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이대로의 ‘한글’ <3>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지 않았어도 경찰에 끌려가서 증인조사를 받은 사람이 많다.
전남 무안 출신 임혁규 (1891년+고종 28∼1963년)님은 1929년 이우식, 장현식, 이인 선생과 함께 108인 사전편찬위원회 때부터 참여해서 우리말 사전 편찬을 도우던 중 1942년 1만 3천원의 자금을 조성하고 활약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이 일어났으며, 다음해인 1943년 3월에 방종현, 백낙준(白樂濬), 곽상훈(郭尙勳), 민영욱, 김두백, 정세권 들 48명이 함께 증인으로 경찰로서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그 때 갓을 짓밟히고 머리를 깎기는 수모를 당한 것이 한이 되어, 평생토록 모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자도 있었지만 겨레 독립운동 차원에서 재정지원을 한 분들이 많았고, 주시경의 제자와 대종교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많았고, 일본과 미국, 독일 유학을 한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 밖에 조사를 받은 분들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앞으로 역사학자가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한글은 세종이 만들 때부터 반대 세력이 있었다. 세종 때 최만리 무리가 그랬고, 조선시대 중국 사대모화 세력이 있고, 일제 때 친일 세력, 그리고 대한민국 때에도 일제 식민 교육을 받은 일본식 한자혼용 세력이 한글 반대 세력이다. 한글 방해 세력은 끈질기다.
대한제국 때 독립협회도 참여해 회장까지 지낸 윤치호는 다음에 친일로 변절하고 겨레말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어학회에 대항한 조선어학연구회 회장 박승빈을 도왔다. 박승빈은 일본에서 법을 공부한 변호사로서 1925년부터 보선전문 교장을 지낸 자로서 일본 앞잡이 단체인 국민동원총동원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간부인 윤치호와 같이 그 두 단체에서 친일 행위를 했다.. 이들은 계명구락부에서 친일 부르조아 세력을 모아 민족문화운동을 한다고 표명했으나 민족자주세력인 조선어학회에 맞섰다. 미국 군정 때 보성전문학교 교장 현상윤이 한글전용을 강력하고 반대한 것도 전 보성전문 교장 박승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승빈이 만든 조선어학연구회는 주시경 학파가 우리 글자를 한글이라고 이름을 짓고 문법이란 한자말이 아닌 말본이란 맨조선말을 살려 쓰려고 애쓰는 조선어학회를 방해했다. 박승빈이 만든 이 모임은 조선어연구회보다 11년 뒤에 1931년에 결성한 단체로서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하던 한글맞춤법법통일안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하 모임이다.
조선어학연구회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학술지에 대항해 1934년 2월 15일자로 기관지 정음(正音)을 발행하는 한편, 이해 6월 27일에는 조선문기사정리기성회(朝鮮文記寫整理期成會)를 조직하였고, 7월에 한글맞춤법통일안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여 조선어학회와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어학연구회에서 전개한 <한글맞춤법통일안> 반대운동은 이 회가 내세운 철자법이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정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과 1938년까지 조선어학회연구회도 사전을 만들었으나 1942년에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잡아가면서도 이들은 하나도 손대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모임이 내는 회지 ‘정음’ 20호에 “민대식이 5900원, 박승빈이 6470원, 윤치호가 300원을 낸 사실이 적혀있다. (최경봉 지음:우리말의 탄생) 이들 민대식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은 친일분자로서 조선 최고 갑부인 민영휘의 아들이며 모두 친일 부자들이었다.
일제 때 주시경 학파와 조선어학회가 한글을 살려서 쓰자는 것을 반대한 이가 또 있다. 일본식 한자 혼용을 주장한 ‘안확’이다. 일제 때 박승빈과 안확들의 주장과 행태는 대한민국 시절에 경성제국대학 출신 이희승, 이숭녕들과 그 제자들 중심으로 만든 한자단체가 이어받아 박승빈과 안획처럼 한글과 토박이말을 살리고 빛내자는 한글학회에 대항하는 꼴이어서 안타깝다. 세종대왕 때 중국 사대모화사상에 물든 최만리 무리로부터 시작해 일제 때 친일파에 이어 오늘날까지 문자개혁과 우리 말글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세력도 이들과 같은 새로운 우리 말글 방해꾼들이다.
대한제국 끝 무렵에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 김두봉 들은 우리말 말광(사전)이 필요함을 느끼고 1911년부터 ‘말모이’라는 이름으로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양 여러 나라가 영어나 독일어, 불어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주시경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마무리하지 못했다.
