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통령을 지낸 이나 또 다른 이름난 사람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인가 당신이 몸이 아파서 딸 결혼식에 못 가게 되었다는 보도기사를 봤을 때 당신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괴로웠을까 안타까웠습니다. 나도 올해 두 딸을 시집보낸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며칠 전 당신이 위독하다는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부터 몸은 아파보였으나 잘 살아왔으며 아직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동갑인 나는 젊은이라고 생각하는 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오뚝이처럼 훌훌 털고 일어날 줄 알았고 그러기를 바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보도를 보고 또 놀랐고 슬펐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삶이 무엇인지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많은 이들이 당신의 죽음 앞에 슬퍼하고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당신의 영전 앞에 가서 인사할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잠을 설치다마 추운 새벽 일찍 일어나 당신이 준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2012년 마지막 뜨는 해를 보면서 해님에게 당신이 하늘나라로 갔으니 편히 살게 보듬어 달라고 빌었습니다.
2012년 12월 31일 새벽엔 해가 더 둥글고 하늘이 붉었습니다. 해님도 당신이 이 땅을 떠나는 것을 가슴아파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과 나는 자주 만나고 함께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좋아하고 고마워한다는 것을 당신이 이 땅을 떠나게 되면서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당신 죽음이 너무 안타깝고 빚진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2012년 가는 해에 당신을 묻고 당신을 내 마음 속에 담고 당신과 있었던 좋은 일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세종대왕과 특별한 만남이 없었다고 해도 세종대왕께 고마워하듯이 당신을 고마워하며 당신처럼 바르고 참되게 살고 당신이 이루려던 꿈을 이루려고 애쓰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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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6일 내가 중국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내가 쓴 책 ‘우리 말글 독립운동 발자취’ 출판기념회 때 김근태님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축하해주려고 왔을 때 본 것이 마지막 그를 본 일이 되었다. 기념회 이틀 전에 중국에서 귀국해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는데 와준 신의와 우정을 잊을 수 없다. |
김근태님,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 당신이 15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당신의 의원 이름패를 한글로 써달라고 사무처에 말했으나 안 들어주니 당신이 소속한 당의 원내 총무에게 말했습니다. 법조계 출신인 박 아무개 원내 총무는 오히려 “김근태 같은 거물이 쓸데없이 한글에 신경을 쓰느냐?”며 비웃더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 뒤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때마다 그 말을 했습니다. 눈꽃 열차를 타고 지지자들과 함께 갈 때도 그랬고, 또 다른 모임 때도 그랬습니다. 그 것은 그 일이 겨레와 나라를 위해서 절대로 포기할 일이 아니고 언젠가 해내겠다는 선언이고 다짐임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대 국회가 지나고 또 16대 국회 때도 여러분 의원이 이름패를 한글로 할 것을 국회에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글이 무엇이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 얼간이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때가 안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린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15,16대 국회 때엔 내가 한글날 국경일 제정에 온몸을 바칠 때여서 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16대 국회가 끝나갈 때 한글날, 당신이 통합신당 원내 대표를 맡았을 때 부대표 김성호의원과 통합신당 모든 국회의원들의 이름패를 한글로 바꿔달라고 국회에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하니 당신과 같은 당 소속 모든 국회의원들의 이름패를 한글로 만들어가지고 국회의장에게 가서 다시 요구했고 국회의장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통합신당뿐만 아니라 다른 당의 국회의원들도 한글 이름패를 원하면 모두 한글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겨레와 나라에 좋은 일이며, 오늘날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참된 지도자였습니다. 이름나고 권력이 있다고 목에 힘주고 잘난 체 하는 떨거지들과 다른 정치인이었습니다. 진짜로 국민을 사랑하고 위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박사나 판검사 출신 국회의원보다 더 똑똑해 보이고 성직자처럼 참되고 바른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당신 앞에 서면 저절로 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이 나라를 이끌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진 고문 때문인지 당신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어 하고 연설도 힘차게 하지 못하고 세차게 밀고 나가지 못해 지지자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
2011년 마지막 날 뜨는 해를 보면서 김근태님 명복을 빌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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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60대는 청춘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고 할 일이 많은 데 일찍 갔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일찍 가게 한 것은 민주주의 나라 만들려고 투쟁하다 모진 고문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박아무개 원내 총무나 이근안 경감 같은 엉터리 홀세포 애국자가 많아서였습니다. 그들도 당신처럼 천재였고 한글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깨달은 이였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김근태님, 당신은 아닌 것은 아니었고,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는 사람이었고,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을 볼 줄 지도자요 겨레가 갈 길이 어떤 길인지 아는 깨달은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픔을 겪었고 괴로웠으며 애쓰셨습니다.
언젠가 동북아재단을 만드는 데 지도위원이 되어달라고 전화를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한글운동에 도움을 많이 받고도 감사패 하나는 말할 것이 없고 고맙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 마음 속도 다 들여다보는 천재이니 다 알 것입니다.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따라 눈꽃열차를 타고 여행을 갔던 일, 당신과 한글을 빛낼 이야기를 하던 일, 당신이 한미자유무역협정 졸속처리 반대 단식 농성을 할 때 찾아갔던 일들, 좋은 일만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뜨는 해를 바라보면서 당신의 웃는 얼굴과 진지한 태도만 되새기며 당신이 못 이룬 꿈이 이루어지도록 힘쓰겠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는 아무 걱정을 하지 말고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