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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4일 Facebook 이야기

한글빛 2013. 5. 4. 23:59
  • media.daum.net  
    【서울=뉴시스】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천황 만세 삼창'을 외쳐 물의를 일으킨 가운데 서울 한복판에서 전시 중인 불교판화전에 일본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작품이 전시되고 홍보포스터까지 만들어졌다고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가 3일 보도했다.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원주 치악산의 '명주사 고판화박물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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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엔 언제 다시 가볼수 있을까요?  
    2012년 고성 통일전망대  
    통일천사 서이을  
    2011년 11월 4일 출시한  
    등산전용 생막걸리 메아리입니다.  
    지리산산양산삼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 애산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우리 겨레를 지카고 애쓰신 것이
    우리 얼 말 글을 지키려고 애쓰신 것이

    애산 선생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 겨레를 위해서 애쓰시다가
    왜놈들에게 고문을 당해 귀가 찟어지고
    손가락이 부러지셔는데

    제대로 뜻을 이어가고 받들지 못해서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애산 선생을 사랑하고 우러러 받들렵니다.
    그래서 왜놈들과 이웃 힘센 나라에
    더 짓밟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애산 이인 선생님을 생각하며  
     
    님은 거룩하게 사신 겨레의 스승입니다.  
     
    왜정 때에는  
    우리 겨레를 짓밟은 왜놈들에게 맛서  
    우리 독립운동가 들을 무료 변론하고  
    우리 겨레의 얼 말 글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광복 뒤에는  
    새 나라를 세우는 일과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일에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위한  
    이 땅과 이 겨레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시면서는  
    온 재산을 한글학회에 내주셨습니다.  
     
    님이 이루지 못한 뜻  
    겨레의 얼 말 글을 지키고 빛내어  
    다시는 왜놈들이나 다른 나라에  
    눌려 살지 말라고 가르치고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살리고 빛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왜놈들이 아직도 우리를 우습게보고  
    헛소리를 헛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얼 차리고 님의 뜻과 가르침을  
    되새겨 힘센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2013. 5.3. 대구문화예술회관 강연장에서  
    겨레의 큰 스승, 항일 독립운동가요 한글 지킴이이신 이인 선생 추모강영회에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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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산 이인 선생님을 생각하며

    님은 거룩하게 사신 겨레의 스승입니다.

    왜정 때에는
    우리 겨레를 짓밟은 왜놈들에게 맛서
    우리 독립운동가 들을 무료 변론하고
    우리 겨레의 얼 말 글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광복 뒤에는
    새 나라를 세우는 일과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일에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위한
    이 땅과 이 겨레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시면서는
    온 재산을 한글학회에 내주셨습니다.

    님이 이루지 못한 뜻
    겨레의 얼 말 글을 지키고 빛내어
    다시는 왜놈들이나 다른 나라에
    눌려 살지 말라고 가르치고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살리고 빛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왜놈들이 아직도 우리를 우습게보고
    헛소리를 헛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얼 차리고 님의 뜻과 가르침을
    되새겨 힘센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2013. 5.3. 대구문화예술회관 강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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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산 이인 선생님을 생각하며

    님은 거룩하게 사신 겨레의 스승입니다.

    왜정 때에는
    우리 겨레를 짓밟은 왜놈들에게 맛서
    우리 독립운동가 들을 무료 변론하고
    우리 겨레의 얼 말 글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광복 뒤에는
    새 나라를 세우는 일과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일에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위한
    이 땅과 이 겨레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시면서는
    온 재산을 한글학회에 내주셨습니다.

    님이 이루지 못한 뜻
    겨레의 얼 말 글을 지키고 빛내어
    다시는 왜놈들이나 다른 나라에
    눌려 살지 말라고 가르치고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살리고 빛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왜놈들이 아직도 우리를 우습게보고
    헛소리를 헛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얼 차리고 님의 뜻과 가르침을
    되새겨 힘센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2013. 5.3. 대구문화예술회관 강연장에서
  • 세종마을 한글사랑모임!  
    함께 하실 분 손들어 보세요!!  
    2011년 11월 4일 출시한  
    등산전용 생막걸리 메아리입니다.  
    지리산산양산삼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 무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망우리 고개에서 포장된 길을 가다보면 제 찍그림에 있는 한용운님 무덤을 알리는 돌기둥이 있습니다. 7호선 사가정역에서 내려서 가면 한강도 내래다보이고 고구려 유적도 있고, 경치도 좋습니다. 내일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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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기 방정환은 1899년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7살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의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방정환의 집은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서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래서 방정환은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들이 상업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가업을 이을 것을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 만에 선린상업고등학교(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아들이 공부를 계속하기 바랐으나,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편집] 천도교와의 만남1916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곧 사직하고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가 천도교 기관에서 일한 이유는 부친이 성실한 천도교 신자였고, 방정환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결혼하였다.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으며, 당시 손병희선생이 지도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편집] 독립신문 발행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등사기로 찍은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일경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렸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다.하지만 같이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다.

    [편집] 일본유학1919년 말,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방정환》전기에 따르면, 당시 일본경찰은 독립운동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을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였다. 1920년 《개벽》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였다.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동안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 선생이 살아있을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다음과 같은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2]

    # 난파선

    1.산드룡의 유리구두
    2.왕좌와 제비
    3.요술왕 아아
    4.한네레의 죽음
    5.어린음악가
    6.잠자는 왕녀
    7.천당가는길
    8.마음의 꽃
    9.꽃속의 작은이
    방정환이 《사랑의 선물》을 만든 이유는 당시 조선의 어린이들이 누릴만한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의 영향으로 어린이 문학이 발전하여 어린이책들이 서점에 깔렸는데, 조선의 어린이들은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편집] 어린이 운동[편집] 어린이 잡지 창간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1923년 창간-1934년 7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중지)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그래서 민중들에게는 독서가 사치로 여겨지던 조선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잡지를 선전하였던 것이다.《어린이》는 이원수, 마해송 선생 같은 아동 문학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편집] 색동회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역임하며 〈아기별 삼 형제〉등의 동요·동화·추리소설인《칠칠단의 비밀》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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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하!
    한글학회 진주지회 학술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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