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 경축식을 잘 해야겠는데 예산이 없어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문화부장관은 열린음악회를 하자고 하는데 돈이 몇 억이 들어간다고 했다. 거기다가 방송국에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청래 의원을 찾아가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방송국에 전화해서 문제를 풀어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 뒤 나는 정 의원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얼숲에서 얼굴을 자주 보게 되어 반갑다. 더욱이 웃게 하면서 할 말을 다해서 더 고맙고 좋다.
“너 나와. 내 발 뒷굼치 보이지? 요거 가는대로 따라와.” 불량서클로 알려진 태권도부 가입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가장 험상궂게(?) 생긴 나를 지목한 것이다. 끝까지 가입을 거부한 이 날 옥상에 끌려가 호크 풀고 억울한 매를 수십 대 맞았다.
“너 나와. 내 발 뒷굼치 보이지? 요거 가는대로 따라와.” 다음날에는 밴드부에 끌려가 똑같은 절차와 과정을 거쳐 야구 방망이로 50대 맞았다. 전날 태권도부에서 나를 인수인계한 모양이었다. 태권도부에 안 들려면 밴드부에 들라는 것이었으나 끝내 매로 떼웠다.
그 다음날 문학반에서 신입회원을 모집하러 우리 1학년 4반 교실에 왔다. 검은 뿔테 안경에 못생긴 선배가 들어와서 손을 들라했다. 나는 지체 없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억울한 매를 맞지 않았다. 지금 건국대에서 법학과 교수를 하는 그 선배가 3일 먼저 왔으면 고등학교 입학 당시 그 억울함에 치를 떨지는 않았으리라.
문학반에 들어가서 또 매를 맞았다. 1주일에 한편씩 詩를 써내지 않으면 매를 맞았다. 3多(다독, 다작, 다상량) 죄에 걸려 무조건 1주일에 한편씩 습작 詩를 제출하지 않으면 매를 맞았다. 고1~2때 2년간 토요일 오후면 문학실에 쭈그려 앉아 합평회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되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던 것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된다.
대학에 가서는 사실 가수 홍서범으로 유명한 옥슨80에 가입하려고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그 날 MT를 갔는지 문이 잠겨 있었다. 그래서 학보사 기자 시험을 보았다. 학보사 수십기자 때도 역시 많이 맞았다. 기사를 못 쓴다는 선배들의 트집에 걸리면 봉걸레 자루로 두들겨 맞았다. 가쉽기사 한 꼭지 원고지 1.2매를 쓰는 게 제일 힘들었다.
이렇게 1년 견습 기간을 거쳐 2학년이 되면 정식 기자 신고식을 하는데 이 날은 더욱 고역이었다. 기자로서 깡을 길러야 한다며 한밤중에 건국대 일감호 호수를 한 바퀴 돌며 학보사 사가를 부르며 뛰어야 했다. “김밥에 닭꽝 원고 빠꾸 야간열차 왜 이리 뜨거우냐? 건대신문사 얏!~”
이 노래를 수없이 목청껏 부르고 중국집에 가서 선배님들께 정식 기자 신고식을 했다. “네 건대신문사 29기 정~청~래입니다. 열씨미 하겠습니다.” “복창소리 봐라.” “다시...” “네 건대신문사 29기.....넵 선배는 하늘이다.” 이걸 반복하면 다음 순서는 짬뽕 그릇에 소주 1병 반을 붓고 원샷~
“야~정청래 저 새끼는 왜 이리 술이 쎈거야. 벌주~한번 더~~” 으악 나는 짬봉 그릇에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썼다.
이랬던 정든 학보사를 사퇴하고 조통특위짱이 되어 학내 시위를 주도한 죄로 수배 받다가 잡혀서 안기부에 끌려가 을지로 호텔방에서 세시간 동안 눈 가리고 죽도록 맞았다. ‘아~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
우리 때지지 말고 말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