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엽(81살) 연세대 명예 교수, 조선어학회 사건 증언
“함흥형무소 마지막 수감자 네 분 출옥 장면 참혹했다.”
여러분은 1942년 10월에 일제가 우리말 사전을 만든다고 조선어학회 회원들 33명을 ‘치안유지법 내란죄’로 검거 투옥한 조선어학회사건을 아십니까? 그 때 악독한 고문과 감옥살이에 두 분이 감옥에서 돌아기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분들 덕에 오늘 우리가 우리 말글로 교육도 하고 누구나 마음대로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정부도 국민도 그 분들을 기리고 고마워하지 않으니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또한 중국침략을 앞에 놓고 조선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 강화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領)을 공포하고,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회원을 검거하기에 이르렀으며, 1940년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었고, 1941년 4월에는 문예지인 〈문장〉과 〈인문평론〉도 폐간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어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한편,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함으로써 언제든지 독립운동가를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어를 못 쓰게 해서 조선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최후로 남은 것이 바로 한글과 겨레말운동의 총본부인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 거의 모두가 혹독한 일제 탄압과 회유에 변절하거나 친일할 때에 한글학자들은 끝까지 겨레 얼과 겨레말을 지키고 갈고 닦았습니다.
그러던 1942년에 일제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관여한 이극로(李克魯), 이윤재(李允宰), 최현배,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김윤경(金允經), 김양수(金良洙), 김도연(金度演), 이우식(李祐植), 이중화, 김법린(金法麟), 이인(李仁), 한징(韓澄), 정열모(鄭烈模), 장지영, 장현식(張鉉植), 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정인섭(鄭寅燮), 이병기(李秉岐), 이은상(李殷相), 서민호(徐珉濠), 정태진, 신윤국(申允局), 김종철(金鍾哲), 이석린(李錫麟), 권승욱(權承昱), 서승효(徐承孝), 윤병호(尹炳浩), 안재홍(安在鴻),권덕규(權悳奎), 안호상(安浩相) 들 33인을 검거하고 고문했습니다.
그때 잡혀갔다고 풀려난 분들은 “우리를 잡아다가 손으로 뺨치기, 구둣발로 차기, 쇠꼬챙이로 때리기, 물 먹이기, 비행기태우기(달아매고 차기), 불로 지지기, 엎어놓고 매질하기, 얼굴에 먹칠하기, 사지를 버티고 개처럼 엎드리게 하기, 태질 하듯이 메어치기, 밤새도록 잠 못 자게하고 달초하기, 착고(발에 채우는)수갑 채우기, 찬 물이나 뜨거운 물을 끼얹기, 그밖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석 달을 두고 고문을 했다.” 라고 증언했습니다.
또 “잡아간 그 이듬해 1943년 1월 하순에야 조서를 쓰기 시작하여 3월 15일에 대체로 끝났는데 기소 24명, 기소유예 6명, 불기소1명, 기소중지 2명(병자)이었는데, 이렇게 되는 동안에 증인으로 불리어 취조를 받은 이도 4명이 되었다.”고 하며, 함흥형무소 수감되어 있던 이윤재 선생이 1943년 12월 8일에,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일제가 이분들에게 내린 유죄 판결문에 “민족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고 썼습니다. 우리 겨레말을 지키고 빛낸 일은 겨레 독립운동임을 일제가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이렇게 선열들이 목숨까지 빼앗기며 지키고 갈고 닦은 우리 말글을 우리는 소중하게 생각하고 선열들께 고마워하지도 않고, 한말글을 지키고 빛내는 일을 게을리 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1월 7일 한글학회에서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한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네 분이 출옥할 때 장면을 보신 연세대 이근엽 명예교수(81살)님을 모시고 그 증언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이 교수님이 건강하시고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어 고마운 마음으로 한글역사 자료로 남기고자 한 일입니다.
이 교수님은 “ 1945년 8월 17일 내가 15살 때인데 조선어학회 회원인 모기윤 선생이 교회 청년 30여 명을 함흥형무소 앞으로 모이게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었다. 모기윤 선생이 조선인 검사에게 광복이 되었는데 왜 독립운동가들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서 네 분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님인 것을 그 뒤 알게 되었다. 그 때 한 분(이극로 선생으로 보임)은 들것에 들려나오고 세 분은 부축해 나오는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틀이 지났지만 일제가 무서워 태극기를 들고 환영도 못했다. 1945년 광복 때 조선어큰사전 원고를 기차에 실어 서울역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전에 네 분이 상고했을 때에 한양 고등법원으로 원고를 증거자료로 보냈던 거로 보인다. 외솔 아들 최영해 선생이 기차 한 칸을 철도국에 예약하고 기차역에 가니 그 열차에도 사람이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차 있어서 독립운동가 네 분이 출옥해 한양으로 간다고 하니 네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최영해님도 간신히 비집게 탔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사전 원고를 감옥에서 찾아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고 본다. 이극로 선생의 호가 ‘고루’인데 이극로 선생 이름을 중국식 발음에서 따온 거로 보인다. 이극로 선생이 독일에 유학을 갔을 때 중국인 신분으로 갔었다. 克魯가 중국식으로 읽으면 고루다.” 라는 들들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와 성기지 한글학회 연구원이 만나고 아이티뉴스 김종범 실장이 영상 사진을 찍었습니다.
대담을 마치고 왼쪽 이근엽 교수님께 이대로가 쓴 우리말글 독립운동 책과 지난해 내가 편집한 오리 전택부선생님 문집을 드렸다. 오리 선생은 이근엽 교수와 같은 고향분으로서 형님으로 모셨다며 좋아하시며 그리워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