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그 아들인 세조, 손자인 성종 때까지
50여년 동안 정부에서 한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지만
그 뒤 연산군 때부터 그런 흐름이 사라졌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과 그 아들인 세조, 그리고 손자인 성종 때까지 50여년 동안 정부에서 한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지만 그 뒤 연산군 때부터 그런 흐름이 사라졌다. 500여년 동안 정부 공문서를 한글로 쓰지 않았다. 조선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도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우고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한글전용법을 만들고도 한 동안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깨어있는 나라임자들이 한글을 써야 된다고 외치고 애써서 이제 간신히 한글이 살아나고 공문서는 한글로 쓰고 있다.
나는 우리 말글 독립운동 발자취를 연구하면서 조선시대 왕조실록부터 한글로 쓰기 시작하고, 공문서라도 한글로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중국 지배를 받고 한글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는 어쩔 수 없이 한자로 썼더라도 중국 지배를 벗어난 1894년 대한제국 때부터라도 한글로 썼더라면, 아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라도 공문서를 한글로 썼으면 한글이 살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를 이끄는 이들이 세종대왕처럼 자주, 개혁 창조 정신이 없는데다가 뿌리 깊은 남의 말 섬기는 버릇(언어 사대주의)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1894년 조선 고종은 칙령 1호 공문식(公文式) 14조에서 “모든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漢文)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혼용한다”고 발표한다. 이 일은 한문만 쓰던 공문서를 국문으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정한 것이 첫째 큰 의미가 있고 다음으로 언문, 반절, 암클들로 불리던 우리 글자를 처음으로 ‘나라글자(국문)’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데 큰 뜻이 있다. 그런데 그 때 벌써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일본식 한자혼용(1886년 창간한 한성주보가 혼용)이 시작되어서 국한문 혼용도 같이 하게 했다는 것이 큰 부끄러움이다. 그 때 지배층은 한글보다 한문을 더 좋아하고 한글을 잘 모르는 이가 더 많았을 것이다.
고종 때 한글(국문)을 살려서 쓰려고 지석영, 주시경 들이 연구하고 애썼다. 그러나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제자리에서 쫓겨나면서 그 기세가 꺾인다. 1907년에 지석영, 주시경들은 정부에 국어연구소를 차리고 한글을 살려 쓸 정책을 마련하려고 애썼으나 그 해 일제에 의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다. 한편 주시경은 상동교회에서 조선어 강습원을 차리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쓰게 하려고 애썼으며 1908년에서 그가 한글을 가르친 제자들을 중심으로 세계 최초 민간 국어연구학회(오늘날 한글학회 처음 이름)을 창립한다. 그러나 1910년에 대한제국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주시경은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나 한글을 살려서 우리 겨레와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꿈은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가 일본 나라가 되었으니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일본글이 국문이 되었으니 우리말을 국어, 우리 글자를 국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글자를 한겨레의 글, 으뜸가는 글, 한국의 글이라는 뜻을 담아서 우리 말글로 ‘한글’이라고 지었다. 우리말은 한겨레의 말, 으뜸가는 우리글이라는 뜻을 담아 ‘한말’이라고 새 이름을 지어서 부르며 우리 말글을 살리려고 애를 쓴 것이다. 주시경은 한글책 보따리를 들고 여러 학교를 다니며 가르치고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를 만들다가 1904년에 갑자기 이 세상을 뜨니 한글은 빛을 잃는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이 세상을 뜨면서 3월 1일에 기미독립운동 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때 기미독립선언서도 일본처럼 한자혼용이었다, 그 해에 중국 상해에서 망명한 애국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다. 그 뒤 1945년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문서도 한자혼용이거나 한자로만 썼었다. 그 때 주시경 제자요 한글전용 주장자인 김두봉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공문서를 한글로 쓰지 않은 것이 매우 아쉽고 안타깝다. 중국 땅에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보지만 내부 문서라도 한글로 썼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미군이 이 땅을 점령하고 미국 군정이 시작되었는데 그 때에 모든 교과서를 한글로 쓰고 공문서도 영어와 함께 한글로 쓴다. 그 때 조선어학회 출신인 안재홍이 민정장관(미국 민정장관과 동격), 이인이 법무부장, 재무부장에 김도연이 활동하고 교과서 만들기에 최현배가 참여하면서 1947년부터 한글날이 공휴일이 되었다. 모든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고 공문서도 영문과 함께 한글로 썼다. 참으로 잘한 일이고 다행스러웠다.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우면서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어쩔 수 없을 때에 한자를 병기한다”는 법(법률 제6호)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한글을 쓰기 시작한 1446년부터 500년 동안 공문서 하나도 한글로 쓰지 않았다. 세계 으뜸가는 제 글자가 있는데도 안 썼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고 뉘우치고 이제라도 잘해야 할 것이다. 매우 잘못된 일이고 뉘우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