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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누가 만들었나

한글빛 2005. 8. 25. 22:07
작성일 2005-08-23 12:12:13     

훈민정음(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세종대왕 혼자 만들어 - ‘집현전 학자 도움’은 잘못 된 사실

이대로 논설위원

 

 

훈민정음(한글)은 누가 만들었나? 두 말할 거 없이 세종대왕이 손수 처음 만든 것이다. 그 만드는 과정에서 아들딸인 문종이나 세조, 안평대군, 정의공주 같은 왕자와 공주가 도왔고, 글자를 다 만든 뒤에 널리 펴고 쓰게 하는 일을 몇 학자들이 도와드렸지만 세종대왕이 머리를 쓰고 하라고 챙겨서 한 일이다. 그 때 옛 책이나 글 어디에도 세종대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증거나 이야기는 없고 왕자와 공주가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글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힘썼다는 신숙주나 성삼문 들이 쓴 글에도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글을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게 아니고 옛날부터 있던 가림토 글자를 본 딴 글자라는 이도 있고, 일본의 신대문자란 글자를 본 딴 글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또 교과서에도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두 잘못된 말이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글과 세종대왕을 우습게 본 사람이거나 아니면 제대로 알 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이들의 주장엔 세종대왕이라는 전제군주가 만든 걸 마땅치 않게 여기거나, 한글 쓰기를 싫어하고 가로막으려는 이들이거나, 종교와 일본과 관련이 있는 이들로 보인다. 하나씩 따져보자

1. 학교 교과서에서 “훈민정음은 세종 시대 성삼문과 신숙주 같은 집현전 학자들과 만들었다.”고 써있고 가르치고 있다. 책방에 있는 ‘세종대왕’이라는 위인전에도 그렇게 써 있다. 큰 잘못이다.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써야 한다. 젊은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이 다 만들어진 뒤에 널리 알리고 펴서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세종대왕을 도왔을 뿐이다. 나이 든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과 쓰는 걸 막았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학자들이 반대 상소문을 낸 것만 봐도 분명하다.

최만리와 여러 집현전 학자들이 낸 상소문에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 하겠나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는 말할 거 없고 다른 신하들과도 미리 의논하지 않고 혼자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최만리와 집현전 학자들도 훈민정음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몰랐다는 말이 된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여러 해 동안 애써 다 만든 것을 실제로 쓰기 위해 신숙주 들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딴 나라의 말을 적을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증명하게 했을 뿐이다. 지금도 나이 든 사람들이 일제 한자혼용에 길들어서 새 글자인 한글만 쓰는 걸 싫어하듯이 그 때도 중국 한문에 찌든 원로학자들이 말썽이었다.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연구와 활용에 애쓴 학자들 가운데 신숙주가 가장 일을 많이 했다. 그가 한일 가운데 중국 요동 땅으로 중국의 황찬이란 학자를 여러 번 만나러 간 일이 있다. 그런데 신숙주가 처음 요동에 간 해가 한글이 완성 된 4년 뒤인 1447년 1월이라고 한다. 또 신숙주가 과거에 급제한 게 1441년이고 그 이듬해에 일본에 갔다고 하며, 20대 젊은 사람이었다고 하니, 1443년에 완성된 한글 만드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 성삼문도 신숙주와 비슷한 나이로 마찬가지다.

또 하나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본에  “전하 창제(殿下創制) - 전하가 지으셨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있으나 그 때 어느 책에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창제와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집현전 학자들이 냈을 때 세종이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또 너희가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인 줄 아느냐?”고 크게 꾸짖은 기록은 있다. 집현전 학자들보다 세종대왕이 더 말글에 관한 학식이 높았다는 말이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였을 줄 짐작된다. 그러니 꼼짝 못한 것이다.

그러나 왕자와 공주가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의 딸인 정의공주가 출가한 죽산 안씨 족보에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어보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 풀어서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하였는데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정의공주 묘소가 서울 수유리에 있다. 나는 2002년 한국어정보학회 임원들과 함께 그 무덤을 찾아가 “한글을 지키고 빛내겠다.”는 다짐을 한 일이 있다.

또 한글을 다 만든 뒤 그 활용을 위해 운회를 번역하는 일의 책임자로 세자와 왕자들을 임명했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여러 곳에 세종과 문종이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고 세종과 왕자들이 식사를 하면서 한글 만드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성삼문이 쓴 ‘직해동자습’이라는 책의 서문에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다.”라고 적고 있다고 한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왕자와 공주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만든 훈민정음을 널리 펴고 쓸 수 있도록 세종을 도왔다.”로 바로 잡아야 한다.

