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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deposition)의 계절
새가 제 둥우리를 짓지 않고 다른 새의 둥우리에 산란, 포란(抱卵) 및 육추를 그 둥우리의 임자에게 위탁하는 습성을 탁란이라 말한다. 위탁하는 새를 탁란조라고 하며, 두견이과(두견이 · 뻐꾸기 · 벙어리뻐꾸기 · 매사촌)와 오리과 미국 물닭, 미국찌르레기 등 5과의 약 80종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새가 뻐꾸기와 ‘붉은머리오목눈이’로 불리는 뱁새다. 뱁새는 한국에서 가장 덩치가 작은 새로 크기는 13cm며 큰새의 대표 주자인 황새 112cm에 비교하면 정말 작다. 우리나라 속담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다.
탁란은 그저 남의 새끼 하나 더 기르는 부담을 넘어선다. 뱁새는 시간과 힘이 남아서 새끼를 낳아 기르는 게 아니다. 알을 낳은 뒤 비바람 가려 정성껏 품어 부화시킨 뒤 부리가 닳고 깃털이 다 망가지도록 헌신해 새끼를 길러 날려 보내는 것은, 생물로서 뱁새에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지상 최대의 과제다. 그러니 제 새끼 대신 남의 새끼, 그것도 자신의 천적을 기르느라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건 이중의 타격이 된다.
뻐꾸기가 높은 나뭇가지에서 알을 맡길 숙주를 고른다. 만만한 상대는 개개비, 붉은머리오목눈이, 휘파람새, 산솔새 같은 작은 새들이다. 사실 뻐꾸기는 몸길이가 33㎝에 이르는 제법 큰 새다.
ㅃ꾸기는 작은 새들의 동태를 면밀히 관찰해 목표가 된 새가 알을 낳고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놓치지 않는다. 둥지에 들이닥친 뻐꾸기가 먼저 하는 일은 뱁새의 알 하나를 부리로 밀어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래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둥지에 앉아 자기 알을 낳는다.
뻐꾸기의 이런 행동을 최초로 기록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로 기원전 4세기에 이미 '뻐꾸기는 둥지를 틀지도 알을 까지도 않지만 새끼를 길러 낸다. 어린 새가 태어나면 함께 살던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내던진다.'라고 썼다.
하지만 관찰이 반드시 바른 해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유럽의 박물학자들도 뻐꾸기를 상세히 관찰했지만 '암컷 뻐꾸기가 자기 둥지에 찾아오자 주인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의 둥지를 알 낳는 곳으로 선택해 준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운운하며 엉뚱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에서 뻐꾸기의 기생 행동이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 행동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이후 수많은 생물학자들이 뻐꾸기를 연구했지만 탁란의 행동학적, 진화생태학적 의미가 제대로 밝혀진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최근 팀 버크헤드 영국 쉐필드대 교수 등 연구진은 <런던 왕립학회보 비>에 실린 논문에서 탁란한 뻐꾸기 알이 늦제 낳는데도 늘 개개비의 알보다 일찍 깨어나는 비밀을 밝혔다. 뻐꾸기 알은 둥지에 낳기 전부터 어미 뱃속에서 이미 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다른 알은 낳고 나서 어미가 36도 체온으로 품어야 발생을 시작하지만, 뻐꾸기의 알은 어미 뱃속의 40도 체온에서 산란 18~24시간 전부터 발생을 시작한다. 따라서 개개비와 동시에 낳은 알도 31시간 일찍 깨어나 동료 살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뱁새로 봐서 뻐꾸기는 테러리스트다.
자연생태계로 봐서는 유전자의 진화경쟁이다.
탁란은 피해가 치명적인 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제비가 인가로 찾아와 실내에 둥지를 틀게 된 것도 뻐꾸기의 탁란을 피해서라는 연구결과도 있을 정도다.
탁란은 진화가 낳은 행동이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제 자식을 제 손으로 길러 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남의 둥지를 넘보는 뻐꾸기의 처지도,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