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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자 편집위원실장 /
사자 갈퀴 같은 머리칼에 길고 성성한 눈썹의 백기완 선생은 두 번의 대선출마 경력이 있다. 그러나 그를 정치가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통일관련 저서들을 여러 권 냈고 통일문제연구소를 운영해온 그는 ‘대학신입생’이라는 말 대신 ‘새내기’를 만들어 대학가에 퍼뜨렸다. 그래서 다들 통일운동가, 우리말 운동가로 그를 기억한다.
백 선생이 제안하여 사랑 받는 말로는 ‘달동네’ ‘동아리’도 있다. ‘지구’를 애교 있게 ‘땅별’로 부르기도 하는 선생의 사자후 강연장은 우리말 사용의 장터가 되는 일이 흔하다. 우리말로 글쓰기, 말하기 운동을 해온 선생이 제안한 말이 모두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터널’ 대신 쓰자고 한 ‘맞뚫레', 몇 년째 새로운 세상으로 제시한 ‘노나메기 세상’ 등에는 통 호응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말로 학문합시다!”
이런 주장을 가진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은 2001년 만들어졌다. 철학, 문학, 역사학, 예술, 고고학 등을 전공하는 학자, 교사들이 모여 7년째 활동 중이다. 그간 ‘우리말 철학사전’ 잡지 ‘사이’ 등을 출간했다. 이 모임은 백기완 선생이나 백 선생의 앞 세대라 할 한글학회 회원들, 최현배 선생님과는 달리 우리말 운동에만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일상세계와 학문세계의 합치가 목표이다. 예를 들면 소통 가능한 우리말 학술어를 우리 일상어로 정착시키려 한다.
시민단체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은 해마다 우리말 지킴이, 우리말 훼방꾼을 선정하여 발표한다. 상 주고 벌 주는 일은 좀 교조적으로 보인다.
우리말 운동가나 우리말 운동단체 회원들은 말, 언어에 관심이 많고 필시 말,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민족주의, 애국, 국가와 우리말을 동일선상에 두고 우리말 운동을 하는 경우도 많아 보인다.
최근 어느 신문의 한 기고가는 직업을 ‘우리말 순화인’이라 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우리말 순화 일로 생업이 되는 나라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말 운동가, 우리말 순화인은 넓게 보면 언어운동가들이다. 왕실영어를 쓰자는 운동을 하는 영국인들, 미국식 영어만 쓰자는 미국인들, 영어에서도 간소화한 맞춤법을 쓰자는 운동을 하는 영미인들, 좀 엉뚱하지만 영어의 ‘be’ 동사를 없애자는 북미의 한 단체 회원들(단체 이름은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General Semantics로 겉보기에는 의미론을 연구하는 단체 같아 보인다.)도 언어운동가들이다. 이런 운동가들은 따지고 보면 말은 이렇게 쓰는 것이 좋다, 혹은 이렇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을 한다. 언어의 모범, 규범, 위생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최근 언어위생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판결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규범이니 순화라면 재미없어 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다. 언어규범을 싫어하지만 말을 사랑하는 그런 이들을 영미에서는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linguaphiles, logophiles, logologists(모두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 정도의 뜻). wordsmiths(단어 대장장이들의 뜻)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어휘의 즐거움’ 같은 식의 제목을 단 책들의 독자가 되고 방송국에서 여는 난해어와 희귀어 알아맞히기 퀴즈 출연자가 되며 ‘하루에 한 단어’의 어원, 뜻을 알려주는 인터넷사이트(예를 들면 http://wordsmith.org) 방문자가 된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말을 사랑하는 일반인들이 조사하고 작성하여 보내준 색인카드로 완성된 사전이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영미권에서 '올해의 단어' '올해의 신조어'를 뽑는 출판사, 언어전공자들의 모임이 있는 것도 저변에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말 사랑 하기가 언어규범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 사랑하기는 다방면으로 뻗어갈 필요가 있다.
inthepark@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