2. 일본의 신대문자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말을 살펴보자. 이 주장을 하는 이들은 “일본 곳곳에 있는 신사(일본 신을 모신 곳)에 이 글씨로 쓴 부적이나 글이 있으며 일본인들이 신의 글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일본 남쪽 시코쿠의 한 작은 마음 입구에 ‘가무나가라’라는 비석이 있는 데 마치 한글 자모를 풀어 쓴 것과 같다고 한다. 이 글씨를 일본인들은 신대문자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글자를 처음 소개한 책이 1800년대에 출판된 ‘신자일문전’이라는 책이란다. 그렇다면 한글은 1400년대에 태어났으니 그 400년 뒤에 쓴 것이다.  임진왜란 때인 1500년대에 한글을 많이 썼는데 그 때 우리 훈민정음이 매우 훌륭한 글자란 걸 안 어느 일본인이 신기한 한글을 보고 가서 부적으로 썼고 400년 뒤에 자기 글자인 거처럼 조작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또 이 신대문자가 비석뿐 아니라 청동 거울, 청동 검, 부적 등에 많이 써 있는데 한글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던 것이라는 게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도 옛 부적에 한글 자모와 비슷한 글자 모양이 있다며 고조선 때 쓰던 글자라고 한다지만 그 만든 연대가 한글이 만든 뒤라고 한다. 어쩌면 그 부적을 일본에 흘러갔을 수도 있다. 신대문자를 소개한 책보다 훨씬 앞에 만든 훈민정음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글자인지 자세하게 쓴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 등 분명하고 자세한 기록이 있는 데 어찌 뒤늦게 다른 나라 사람이 꾸며낸 책과 부적을 더 믿는지 모르겠다.

3. ‘가림토’ 글자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 옛 조상들이 가림토 글자를 만들어 썼으며 그 증거가 만주에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가림토 글자가 있었다는 말은 한단고기라는 책에 써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단고기라는 책 또한 근래에 쓴 책이고 만주에 있는 비석에 있는 글씨도 만주족인 쿠르트족의 글씨란다.

만주에 있는 가림토 글자라는 비석의 글을 1930년대 일제 때 탁본 한 것을 이상백 교수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탁본에 우리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더러 보여서 한글의 어머니 글이라고 이 교수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탁본을 동아시아 옛 글자를 연구하는 송기중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 글자에 대해 확인해 보니 가림토가 아니었다고 2년 전 한국방송이 방영한 일이 있다. 이미 해석까지 어느 정도 완료된 투르크 글자였단다. 그런데 이 투르크 글자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소리글자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 투르크 글자는 투르크족들이 쓰던 글을 12세기말에 몽고족들이 받아들여 썼고, 그걸 16세기 말에 만주족이 써서 만주글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에 가림토 글자 이야기가 나온 한단고기란 책에 대해 알아보자. 누리통신에 “ 한단고기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 초기에 편집하였다.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이다.”고 써있다.

그런데 계연수라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도 불명확하고 이 책을 일제 시대에 한문으로 편집했는데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이가 일본인이며,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특정 집단과 종교에서 신봉하고 퍼트리고 있다. 이 책 내용에 중국 땅도 우리 조상이 지배했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꼭 들어 최근에 일본과 중국이 우리 역사를 짓밟는 짓이 일어나면서 젊은이들의 민족 자긍심을 자극해 관심과 인기가 매우 높다고 한다. 꽤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이 말이 진리인 거처럼 떠드는 걸 보면서 답답해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때나, 쓴 사람이나, 내용이 한글을 세종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분명한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에 비해 훨씬 뒤에 나온 것이며, 꾸며서 편집한 것이고, 일제시대에 나온 것이라는 데 그 믿음이 떨어진다. 나 개인은 일본 냄새가 심하게 나서 더 불신한다.

아주 옛날에 중국에 뜻글자인 한문이 있고, 그 주변 민족인 만주족이나 몽골족이 자기네 소리글자를 만들어 쓴 건 사실이나 한글은  아니었다. 더욱이 특정 무리가 일본의 신대문자나 만주의 가림토 비석, 한단고기의 가림토 글자를 짜집기해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게 아니라고 퍼트리는 것을 우리 젊은이들이 무조건 믿고 따르는 건 참으로 위험스런 일이다.

