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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박사와 같이 한 한글기계화 운동 3

한글빛 2012. 5. 23. 10:51

[이대로의 얼말글 이야기] 공병우 박사와 같이한 한글사랑 운동(3)
잘못된 두벌식 글자판 표준을 세벌식으로 바꾸기 운동
[e-교육신문 www.newsedu.kr] 공병우님은 기계로 한글을 쓰고 누리통신을 하는 길을 닦은 분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

공병우 박사는 왜정시대부터 안과 의사로 이름난 분이다. 서울 종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안과 병원을 열고 돈도 많이 번 분이다. 광복 뒤에 서울에서 세금을 네 번째로 많이 냈다고 하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광복 뒤에는 돈을 잘 버는 안과 병원보다 한글타자기를 만들고 한글사랑 운동을 하는 일에 더 힘을 썼다. 그 일을 하게 된 것은 일제가 물러가니 당신이 일본어로 쓴 ‘소안과학’이란 책을 한글로 번역해서 경성의전에서 강의해야 하는데 일제시대 우리 말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한글을 잘 쓰지 못했다. 그래서 한글 공부를 하면서 한글도 영어처럼 타자기로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1910년대에 미국에 살던 이원익씨가 만든 5벌식 타자기와 1930년대에 송기주씨가 만든 4벌식 타자기가 있는데 가로서 써서 세로로 읽는 글쓰기이고 너무 느려서 영문 타자기에 비해서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스스로 영문처럼 빠르게 칠 수 있는 타자기를 스스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글과 영문 타자기를 모두 분해해서 그 잘못과 문제점을 찾아 두 벌식으로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불편하기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글은 첫소리, 가운데소리, 끝소리가 조합해서 한 글자를 만든다는 원리를 따라 세벌식 타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니 영문타자기보다 더 빨랐다. 미국 군정청에서 관심을 보이고 빨리 시제품을 만들라고 재촉했다.

이렇게 병원 일은 안하고 한글타자기를 연구하니 사람들이 공병우는 돌았다는 말까지 나오고, 병원에는 환자들이 몰려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타자기를 만든다고 병원을 돌보지 않으니 집안에서도 병원에서도 불평이 많았다. 그렇게 애써서 드디어 붓이나 연필이 아닌 기계로 한글을 쓰는 길을 열었으나 우리 정부는 미국 군정청과 다르게 별 관심이 없다가 6.25 전쟁 때 미군이 들어오니 영문 타자기와 함께 한글 타자기가 큰 공을 세운다. 한자를 섞어서 글을 쓰는 시대여서 한글타자기 가치를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국가기관에서 모든 공문서를 타자기로 쓰기 시작한다. 그러니 일반 회사들도 한글타자기를 쓰기 시작하고 타자기 사업이 잘 되니 5.16 군사정권 세력을 등에 업은 못된 자가 그 사업에 욕심을 내고 두벌식 타자기를 국가 표준으로 정하게 해서 세벌식 공병우 타자기 회사를 망하게 한다.

영문처럼 모음과 자음만 구별해 쓰는 두벌식은 속도로 느리고 한글기계화 발전에 방해가 되는 방식인데 공병우식 타자기 글꼴은 인쇄체 네모꼴이 아니라 예쁘지 않다고 그렇게 한 것이다. 공 박사는 잘못된 타자기 자판 표준을 바로잡으려고 정부와 싸우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괴롭힘도 받고 재산까지 모두 빼앗기게 되니 1980년 미국으로 망명해 군사독재정권 투쟁을 한다. 그런데 미국에 가니 셈틀(컴퓨터)시대가 열린 것을 보고 셈틀로 글을 쓸 수 있는 한글문서편집기를 발명해가지고 1988년에 귀국한다. 그리고 당신이 연구한 한글문서편집기 자료를 이찬진, 정래권, 강태진, 박흥호 들 젊은이에게 넘겨 더 연구 개발하도록 사무실도 주고 도와주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글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세계에서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었고 공병우박사는 그 한글을 기계로 쓸 수 있는 길을 닦아 주었다. 이 일은 세종대왕과 주시경 선생 다음으로 한글발전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우리가 정보통신 강국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한글문화가 꽃피게 해주었다. 그런데 아직도 타자기와 셈틀 자판 표준이 두벌식이어서 한글의 장점과 특징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아 한글 발전에 어려움이 많다. 한글은 여러 가지 글꼴이 있고, 마음대로 맵시를 낼 수 있는데 누리통신에 글을 쓸 때 다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1988년 공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분을 모시고 함께 한글운동을 했는데 내가 한글기계화운동도 하길 바라면서 직접 내 손가락을 잡고 눈감고 타자하도록 가르치시고 하이텔, 천리안 같은 통신방에 글을 올리는 길을 알려주셨다. 그 때 공 박사는 80대 할아버지였는데 날마다 하이텔, 천리안 들 누리통신에서 글을 한 편씩 썼다. 그 분은 한글기계화 선구자요 개척자이며 정보통신 1세대다. 나는 그 때 공 박사의 누리통신 아이디로 통신을 가끔 하다가 1995년 3월 7일 돌아가신 이틀 뒤부터 하이텔에 내 이름으로 가입해서 지금까지 날마다 통신을 하고 있으니 나도 누리통신 1세대다.

공병우 박사는 과학교육과 과학 글자생활을 강조했다. 25년 전에 정보통신 시대가 온다는 것을 내다보고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먼저 가르칠 것이 아니라 한글타자기로 눈감고 글을 쓰고 통신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교육용 간편 타자기를 만들어 보급하려고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국가의 셈틀 자판 표준이 두벌식에다가 코드 표준이 완성형이어서 더 한글이 발전할 기회를 막고 있다고 보고 그걸 세벌식 자판과 조합형 코드를 표준으로 바꾸려고 애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공박사 주장이 옳다고 보고 그 주장을 실행하려고 지금도 정부에 건의하고 글도 쓰며 힘쓰고 있다.

공 박사는 참말로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선각자요, 겨레와 나라를 진짜로 걱정하는 애국자다. 내가 이 분을 모시고 함께 한글운동을 하면서 보고 느끼면서 배운 게 많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분을 만난 게 큰 행운이고 복이라고 생각하며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다. 내가 죽기 전에 이 분의 가르침과 뜻을 받들어 이룰 것을 다짐한다. 나와 내 후손과, 겨레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