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도 제 말글을 우습게 여기는 놈들이 많은데 그 옛날에 제 말글을 사랑하고 제 말글로 글을 써야 한다고 외친 김만중은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서포 김만중, 송강 정철, 윤선도 들들
송강 절철 - 1536(중종 31)~ 1593(선조 26) 경기 강화.
조선 중기의 문신.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서포 김만중 1637(인조 15) 한성~ 1692(숙종 18) 남해.
조선 중기의 문신.
〈구운몽〉·〈사씨남정기〉등 의 소설을 남기고 있다.〈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씌어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소식의 〈동파지림 東坡志林〉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하였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이〈구운몽〉·〈사씨남정기〉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다. 이규경의 〈소설변증설〉에 전하는 바로는〈구운몽〉은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며,〈사씨남정기〉는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창작동기를 그대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썼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서포집〉, 비평문들을 모은 〈서포만필〉 등이 있으며, 행장(行狀)에 의하면〈채상행 採桑行〉·〈비파행 琵琶行〉·〈두견제 杜鵑啼〉등의 작품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김만중이 쓴 서포만필 - 2권 1책. 필사본. 비평의 객관성 추구를 기본과제로 삼으면서, 만필이기에 허용될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이용해 관념의 허위를 비판하고 국문문학을 적극 옹호했다. 1687년(숙종 13) 선천(宣川) 유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된 내용은 우리나라 시에 대한 시화(詩話)이며, 소설이나 산문에 관한 것도 있다. 그밖에 불가(佛家)·유가(儒家)·도가(道家)·산수(算數)·율려(律呂)·천문(天文)·지리(地理) 등에 대한 기사들도 실려 있어 지은이의 사상적 편력과 박학다식함이 잘 나타나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체 비교, 통속소설관, 번역문학관, 시가관, 국어관의 확립을 통한 '국민문학론' 등 선구적인 이론들을 밝히면서 중국 문화의 추종과 무분별한 한문학 모방을 나무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