 3種, 문화재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본지가 계몽 구호 내걸어
갱지 한장으로 만든 '한글원번', '문자보급반…'엔 흥부 이야기 '문자보급교재'엔 셈법도 수록
"일제하의 문자 보급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에 기여한 독립운동입니다. 이러한 문화 독립운동을 전개한 조선일보사의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조선일보의 한글 교재 3종이 언론사 소장 자료 중 최초로 문화재로 등록되는 데 대해 홍윤표 문화재위원(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은 그 뜻을 이같이 밝혔다.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의 '문자 보급운동'에 대해 국가기관이 '독립운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 운동에 사용됐던 문자 보급 교재는 일제에 맞서 민족혼을 지켜내려던 조선일보의 뜨거운 노력을 증언하는 역사적 자료다. 이 중 '한글원번'은 1929년 문자 보급운동 개시 직후 발행한 최초의 한글 교재로 보인다. 가로 46.5㎝, 세로 31.8㎝ 크기의 갱지 한 장에 한글의 자음·모음과 음절 구성, 받침 등을 예시했다. 왼쪽 상단에는 조선일보 문자 보급운동 구호인'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가 인쇄돼 있다. 문화재위원회는 이 교재에 대해 "매우 독창적이며, 이후에 등장한 모든 언문반절표의 대표성을 지닌다"고 평가했다.
▲ 문화재로 등록되는‘한글원번’‘문자보급반 한글원본’‘문자보급교재’등 조선일보사 발행 한글교재들. 바탕에 자리잡은‘한글원번’은 1929년 문자보급운동 개시직후 발행된 최초의 교재로, 왼쪽 상단에 적힌‘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구절은 이 유명한 계몽구호가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 때부터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최순호 기자 shchoi@chosun.com
'문자보급반 한글원본'은 1930년 11월 22일 조선일보 학예부장 장지영(張志暎)이 편집해 발행한 소책자다. 한글 자음·모음과 '가갸거겨'등 음절, 흥부 이야기까지 수록했다. '문자보급교재'는 1936년 12월 13일 발행된 것으로 소책자에 한글 예문은 물론 셈법까지 넣어 간이 초등 교재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이 교재들은 수만~수십만 부씩 인쇄돼 전국에 배포됐다. 1935년 일제에 의해 문자 보급운동이 중지된 이후에도 교재를 대량으로 찍어 전국에 나눠줬으나 일제는 이것마저도 금지해 한글 교재가 금서(禁書)가 됐다.
'등록문화재'란 멸실 위기에 처한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2001년 도입된 제도다. 국보·보물 등의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소유자의 자발적인 보호를 유도하는 신고 위주의 제도다. 처음에는 건축물·시설물에만 적용했으나 2005년 동산(動産)문화재로 확대됐다. 지금까지 480건의 문화재가 등록됐으며 그중 동산문화재는 102건이다. 한국 근대 스포츠의 영웅인 사이클 엄복동 선수의 자전거를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발급한 진단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등이 대표적인 동산문화재로 등록됐다.
관보에 문화재로 등록이 예고된 뒤에는 30일 동안 일반인과 관련 학자 등의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된다.
[조선일보] 김명환 기자 wine813@chosun.com ,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오늘의 세상] 심훈의 '상록수'처럼… 문보전사들(文普戰士), 이 책으로 일제탄압에 맞섰다
글 모르면 魂도 모른다 - 1929~1936년 한글교재 보급, 학생들 치열한 항일정신으로 "민족혼 살리자" 본지에 동참
일제 "조선일보 막아라" - 탄압 계속… 운동 중단시켜 "3·1운동 후 침체된 민족운동 조직적 문화 운동으로 승화"
조선일보사가 1929년부터 1935년까지 펼친 '문자 보급 운동'은 동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줌으로써 수십만 명의 동포를 '까막눈'에서 해방시킨 운동이다. 조선일보사는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수천 명의 남녀 학생들로 '문자보급반'을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내려보냈다. 잘 가르친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줬다. 그들의 손마다 조선일보판 한글교재가 들려 있었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그 유명한 계몽 구호가 조선일보의 문자 보급 운동 때 내건 구호다. 심훈(沈薰)의 대표작 '상록수'는 조선일보의 문자 보급 운동을 모델로 탄생한 소설이다. '상록수'에서 채영신과 박동혁의 사랑이 싹트는 곳이 '○○일보사'가 주최한 '문자 보급 운동 참가 학생 위로 다과회'다. 심훈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자 보급 운동 과정을 심장부에서 지켜보고 이 소설을 썼다.
문자 보급 운동은 1932년 일시 중단됐다가 1933년 계초 방응모(方應謨) 선생이 조선일보사를 인수해 재정비한 뒤 1934년 여름부터 재개됐다. 그해 6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운동의 재개를 알리는 사고(社告)가 나가자마자 학생들의 참가 신청이 물밀듯 밀려왔다. 1934년 6월 29일, 문자 보급 운동 발대식이 열린 경성 시내 소공동의 공회당엔 33개 전문학교·대학교를 포함한 125개 학교 학생 5078명이 운집했다. 방응모 사장은 "문맹(文盲)이 이렇게 많고서야 어찌 조선 사람이 문화적 향상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며 "여러분은 정성과 자신을 가지고 캄캄한 광야에 나가는 용사와 같이 민중 속에 들어가 힘 자라는 대로 다해주십시오"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 다룬 상록수 - 심훈 소설을 원작으로 임권택 감독이 1978년 연출한 영화‘상록수’에서 농촌운동가 최용신(한혜숙 분)이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장면. 조선일보의‘문자보급운동’을 모델로 만든 작품이다.
발대식을 마친 수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자 소공동 거리가 사람의 물결로 메워졌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그윽히 억제할 수 없는 기쁨과 제위에 대한 감사의 정(情)이 북받쳐 오름을 깨닫습니다"라고 감격해했다.
운동에 대한 농민들 호응도 폭발적이었다. 황해도 송화군 봉래면 석교리 어린이들은 1934년 여름 조선일보 문자보급반으로부터 배운 한글 실력을 동원해 "저의들은 사장님 덕택으로 생명을 엇게 되엇사오니 이 깁쁘신 은덕을 어찌 다 말슴드리겟습니까"라며 서툰 글씨로 감사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2000만 인구의 77%가 글을 못 읽던 시절 시작된 이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문맹 타파 운동'이었지만, 실은 일제의 민족 말살에 맞서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려던 최대의 항일 계몽 운동이었다. 학생들의 '자원봉사' 활동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이었기에 문자 보급 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은 '문보전사(文普戰士)'라고 불렸다. 운동의 성격을 눈치챈 일제는 온갖 규제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1935년 6월 11일 운동 자체를 강제 중단시켰다. 고난 속에 6년간 이어진 문자 보급 운동에 대해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3·1운동 이후 고조되었던 민족운동이 침체되던 시기에 문화운동의 형태로 전개된 조직적 민족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김명환 기자 wine813@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