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낸 “버선발 이야기” 글묵(책)은 여든여섯 살인 백 선생님이 지난해 몸이 많이 아파서 오래 동안 병원에서 수술하고 나온 뒤 남기고 싶은 말을 우리 토박이말로 쓴 글묶음이다. 머리말부터 “니나(민중), 갈마(역사), 새름(정서), 든메(사랑), 하제(희망), 달구름(세월), 때결(시간), 얼짬(잠깐), 글묵(책)”같은 낯선 말들이 나온다. 백 선생님이 옛날 어려서 들은 말도 있지만 새로 만든 토박이말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한자말이나 미국말을 하나도 안 쓰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싶다. 우리말 살리는 일을 하는 나는 이 글묵을 보면서 백 선생님이 더 우러러보이고 고마워서 마음으로 절을 한다. 백 선생님이 이렇게 한자말이나 미국말을 하나도 안 쓰고 글묵을 낸 것은 옛 한아비들은 남의 겨레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기에 우리답게 살려면 우리말을 살리고 우리말만으로 말글살이를 하자는 뜻이다. 우리가 힘센 다른 나라에 끌려다니지 않고 떳떳하게 살려면 그래야겠기에 일부러 애써서 쓴 글묵이다. 우리 겨레 모두 그 뜻을 깊이 되새기고 많은 사람들이 “버선발 이야기”를 읽은 뒤 백 선생이 만든 우리말을 쓰고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함께 가면 없던 길도 생긴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백 선생님을 따라서 우리말을 찾아서 쓰고 살릴 때에 우리말은 살고 우리 겨레도 빛날 것이다.\ 난 일찍이 선생님으로부터 ‘파이팅’이란 말을 쓰지 말고 “아리아리 꽝”, ‘뉴스’가 아닌 ‘새뜸’이란 말을 쓰자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처음에 백 선생님이 쓰는 옛 토박이말이나 새로 만든 우리 낱말을 봤을 때에 많이 낯설었지만 자꾸 써보니 조금씩 토박이말이 더 좋아지고 오랜 벗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하면 백 선생님 뜻이 살고 빛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 토박이말은 낯설다고 쓰지 않으면서 더 낯선 미국말이나 어려운 일본 한자말은 잘 따라서 쓰고 좋아한다. “이벤트, 재테크”같은 일본식 말을 잘 받아서 쓰는 것이 그 꼴이다. 또 거리에 영어 간판이 자꾸 늘어나는 것이 그 모습이다. ▲ 2009년 백기완님이 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출판기념회 때 찍그림(사진)이고 오른쪽은 이번에 백 선생이 한자말과 외국말은 하나도 없이 쓴 ‘버선발 이야기’ 겉장이다. © 리대로 |
|
백 선생님은 올해부터 10해 앞인 2009년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자서전을 한겨레출판사에서 낸 일이 있다. 그 때까지 선생님이 살아온 이야기들이었는데 그 글묵에도 미국말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한자말은 글목 이름에 쓰인 ‘명예’란 말처럼 몇 개 있다. 그런데 이번에 낸 “버선발 이야기”에는 한자말이 하나도 없다. 참으로 놀랍고 새로운 일이다. 아니 큰 새뜸(뉴스)이다. 열 해 앞서 낸 그 글묵에 “ 나는 늙지 않는다.”는 글이 있다. 노녁(북쪽)에 남아있는 누님을 만나지 못하고는 죽을 수 없다는 말인데 남북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뜨거운 마음이 느껴졌다. 이번에 낸 글묵은 한자말이나 미국말을 줄이고 우리말을 살려서 쓰자는 뜻이 매우 크다. 나도 일찍이 “하이텔, 천리안” 같은 누리통신이 널리 쓰일 때에 ‘네티즌’이란 말을 ‘누리꾼’이라 바꿔서 썼더니 많은 사람들이 썼다. 백 선생님이 우리말을 살려서 쓰는 것을 보면서 황해도에서 태어나 한삶을 우리말과 글을 살리고 빛내려고 애쓴 주시경 선생님이 떠오른다. 주 선생님은 1910년 일본제국에 나라를 빼앗기니 ‘국문(나라글자)이 일본글자가 되어서 우리 글자를 국문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기에 우리 글자를 한겨레의 글자란 뜻으로 ’한글’이라고 새 이름을 달아주었다. 또 그 때 일본말이 ‘국어’가 되니 우리말을 ‘국어(나라말)라고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말을 “한겨레 말”이라는 뜻을 담아 ‘한말’이라고 새 말을 만들어 썼다. 그리고 주시경이란 당신의 한자 이름을 안 쓰고 ‘한힌샘’라는 우리말 이름을 지어서 썼다. 두 분의 뜻과 마음이 같다고 본다. 그런 두 분처럼 나도 요즘 사진’을 ‘찍그림’, ‘사진기’는 ‘찍틀’, ‘동영상’을 ‘움직그림’, ‘에스컬레이터’를 ‘움직계단’, ‘무빙워크’는 ‘움직길’이라고 바꿔서 쓰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주시경, 백기완 선생님들처럼 우리말을 살리려고 애쓰면 바로 우리말이 살아나고 얼 찬 나라가 될 것이다. 한 겨레말은 그 겨레 얼이다. 그 겨레말이 살면 그 겨레 얼도 살고 얼 찬 겨레가 된다. 베트남이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서 이긴 것은 무력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겨레 넋살(정신)이 강했기 때문이다. 백 선생님이 한자말이나 미국말을 안 쓰고 우리 토박이말을 살리려고 애쓰는 것은 겨레 넋살이 꽉 찬 나라를 만들어 힘센 나라에 짓밟히고 끌려 다니지 않고 어깨를 펴고 살자는 뜻이라 본다. ▲ 오른쪽은 1980년대 대학에서 백기완 선생님이 쓴 ‘동아리’란 말을 퍼트린 김슬옹박사와 만난 찍그림, 왼쪽은 2017년 영화 ‘1987’ 시사회 때에 백기완, 이수호 두 분을 만난 찍그림. © 리대로 |
