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시대까지는 동북아에서 가장 앞서가던 문화를 보면, 우리 겨레 동아리 말은 훌륭했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 겨레가 중국 글말을 끌어들이며, 중국겨레에게 동북아의 드넓은 땅을 야금야금 내어주고 밀리다가, 조선시대에는 왜족한테도 수모를 겪는 지경으로 힘이 빠져버린 까닭은, 무엇보다도 ‘글과 말이 같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참고삼은 책. 김수업의 『배달말 기르치기』)
입으로는 겨레말을 하면서 중국글자를 쓰자니 아무리 힘써도 그 나라 사람을 따라가기 어려움에 부딪치자, 중국을 부러워하던 나머지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 세월이 길어지면서 종(노예)의 마음으로 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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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사 “한자어 지도는 학력 향상의 지름길이다.”를 보고 익산 문영이 선생님이 쓴 글 우리 겨레가 중국 글말을 배우던 길은 중국이 서기 337년에 ‘태학’을 세운 것을 고구려가 본 땄을 것으로 보이는, ‘태학’을 서기 372년에 세우고, 중국의 경전과 문학을 가르쳐 유학을 드높여 갔다. 백제는 ‘태학’과 같은 학교를 세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