내가 2002년 몽골 초원에서 터키의 말갈족이 1800년 전에 몽골을 지배하고 세웠다는 비석의 글씨를 보니 영문도 한문도 아닌 데,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로마자나 한글과 비슷한 글자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때 만주에 있는 비석에 한글의 원조인 가림토 글자가 있다고 말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내가 “한글의 원래 글자가 몽골에 있는 옛 비석에 있다.”고 말하면 그 말이 세상에 퍼질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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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초원에 있는 비석

세계가 인정하는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에 뚜렷하고 확실한 기록이 있는 ‘훈민정음 세종대왕 창제 사실’을 미신과 같은 부적이나 비석, 소설 같은 꾸민 책을 근거로 부인하면 안 된다. 세종대왕은 능히 새말을 만들만한 학식과 머리를 갖춘 분이고 뜻과 마음이 있는 분이었다. 스스로 만들고 쓰게 한 역사 기록이  있다. 세종 때 측우기, 해시계, 화약, 법전, 아악책 들, 새로 만들고 발명한 게 많은 데, 이 모두 세종이 지시하고 감독해 만들었지만 세종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만들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 한글만은 분명히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한 분명하고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삼강행실도다. 이 책이 만들어진 동기는 세종 10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진주사람 ‘김 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 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글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백성들이 글을 모르는 걸 안타까워한다. “한문은 백성들이 배우고 읽기 힘드니 쉽게 읽을 수 있는 읽고 쓰기 쉬운 글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한 일이 있다.  쉬운 글자 창제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최초의 언급이다.

그리고 10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드니 잘 쓰기 바란다.”는 말이 나온다. 삼강행실도에 백성이 알 수 있는 글자를 붙이고 싶었던 세종대왕,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사업은 중단되고 훗날 성종 때 이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한글 삼강행실도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은 성종 대에 이르러서다. 삼강행실도를 만들려는 것도 신하들이 반대했으니 새 글자인 한글을 만드는 일은 신하들이 더 가로막았을 것이다.

세종이 불쌍한 백성들을 끔찍하게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는 일이 또 있다. 허술한 감옥에서 노인과 어린 죄수들이 추위에 고생이 많은 것을 보고 감옥소를 새로 짓게 한 것이다. 또 법을 몰라 죄를 짓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법전을 만들고 다듬은 일이다. 권위와 강압으로 정치를 한 게 아니라 법과 사랑으로 백성을 가르치며 다스린 것이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신하들 몰래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자식들을 데리고 10여 년 동안 애써서 만든 글자로 보인다.

궁궐 안에 불당을 짓는 일, 한글 삼강행실도는 신하들에 눌려 뜻대로 하지 못했지만, 훈민정음만은 백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뜻이 너무 강해서 신하들이 안 된다고 해도 굽히지 않고 널리 알리고 쓰게 할 수 있었다. 옳은 일엔 뜻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는 지도자의 용기와 자세는 국민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오늘날 정치인이 본받을 일이다.

왜 글자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했을까?

새로 만든 글자 이름을 왜 ‘조선글’이나 ‘우리글’이라고 하지 않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짐작이 간다.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짐작할 수밖에 없다.

먼저 ‘훈민’이라고 한 것을 짐작해보자. 앞에 쓴 한글을 만든 까닭을 살피면서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고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글자를 몰라 법을 읽지 못해 죄를 짓는 것까지 안타까워하면서 백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새 글자를 만들고 그 이름을 ‘조선글자’라 하지 않고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을 담은 ‘훈민정음’이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왜 ‘글자’ 나 ‘문자’라 하지 않고 ‘정음(正音)’이라고 했을까? 난 여기에 중국과 중국의 한자(漢字), 한자를 섬기는 신하와 학자를 의식해서 정음이라고 했을 거로 본다. 중국 글자에 상대하는 새로운 글자라고 하지 않고 “말소리와 새 소리까지 적을 수 있고, 중국말과 한자까지 적는 소리글자”라는 뜻이 담겼다고 본다.  세종대왕의 지혜와 슬기가 담긴 이름이다.