|
이런 백 선생님 큰 뜻을 난 일찍부터 알고 우리러보고 모셨다. 1980년대 대학생들 모임에서 ‘써클’이란 미국말을 ‘동아리’로, ‘신입생’이란 한자말을 ‘새내기’로 말하는 백 선생님을 보고, 또 1990년대 내 처조카 혼인 주례를 맡은 백 선생님이 “아들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고 하는 주례사가 아니라 “미국말 쓰지 말고 우리말을 사랑하라.”라고 주례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선생님을 우러러봤다. 그래서 1994년 조선일보가 일본처럼 한자를 섞어서 쓰자는 무리들과 함께 “한자를 배우고 씁시다.”라는 글을 그 신문 1면에 17회 째나 이서서 쓰면서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는 말글살이를 못하게 나섰을 때에 그 짓을 막으려는 한글단체 강연회에 백 선생님을 연사로 모신 일이 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백 선생님을 연사로 모시는 것을 반대했으나 내가 강력하게 나서서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 김동길 연세대 교수와 함께 백기완 선생님까지 나서서 조선일보의 잘못을 꾸짖고 따졌는데 조선일보는 바로 그 못된 짓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 때에 백 선생님 말씀이 가장 크게 그들을 움직여서 그런 줄 생각하고 있다. 그런 백 선생님의 아름답고 큰 뜻을 고마워하면서 나는 이오덕 선생님과 함께 만들고 내가 이끄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에서 2002년 한글날에 “우리말 으뜸 지킴이”로 뽑아 온 누리에 알린 일이 있다. 선생님의 뜻과 움직임을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따르자는 내 마음 실천이다. 선생님이 쓴 글묵에 나오는 “맞대’(대답), 고칠데(병원), 오랏꾼(경찰), 불쌈(혁명), 든올(철학), 얼래(인터넷), 새김말(좌우명), 불쌈꾼(혁명가), 양떡집(빵집), 아리아리(화이팅), 온널판(우주), 재재미쌀(현미),덧이름(별명), 알짜(실체), 나발떼(선전꾼), 지루(권태), 날노래(유행가), 때참(계기), 진꼴(패배,실패), 새뜸(뉴스), 넋살(정신)”같은 말들이 낯설어서 처음에 선생님이 쓴 글묵을 읽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낯설지만 여러 번 읽으면 새말을 만드는 힘도 커지고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낸 글묵 “버선발 이야기”는 2009년에 낸 글묵보다 재미있고 글맛을 더 느낄 수 있다. 나는 3.1독립운동 100돌을 맞이해 지난 3월 7일에 광화문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우리 성과 이름을 우리말로 짓고 우리 글자로 쓰자”라는 “배달겨레 얼말글 줏대세우기 기자회견”을 했다. 이 일은 백기완 선생님이 우리말을 살려서 우리겨레를 살리고 얼 찬 겨레가 되자는 뜻을 이어받고 살리자는 뜻과 같다. 나는 그 때 “독립선언 성명서”란 말을 “줏대세우기 밝힘글”이라고 했다. 백기완 선생님 옆에서 함께 움직이진 못하지만 그 뜻을 실천하자는 노력이다. 다행히 나와 같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고, 한자로 된 국회 보람 ‘國’자를 ‘국회’로 바꾸는 일을 한 이수호 선생님이 백 선생님과 같이 있는 것을 보면서 고맙고 든든하다. 사람들은 백 선생님이 통일과 민주, 니나(민중), 노동운동꾼으로만 많이 알고 있고 선생님 옆에 그런 분들이 많다.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 겨레와 우리말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실천하는 우리말 으뜸 지킴이시기도 하다. 백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르는 모든 분들부터 백 선생님을 따라서 우리말 사랑꾼이 되면 좋겠다. 우리말이 살면 우리얼이 살고, 우리말이 빛나면 우리얼도 빛난다. 그 때에 중국, 일본, 미국이 우리를 깔보지 못한다. 토박이말을 낯설어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때에 백 선생님과 한 마음이 되고 우리말과 우리 겨레, 니나(민중)와 북녘 겨레가 함께 손잡고 살 길이 열린다. 백 선생님을 좋아하고 함께 니나(민중)운동을 하는 분들은 더더욱 말할 것이 없고 온 겨레가 선생님이 쓴 글묵을 읽고 토박이말을 더 좋아하길 바라고 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리대로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