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말을 지키고 살리는 일을 하다보니 가끔 내게 그와 관련된 정보와 제보를 하는 전화나 편지가 온다. 한자단체에서 어떤 일을 꾸미고 있다느니, 정부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하니 막아달라느니, 어떤 회사가 영어 창씨개명을 하려한다느니, 회사 이름이나 아기 이름을 새로 지으려하는데 어떻게 지으면 좋으냐느니 하는 부탁과 소식이다. 그럴 때 나는 나 개인에겐 아무 이득이 없고 귀찮은 일이지만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선다. 그런 세월이 수십 해 째이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어찌해야 할 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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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공사가 실시하고 있는 설문의 하나 (메트로는 프랑스 지하철. 미국은 서브웨이, 영국은 언더그라운드라 부른다. 우리에겐 우리나름의 예쁜 이름이 필요하다 )
방금도 그런 전화를 받고 답답한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전화통이 따르릉 울리기에 받으니 “선생님, 저 지하철공사 아무개입니다.”하며 다급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낯익은 목소리다. 몇 달 전에 전화와 전자편지로만 만난 분이다. 나도 반갑게 “안녕하셨어요?”라고 힘차게 대답한다. 그 분의 목소리가 힘차기 때문에 나도 저절로 그런 목소리로 인사를 하게 된다.
그 분은 “선생님, 이거 큰일 났습니다. 다시 회사이름을 영문으로 바꾼다고 직원들에게 설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번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선생님도 신경 쓰고 여러분이 애써서 그만 두는 줄 알았더니 기어이 하려는가 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선생님이 막아주세요?” 라며 내게 매달린다. 몇 달 전에 그 분이 그런 제보를 해서 한글단체에서 그건 잘못이라는 글을 지하철공사로 보내고 나도 누리그물 신문에 글을 쓰고 그 회사 게시판에 여러 사람이 의견을 올린 일이 있다. 그 뒤 잠잠하기에 잘못을 깨닫고 그만두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분은 흥분해서 “지금 회사 살림이 어려워 직원을 30% 감원한다면서 왜 수십 억 원을 들여서 회사이름을 낯선 영문으로 바꾸려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서울시장과 대통령에게 말해주세요.”라고 또 내가 무슨 힘 있는 사람인 거처럼 부탁한다. 나는 “노조나 회사 직원들이 먼저 일어나 서울시장이나 더 높은 정부기관, 또는 언론기관에 호소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들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서울시장이 그런 걸 좋아해서 우리 사장이 그러는 거 같고 노조와 다른 직원들은 감원에만 신경 쓰고 모른 체 합니다. 오히려 좋은 거 아니냐는 이도 있습니다.”라며 한숨을 쉰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영어로 창씨개명을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로 생각하고 있다. 영어가 무슨 요술방망이요 만병통치약으로 아는 거 같다. 정부도 마찬가지이고, 많은 국민이 일제 창씨개명은 탓하면서 미제 창씨개명을 스스로 하면서 잘못이 아니고 잘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 ‘밥집’이란 토박이말보다 ‘식당’이나 ‘음식점’이란 한자말이 더 품위 있는 말이고 ‘가든’이란 영문 이름이 더 고급 집으로 여기는 풍토, ‘결혼식장’이나 ‘예식장’이라면 말은 촌스럽고 ‘웨딩홀’이라고 이름을 바꿔야 영업이 되는 국민의식이 넘치는 나라이니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를 지낸 이들이 제 이름보다 영문 별명인 YS, DJ, JP 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니 이들을 따르던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도 그게 무슨 대통령이 되는 부적인 줄 아는지 따라 영문 별명을 지어 부르고 있다. 모두 얼빠진 짓이다. 한 겨레말은 그 겨레의 얼을 담는 그릇이고 겨레말이 오르면 그 겨레도 오른다. 그런데 나라를 이끈다는 이들이 겨레말을 업신여기니 그 겨레말과 겨레 얼이 병들고 약해지고 있다.
영문 창씨개명을 한다고 돈이 잘 벌리는 것도 아니고 미국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제 말과 얼만 더렵혀지고 장사가 더 안 된다. 일찍이 ‘현대전자’는 세계화한다면서 ‘하이닉스’란 영문으로 개명했지만 ‘삼성전자’란 본래 이름을 가진 회사보다 더 못되었다. ‘선경’이 ‘SK’로 회사이름을 바꿨지만 외국인에게 경영권을 빼앗길 위기에 여러 번 처했다. 또 더 많은 회사들이 거의 외국인 손에 넘어간 상태다. 그리고 우리 국민과 서민은 살기 힘들고 불안한 앞날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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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얼마 전에 그 산하기관인 도시개발공사를 SH 로 바꿨다. 그게 무슨 회사이름인가? 아무 뜻도 없는 영문 알파벳이다. 그래서 회사가 얼마나 잘 되었는가? 오히려 회사이름을 알린다고 엄청난 돈을 들였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서울시는 또 얼마 전 버스노선과 번호를 바꾸면서 한글로 된 노선표시와 번호는 콩알만하게 쓰고 아무 쓸모없는 영문자 G Y B R 자는 대문짝만하게 써서 시민들을 불편케 하고 예산을 낭비한 일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 으뜸 훼방꾼’으로 뽑기도 하고 그건 잘못이란 헌법소원까지 냈다. 며칠 전 어느 교수가 쓴 책에 ‘하이 서울’이란 영문이 가장 웃기는 콩글리시란 비판이 있었다는 신문기사도 있었다. 그런데 계속 서울시는 자꾸 얼빼는 짓을 하고 있으니 답답하고 서글프다.
서울지하철공사(사장 강경호 http://www.subwayworld.co.kr/)에서 일하는 한 아무개님은 내게 헛돈 쓰는 영문 창씨개명을 막아달라고 매달리지만 나는 “누구 힘있는 분이 미제 창씨개명 바람을 재워주시면 큰절을 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싶다. 한 서울시민으로서 저들에게 월급을 주라고 세금을 낸다는 게 한스럽다.
한국 국민정신이 담긴 한국말이 점점 시들고 사그라지니 한국이 점점 시들고 사그라지고 있다. 많은 한국인 꿈이 미국말 섬기기와 미국말 잘하기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정치가 정상이 아니라며 정치판을 다시 짜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말글살이는 정치판보다 더 정상이 아닌데 대통령과 서울시장과 서울지하철사장은 그걸 모르고 있고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세종대왕은 이런 비정상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고 바로잡았기에 오늘날도 많은 국민이 우러러보고 있다. 아! 비정상으로 가든 찬 이 나라의 앞날이 어찌될 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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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대로 선생은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1967년 동국대 국어운동학생회 창립 초대 회장
1990년 한말글사랑겨레모임 공동대표
1994년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 조직위윈장
1997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2000년 한글세계화추진본부 상임이사(현)
2004년 한글날국경일 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사무총장
2005년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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