또 세종대왕은 소리에 보통이 넘는 지식과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옛 악보에 소리의 높낮이를 적은 서양 악보와 소리의 길이를 적은 세종대왕 악보가 있다고 한다. 또 세종대왕이 훌륭한 정치를 한 것은 귀가 밝고 백성의 소리를 잘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리를 잘 듣고, 잘 알고, 중요시한 세종대왕의 남다른 지식과 생각이 관련된 것으로도 짐작된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효도가 무엇인지, 어떤 짓을 하면 죄가 되고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알고 법을 어기지 말고 바르게 살라고 지금 만화책 같은 책인 ‘삼강행실도’를 펴냈다. 그런 일이 있은 10년 뒤에 백성을 위한 새 글자를 만들었고 그 글자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했다, 아마 백성을 생각해 삼강행실도를 만들 생각을 할 때부터 쉬운 우리 글자를 만들 생각을 하고 그 책을 펴내면서 10여 년 동안 우리 글자를 만들고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로 보인다.

‘정음(正音)’이란 “우리말을 바르고 옳게 적는 글”이라고 훈민정음언해에 풀어 쓰고 있다. 그러니 백성들이 우리말을 바르고 옳게 쓸 수 있게 하려고 새 글자를 만들었다는 말이고 백성들이 이 글자를 가지고 우리말을 바르고 옳게 적어 공부하라는 뜻이 담긴 멋진 글자 이름이다. 모든 국민이 나라말을 우리 글자로 바르고 옳게 적을 때 지식과 정보를 쉽고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으니 잘 부려 쓰라는 큰 뜻이 담긴 이름이다. 세종대왕은 후손들이 이 글자를  배워 많이 쓰길 바라셨는데 오늘날 최만리를 닮은 일제 지식인들이 그걸 훼방놓고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혼자 숨어서 만들었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어떤 글자요 세종이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왜,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록이 없다. 그래서 한글은 고조선 때 있던 가림토나 일본의 신대문자를 본 떠 만든 것이지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게 아니라는 등 꾸밈말이 성행하는 이유다.

만들 때까지 집현전 학자나 신하들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세종이 왕자와 공주와 그 글자에 대해 의논한 기록은 있으나 학자나 신하와 의논했다는 말이 없다. 만들 때 어떤 기관이나 관청도 없었다. 다 만든 뒤 그것을 쓰게 하려고 정음청과 언문청을 만든 일은 있었다.  다 만든 뒤 그걸 알리고 잘 쓰게 하려고 일에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들이 참여한 기록만 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궁궐에서 그 아들딸하고만 의논하며 혼자 숨어서 만들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우리 글자를 만든다고 하면 중국과 중국 한문을 숭배하는 신하들이 못 만들게 막았을 것이니 혼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이 궁궐 안에 불교 법당을 지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해서 못 지은 일이 그 증거다. 그 때 세종대왕은 중국 유교를 숭배하던 신하들이 출근도 안 하며 법당을 못 짓게 하니 그에 굴복하고 황희 정승에게 눈물을 흘리며 서운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우리 글자를 만든다면 유학자들이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 만든 뒤에도 집현전 학자들이 발벗고 우리 글자를 만들고 쓰는 게 잘못이라며 막아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 일이 있다.   

그러니 이름도 ‘글자’라 하지 않고 ‘백성을 가르치는 소리’라고 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나라를 이끌고 지배한 대통령이나 재벌들은 이 한글을 헌신짝 보듯 하고 있다. 영종도에 외국인이 이 땅에 들어오는 공항을 지으면서 온 국민이 ‘세종 공항’이라고 하자고 하는 데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를 따르는 인천시장이 ‘인천공항’이라고 하자고 하니 국민에게 광고까지 내고 공모해 최종 선정된 ‘세종 공항’은 내버렸다. 그 한글을 만든 날을 공휴일에서 빼고 짓밟는 어리석은 대통령과 재벌이 있다. 한글만 쓰지 말고 일본처럼 혼용하자는 대통령과 총리가 있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장관이 있다.

세종대왕에 견주면 참으로 못나고 바보 같은 이들이다. 내가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고 돈이 많은 재벌이라면 세계인에서 가장 큰 세종대왕 기념관과 한글 박물관을 짓고 온 세계인에게 자랑하고 보게 하겠다. 우리를 자랑하고 국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게 하고, 세계인을 상대로 큰 돈벌이도 되고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대국과 그 숭배자들 눈을 피하려고 숨어서 우리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 같은 노력은 없더라도 만든 글자도 안 쓰는 오늘날 정치인과 학자가 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