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여러분 애쓰셨습니다. 그런데 조선어학회는 1908년 주시경 선생이 상동학원에서 가르친 제자들과 함께 유지들을 모시고 창립한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 처음 이름)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모임은 1910년 나라를 왜놈들에게 빼앗기니 우리말을 국어라고 할 수 없어서 1911년에 '배달말글몯음'이라고 바꿨다가 1913년에 '한글모'로 바꾸었고, 1914년에 주시경 선생이 갑자가 돌아가시고 일제 감시가 심해서 활동이 뜸하다가 1921년에 조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하다가 1949년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조선어학회 창립과 그 업적>
1. 조선어학회의 등장배경
1) 일제의 조선 민족 말살 정책
조선을 삼킨 일제는 한 나라의 말과 글자가 그 나라의 문화 창조의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그 민족의 얼이요, 나라 발전의 촉진제가 됨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조선말 교육의 폐지와 일본말 교육의 강요로써 조선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①「보통학교 령」으로 일본말 교육 강요
②「사립학교 령」으로 사립학교 탄압과 일본말 교육 강화
③「서당 규칙」으로 일본말 교육의 강요
④「학회령」으로 우민 교육 정책 실시
⑤「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으로 민족교육 말살
⑥「출판법」으로 민족 교육용 도서 폐기 등
위와 같이 학교에선 조선어 과목은 다 폐지하게 했으며, 사람들이 일본어 강습에 참여치 않으면 강제노역, 벌금도 내도록 했다. 당시 일제는 일본어 강습회를 6만 2389차례나 열어 223만 명이 듣도록 했는데 어린 학생들이 조선어를 쓰면 그에 맞춰 벌금까지 내게 할 정도로 한글 말살 정책에 혈안이었다.
2.《조선어 학회》의 창립과 창립 목적
《조선어학회》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921년 12월 3일, 개화기에 ‘한글 운동’을 꽃 피운 <주시경>의 얼을 받은 제자들, 임경재·최두선·이승규·이규방·권덕규·장지영·신명균 등 10여 명이 휘문의숙에서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949년 10월 2일에 개칭된 현재 한글학회의 전신으로 조선어연구회가 1931년 1월 10일 제11회 총회에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이름을 고친 것이다.
그리고 1932년 1월 9일 제12회 정기총회에서 회칙을 전문 13조로 개정하고 제2조에서「본회는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목적함」이라 하여 어문연구와 더불어 표기법의 통일이라는 실제적 당면 과제를 수행함을 학회의 설립 목적으로 삼았다.
3. 《조선어 학회》의 업적
1) ‘한글날’ 제정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후 1926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어 학회에서 음력 9월 29일「가갸날」로 기념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때「가갸날」은 1927년 7월에 조선어학회 회원의 동인지로『한글』이 창간되면서 그 후 정식으로「한글날」로 고쳤다. 한편 조선어학연구회에서는 따로 훈민정음반포일을 정하여 기념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2) 국어사전 편찬사업
국어사전의 편찬사업은 1910년 10월에 설립되어 1911년 10월부터 최남선이 주관하는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 등이 주축이 되어 말모이(사전) 편찬을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는 곧 중단된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사전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1927년 지도급인사의 친목단체인 계명구락부 간사인 심우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사업 담당자들이 바쁜 사회 인사들이어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1937년 계명구락부 총회에서 조선어학연구회로 사업이 정식으로 인계되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1929년 음력 9월 29일 한글 반포 483회 기념일에 각 기관 대표와 경향 각지의 사회명사를 총망라한 108명의 발기로「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어 온 겨레의 협조를 다짐하고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1939년 여름부터는 그 사이에 편찬하여 오던「큰사전」원고에 대하여 전체의 체계적인 정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3월에는 출판허가로 조판 중 일본경찰의 만행으로 관계자가 체포되어 사전편찬은 중단되었다가 1957년에야 출판되었다. 이밖에 조선총독부에서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에 걸쳐「조선어사전」1권을 간행하였다.
3)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운동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 13일 총회의 결의에 따라 이를 진행 착수하였다. 이는 1933년 11월 4일 훈민정음 반포 487회 기념일을 기하여 완성 발표하였다. 이의 완성을 위하여 3년간의 시일과 125회의 회의와 회의시간 433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통일안은 개인의 학설을 따른 것이 아니고, 학리적 기초 위에서 다수인의 학설을 종합 절충하고 충분한 토의를 거쳐 이룩되었는데, 이 통일안의 공표는 국어학 진흥운동사상 숙원의 대업을 이룩한 첫 금자탑인 것이다. 이 통일안은 1930년과 1940년 2회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기독교회와 언론기관과 학교가 나서서 전국적인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하였고, 조선어학회는 전국적인 한글 강연회를 열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계몽운동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가장 맹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지되었는데, 이때 철자법의 통일운동은 민족통일운동의 기초로서 의의가 큰 것이었다.
4) 표준어의 제정
조선어학회는 1933년「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뒤 철자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어휘를 수집하고 초안을 작성하여 1935년 표준어사정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 철자사전 편찬위원을 자동위원으로 하고 그밖에 교육계, 종교계, 언론계 그리고 남녀별 도별로 안배하여 정하였다. 그리하여 사정된 것은 각 기관과 인사 439명에게 보내어 비판을 받아 다시 종합 심사하는 등 신중을 기하였다.
이처럼 표준어사정이 진행되는 동안 어문통일운동의 또 하나의 전진이라 칭찬하면서 각계각층의 열렬한 호응과 각계 인사들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표준어가 사정되어 책으로 나오자 거족적인 성사로 받아들여 그 노고를 위로하고 앞날을 더욱 격려하였다. 이는 주권을 상실한 식민통치 하에서 이룩된 사업이기에 더욱 더 민족적으로 호응을 받았다. 초안이 완성되자 실용상의 문제를 덜기 위해서 학회의 기관지를 비롯하여 각종 간행물에 실제로 적용하였는데, 이는 밑바닥에 흐르는 민족의식과 저항운동의 정신이 그대로 나타난 것으로서 민족문화운동사상 가장 큰 의의 있는 사업이었다.
이외에도 조선어학회는『한글』지 발행, 국어사전 편찬사업, 외래어 표기법의 통일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의 한글 부흥 운동에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조선어 학회》는 말글만을 연구하는 단순한 단체가 아니었다. 《조선어 학회》는 개화기에 민족 운동과 함께 일어난 ‘한글 운동’을 이어 받아 훌륭하게 발전시키었던 것이다. 《조선어 학회》가 그 창립의 뜻에 따라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우며 조선말글의 연구와 정리·보급을 하여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주춧돌이 되었었다. 다시 말하여, 《조선어 학회》의 연구 활동은 조선 민족의 번영과 조선의 광복과 관계된 연구와 활동이었다. 곧 《조선어 학회》가 벌인 ‘한국 운동’은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 운동’이고 ‘정치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