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래 전 의원이 학생운동 할 때 신문입니다. 세로 짜고 한자 범벅인 신문 모습도 그 시대처럼 어둡습니다.
<정청래 징역 2년에 처한다. 땅땅땅>
“1방 출소.”
“잘 가요. 잘 살아요....”
자정을 갓 넘긴 시각. 깜깜한 꿈속에서 몇 번 들었던 교도관의 목소리가 내 눈 속에 꽂혔다. 옆 방 사람들은 이 시각을 기다렸는지 잠에서 깼는지 나의 세상 밖 여행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미리미리 싸고 또 싸두었던 짐 꾸러미를 챙기고 정들었던 목포교도소 1사 상층을 휘이~둘러보고 걸음을 옮겼다.
어제 저녁부터 참으로 시간이 가지 않았다. 읽었던 책들은 미리 짐으로 부쳤고 이런 저런 잡동사니는 싸고 또 사 놓았다. 치약과 칫솔만이 1.04평 공간에 밖으로 노출된 물건이다. 출소를 앞 둔 사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양치질만 예닐곱번...밤 12시가 갓 넘자 내 방문이 열렸다.
“형! 그런데 개가 물면 어떻게 하지? 아무리 미국놈들 이라고 우리를 총으로야 쏘겠어? 그런데 말이야 개는 대책이 없잖아. 개에 물려 죽으면.... ”
1989년 10월 11일. 미 대사관저 점거 투쟁 마지막 점검 회의 때 후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난감했다. 택(공격계획)은 다 짰고 이제 실행만 하면 되는데 개 문제가 터졌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며 봉합을 했지만 막판 변수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1989년 10월 13일이 드디어 오늘이 왔다. 막상 결사를 다짐하고 기다려 온 오늘이지만 하나님께 13일은 달력에서 지워달라고 부탁의 기도를 하고 싶은 심정도 많았다. 렌트한 차가 건국대를 출발해 안개 낀 군자교를 넘어갈 때 누군가 노래를 하자고 했다.
싸늘한 감촉의 쇠파이프를 움켜쥐자 짜릿한 금속의 차가움이 등골을 더욱 오싹하게 만들었다. 납덩이처럼 굳은 분위기에 입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개미소리로 시작한 “애국의 길”은 점점 비좁은 자동차 안에서 여섯 청년의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미대사관저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어느 누구의 눈도 쳐다 볼 수 없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고 위안했지만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기징역일까? 아니 적어도 10년은 김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몰라. 그러면 내 나이 꽃다운 스물다섯. 10년 만기 다 채우고 서른다섯...그래도 나는 이 길을 가야만 하는가?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정청래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에 처한다. 땅땅땅” 법정을 나서는 나는 한편으론 홀가분하고 한편으론 2년간 옥살이의 중압감에 어깨가 짓눌렸다. 10년을 각오한 감옥살이였지만 서울구치소에서 목포교도소로 이감을 가는 ‘2년간’ 호송차량은 질척질척 나의 머리를 헝크러 놓았다.
2년 징역살면서 45일간 나는 밥을 먹지 않았다. 교도소 안에서는 딱히 투쟁의 수단이 없었다. 아홉끼를 굶어야 교도소는 의무적으로 법무부 교정국에 단식 이유를 보고하게 되어있었으므로 단식을 시작하면 무조건 3일간은 계속해야 했다.
90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섭씨 35~7도 살인적 더위가 계속된 복날, 20여끼를 굶고 방바박에 등뼈 가죽을 붙여 놓고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빗줄기 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는 전주곡이 끝나자 낭낭하지만 애절한 “칠갑산” 노래가 나를 울렸다. “콩밭 메는 아낙네야~베적삼이 흠뻑 젖는다아아~무슨 사연 그리 많아....’
“펄펄나는 저 쥐새끼. 암수서로 장답구나. 외로워라 이내몸은 뉘와 함께 징역살꼬.” 황조가에 빗대어 나는 창밖에서 저녁 시간 때면 놀러오는 쥐들과 대화했다. 교도소 담장 밑에 피어난 민들레와 맨드라미와 안부를 묻는 친구가 되었다. 거꾸로 매달아 놔도 국방부 시계는 갔고 법무부 시계도 돌고 돌았다.
병장 말년에 사간 깨기가 참 여렵다고 했던가? 징역도 마찬가지이다. 다행히 나는 1988년에 3개월 징역를 산 사건이 병합되어 1989년 10월 13일 구속되었지만 2년 후 3개월 빠른 1991년 7월 16일에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2년간~나는 사람들과 격리된 시간동안 참 많은 것을 몸으로 배웠다. 편지 한통이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교도관의 제지를 받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보행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애닲아 하는지 배우고 익혔다. 이것이 나의 힘이었고 내 삶의 가치였다.
스물다섯에 들어가 스물일곱을 먹고 나왔습니다. 세상 밖에서 스물여섯살은 나에게 없다. 그러나 빼먹은 스물여섯 살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나의 얼굴도 환경도 많이 변화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휴우!
20년 전 오늘 저 깜빵에서 나왔어요. 귀빠진 날이 생일이라면 감옥에서 나온 날은 자유의 날개를 다시 단 날이예요. 교도소 철문을 열고 나오는 그 순간! 그 짜릿함! 저 그날 그 순간을 기억해요. 기쁜 날 이예요. 축하 좀 해주세요.
저 오늘만큼은 정말 빡세게 축하받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