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 이 인 선생의 민족사적 위상
박 용규 한글학회 연구위원, 문학박사
1. 머리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대구시민 여러분 ! 일제강점기 전국을 찾아다니며 일제 법정에서 변론을 잘하여 수많은 애국지사와 애국청년의 목숨을 구한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에 항거하며 우리 말과 글을 사수하는 한글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햇수로 4년간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해방 직전에 풀려난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일제시기 배우고 싶어하는 고학생들의 단체인 갈돕회를 위해 서울 동숭동에 기숙사를 마련하여 6천 5백여 명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 자매단체로 여자 고학생 상조회를 만들어 주고 그 회관을 지어 여학생들을 공부하게 한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해방 이후 수석대법관, 검찰총장, 초대 법무부 장관, 제헌국회의원,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한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이 분이 바로 대구 출신의 애산 이 인 선생입니다.
애산 이 인(1896. 9. 20.~1979. 4. 5.)은 대구 출신 인물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애국지사이기에, 그분이 남긴 발자취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학자들에게 연구의 모델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말과 한글을 지켜온 독립운동 단체요 반일 성향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에 대해 지난 20년간 연구해 온 역사학자인 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이 인 선생이 남긴 위대한 업적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다.
2. 항일변론을 통한 독립운동
이 인 선생은 크게 세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항일변론을 통한 독립투쟁, 조선어학회를 후원한 항일투쟁,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이 인은 일제강점기 항일변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인은 1896년 9월 20일에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생가의 방벽에는 아버지 이 종영이 써놓은 “이탈리아의 세 영웅을 본받고, 제비와 참새와 같이 나 한 몸의 편안함만을 꾀하지 말라”라는 가훈이 적혀 있었다. 이 가훈을 보며 이 인은 우리나라를 중흥하는 일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신 돌석 의병장의 참모로 활동하였던 김 수농 선생이 세운 달동의숙에서 4년간 학업에 전념하였다. 스승으로부터 역사, 지리, 세계사, 수학 과목뿐만 아니라, 총 사용법까지 익혔다. 수업시간에 이 인은 스승을 통해 강렬한 민족혼을 전수받았다. 그 뒤 경북실업보습학교 2년을 마친 뒤에, 1912년 45원을 손에 쥐고 무단가출하여 일본에 유학을 갔다.
1914년 일본 대학의 법과를 졸업한 뒤에 다시 1916년에 메이지 대학 법과 2년에 편입하여 1918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그가 법률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은 동기는 억울한 우리 민족을 구해보자는 의분과 어떻게 해서든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자는 생각에서 비롯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김 양수, 김 도연(뒷날 제헌국회의원, 국회부의장)과 절친하게 지냈다. 서 민호(뒷날 광주시장, 국회의원, 국회부의장)도 만났다. 이들과 조선어사전 편찬 후원회원으로 함께 활동하였다.
1923년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해 5월에 개업하였고, 그 해 7월에 의열단 사건을 맡았다. 의열단은 혁혁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후 일제시기에 독립운동에 관련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변론을 맡았다. 허다한 무료 변론도 해주었다. 음식과 의복까지 차입시켜 주었다. 이후 20년간 매년 50-60여 건, 그 가운데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상사건만 총 1천여 건을 변론하였다.
일제법정에서의 그의 변론은 피고인의 형벌을 줄이는 일반적인 변론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히 독립운동가 변론은 그 자체로 독립투쟁이었다. 일제가 제일 싫어한 독립운동가들은 경찰서의 유치장과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으로 인해 사망에 이른 경우가 허다하였다. 변론은 독립운동가의 생명을 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형량에도 변호사의 변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컸다. 감옥을 나간 독립운동가가 다시 독립운동 전선에서 참여할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항일 변론은 법정과 신문과 잡지를 이용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혁명을 촉구하는 역할도 하였다. 법정에 참여한 방청석에게, 그리고 변론이 게재된 신문과 잡지를 읽은 우리 민족 구성원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었다. 이 인은 자신의 변론이 조선독립의 기초 공작이었다고 밝혔다. 일제 법정에서의 일제 판검사와의 변론투쟁은 합법을 최대로 활용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인은 일제의 법률로 저들을 비판하여 항일변호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 가운데 특히 정의부 군사위원장인 오 동진, 통의부 독립군인 이 응서, 독립운동가인 안 창호 등의 변론을 맡았다. 고려 혁명당 사건, 수원고농 흥농사 사건, 광주 학생 운동, 창원 소작쟁의 사건, 원산 총파업 사건, 형평사 사건 등을 변론하였다.
항일 변론으로 그는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27년 12월 고려혁명당 사건 변론에서 이 인이 ‘일본이 동양평화라는 미명하에 한국을 합병하였으나, 일본의 조선 식민 정책은 양두구육(羊頭狗肉)과 흡사하다.’라고 말하자, 일본인 재판장은 그의 변론을 중지시켰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변론 때에 학생들에게 “이 정신 이 기백을 길이길이 잊지 맙시다.”라고 격려하여 일본인 형무관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1930년 5월 수원고농학생들의 흥농사 사건을 변론할 때에 “일본이 한민족을 노예시하고 차별하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 양부모(일본인)의 학대에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양자(학생)는 친부모(한국인)를 그리워 할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굶주리면 먹을 것을 찾게 되고 결박당하였을 때는 자유와 독립,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양심적 발로이고 역사적 필연이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이 변론을 미우라라는 일본인 검사가 문제를 삼아 이 인을 구속하겠다고 법석을 피웠다. 사이토 총독은 그에게 6개월간의 변호사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래서 그에게 ‘사상변호사’라는 칭호까지 생겨났다.
1927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유학중인 김법린에게 여비로 쓸 2백 달러를 몰래 보내주어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여하게 해 주었다. 김 법린(뒷날 3대 문교부장관)은 독일에 있던 이 극로와 함께 이 민족대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조선통치를 비판하였다. 1935년에 조선변호사회 회장을 지냈다.
3. 조선어학회를 후원한 독립운동
다음으로 이 인은 우리 민족을 영구히 지키고자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보급해온 조선어학회를 후원하는 독립운동을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 내내 지속하였다.
1935년경 이 극로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 후원회에 이 인도 장 현식·이 우식·민 영욱·김 양수·김 도연·서 민호·신 윤국·임 혁규·김 종철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에 후원한 임 혁규가 남긴 자료에 의하면 이 인도 1937년에 100원, 1938년도에 100원을 조선어사전 편찬기금으로 납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어학회사건 예심종결 결정문에 의하면 1939년과 1940년에도 도합 2백 원을 사전편찬 기금으로 냈다. 그는 조선어학회가 ‘말’과 ‘글’과 ‘얼’을 되찾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조선어학회는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없어지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없어진다고 보았다.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을, 일본글이 아닌 우리글을, 일본 얼이 아닌 우리 얼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우리민족에게 가르치고 있었다고 그는 평가하였다. 너무나도 옳은 판단이었다.
1935년 3월 이 극로의 구상으로 출현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1대 관장은 김 성수, 2대 관장은 이 인)에 그도 감사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은 가난한 조선의 학자들이 출판비가 없어 조선의 민족문화를 향상시키는 좋은 책을 내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이 인은 1938년 1월 부친의 회갑 축하비용 1,200원을 이 극로에 제공하여,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서 김 윤경의 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