주시경의 제자 김두봉이 1916년이 낸 ‘조선말본을 1922년 상해의 새글집[新文館] 출판사 이름으로 ≪깁더조선말본 精解朝鮮語文典≫을 출판한 일은 우리 말글 발자취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큰일이었다. 그 뒤 이윤재님이 조선어학회에서 사전을 만들면서 주시경과 김두봉이 만들던 ‘말모이’ 자료를 얻으려고 상해에 가서 김두봉을 만난 일이 있는 데 그 사실만으로 이윤재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여기서 김두봉에 대해서 조금 말하려고 한다. 김두봉은 주시경(周時經) 선생으로부터 한글과 겨레사랑 정신을 배운 첫 제자나 마찬가지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광문사(光文社)에서 발행한 ≪조선어문전 朝鮮語文典≫ 편찬에 참여하는 등 한글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스승 주시경이 이 세상을 뜬 뒤 스승처럼 여기 저기 학교에서 교육을 하고, 1916년에 ‘조선말본’을 낸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해 신채호(申采浩)가 주필로 있던 순한문신문인 ≪신대한신문 新大韓新聞≫의 편집을 맡아 일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창기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는 등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정치활동에 참여 공산당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뒤 북쪽에서 부수상까지 지냈다. 북이 남보다 한글을 더 살린 것은 이극로와 여러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김두봉과 만나서 한 일이고, 김일성의 정신과 업적이 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대기업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외국 유학을 다녀온 학자나 지식인들은 우리 겨레말을 우습게 여기고 한글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전경련, 무역협회 들 경제 단체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게 하고, 선경과 금성이 영어로 회사 이름을 영어로 바꾸고, 대기업들이 영어와 한자를 섬기는 것이 그 본보기다. 또 일제강점기 때와 달리 오늘날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교수나 학자들 가운데 제 말글보다 영어와 한자를 더 숭배하고 한글을 못살게 하는 이가 많다. 오늘날 돈이 많은 이들과 지식인들은 거의 한글 훼방꾼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시대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외국 유학을 가서 공부한 지식인들은 우리 말글을 살리려는 모임과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실제로 경남 갑부 이우식님은 한글학자가 아니면서 조선어학회가 하는 사전 편찬과 업무비를 대주었고 그런 지식인과 부자들이 여러분 있다. 오늘날 돈이 많은 이들에 비해 매우 훌륭한 분들이고 멋쟁이다.
1936년 8월 [한글] 37호에 장현식, 이우식, 민영욱,김양수, 김도연, 서민호, 신윤국(신현모), 임혁규, 김종철, 이인님들이 사전 편찬을 후원했으며, 이우식님이 ‘한글’지 간행을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글이 있다. 위 분들은 흥업구락부라는 회사를 차리고 물산 장려운동을 하면서 독립운동과 애국자들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 때 구금되기도 했다. 이우식 선생은 한글학자 이극로와 안호상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그들 개인이 공부하고 활동하는 비용도 대주었다고 한다.
1935년 사회사업가 정세권은 2층 집을 조선어학회에 기증했으며 이인 선생은 변호사로서 민족운동을 하다 끌려간 지사들을 무료로 변호했고 조선어학회 수난 때 고문에 귀도 찢어지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고통 속에 살면서 한글회관을 지을 때 가지고 있는 돈 3000만원을 내놓았고, 돌아가실 때 살던 집도 한글학회에 내놓으셨다. 이인 선생 개인이 전 재산을 학회에 내놓는 것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1억 원을 내놓아 한글회관을 짓게 되었고, 오늘날 그 덕으로 한글운동을 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정부는 광복회나 참여연대와 경실련들 시민단체는 도와주어도 한글학회는 한 푼도 지원하지 않고, 대기업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들 언론도 한자단체는 도와주지만 한글학회는 전혀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방해한다. 몇 해 전부터 형설출판사가 한글학회가 다달이 내는 ‘한글새소식’ 을 실비만 받고 내주고 있을 뿐이다. 한글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제 돈을 들여가면서 한글운동을 하고 있다.
여기서 위에 한글학회를 도운 신윤국(신현모·사진)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나 적는다. 신윤국님은 미국 유학 때 고국 친구가 병이 났을 때 부모가 보낸 학비를 모두 그 병원비로 내주고 고학을 한 일도 있는 분이다. 울산제일일보 2012년 2월 21일치 기사 한토막을 소개한다.
“서울 성북동 삼각산 남쪽 자락에 길상사(吉祥寺)가 자리 잡고 있다. 제3공화국 시절에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했던 김영한(金英韓)이 대원각을 송광사에 시주하여 탄생한 절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과거 요정을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그 보다도 더 강렬했던 러브스토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영한은 양갓집 규수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자 16살 때 조선권번(기생학교)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기생이 됐다. 미모, 그림, 글 솜씨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는 그녀는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도쿄 유학까지 떠나게 되었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 감옥으로 찾아갔으나 스승은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인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여기 신윤국은 조선어학회를 돕다가 감옥까지 간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신현모(신윤국)님이다. 일제강점기 때 천석군은 아름다운 부자요 멋쟁이였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http://cafe.daum.net/hanmal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