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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 1995년 큰마을 이야기 |
http://blog.paran.com/hitelplaza/876906 |
글출처: 큰마을[plaza] 큰마을
글쓴이:
최준혁[jiunhyok] | |
 | | 죄송합니다.
글을 쉽게 쓰기 위해서 반말투로 적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 오.
나는 한글-한자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젊은이다.
그러나 배운 것이 짧고 글재주가 없어 여기에 대해 되도록이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 나 최근에 박경범 님과 그외 분들의
글을 읽고 나 나름대로 생각한 게 있어 이 글을 쓴다. 나는 사실 이들의 글을 읽고 화가 났다. 아직도 이런 낡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까지 과거에 매달려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들이 외치는, 한자섞어쓰기의 이유들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은 지니고 있다. 한자섞어쓰기에 장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단점은 더욱 크다. 그 리고 한자섞어쓰기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 장점이다. 그 장점은 짧게 보면 장점이지만 길게 보면
결국 우리 말글살이에 독이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글만쓰기를 주장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우리 말글살이의 앞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섞어쓰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면 역시 한 자어의 조어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말은 맞다. 지금을 기준으로 한다면 분명히 한자어는 조어력이 토박이말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못하고 있는 것은 한자어의
조어력은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 이라는 것은 소리와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무시될 수 없 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구태여 이야기하자면 소리 쪽이 더 중요하다. 한자 어 중독자들은 다들 뜻이 낱말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낱말과도 닮지 않은 음절이 있다면 그 것 은 낱말이 되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을 이미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음절을 낱말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에는 사회적 합의만이 필요할 뿐이 다. 한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리를 무시한 글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글을 읽기도 하지만 입으로 소리내어 말할 때가 훨씬 더 많다. 학술용어는 주로
글로 표시될 때가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하여 입말로 쓰이지 말라는 법은 없 다. 반드시 입말로 이야기했을 때도 그 낱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이 그 낱말은 말로서 자격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한자어는-사실 말이라고 하기 도 어렵다. 입말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으니- 오직 글자의 형상에만 의지하 고 있을 뿐이다. 한자어는 한자의 도움을 얻지 않고는 낱말끼리 구분할 수 도 없다.
한자어의 동음어 문제는 우리가 한자를 계속 쓰는 한 영원히 따라 다닐 멍에인 것이다. 박경범 님 같은 분은 한글도 모든 음운을 밝히는
것은 아니라 하면서 한글의 단점을 말한다. 참으로 알지 못할 말이다. 그 기준으 로 따지자면 아예 한자는 글자의 자격조차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 한자 사용의 이유가 되다니 알쏭달쏭하다. 추측컨대 박경범 님은 다음과 같은 말 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한자어 가운데에는 홀소리의 길고짧음으로 구별되는 말도 있는데 한글은 그것을 제대로 밝혀 적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한 글의
단점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사실 사소한 것이지만 단점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구태여 한글을 변호하자면 글자는 발음기호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아마도 박경범 님도 그런 말을 한 걸로 기억한다. 그 주장에 대한 반박은 나중에 하기로 한다. 짧게 말하자면
글자는 발음기호가 아니지 만 발음기호와 가까울수록 그 글자가 우수하다는 것이다. 우선 세계의 예를 들어보겠다. 아랍어나 히브리어의
글자에는 홀소리가 없다. 물론 밝혀 적고 자 하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적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영어에는 악센트가
음운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영어를 적은 글자에는 악센트 표기가 거의 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걸 구태여
밝혀 적지 않아도 불편이 그리 크지 않아서 그렇다. 아랍어나 히브리어 같 은 셈어 계통의 언어에서는 홀소리는 낱말을 구분케 하는
기능을 맡고 있는 게 아니라 문법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보통 악센 트는 부차적인 의미 구분의 역할만을
맡고 있는 게 태반이다. 즉 그걸 구태 여 밝혀 적느니 안 적는게 불편이 적다는 말이다. 일본어에서는 홀소리의 길고짧음을 꼭 밝혀
적는다. 그런데 우리말과 일본어의 홀소리의 길고 짧음 을 견주자면 크게 차이가 난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우리말에서는 긴
홀소리가 낱말의 가장 앞음절에만 나타나는 데 견주어 일본어에서는 낱말의 어느 부분에서나 나타난다. 그리고 실제로 들어보면
우리말에서 홀소리의 길고짧음은 구분이 좀 어렵다. 일본어는 아주 분명하게 구분해 주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말에서
홀소리의 길고짧음은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음운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나타나는 부위도 제한되어 있다. 그 런데 길고짧음을 꼭
밝혀 적으려면 글자를 쓰는 데 있어 불편이 따른다. 그 래서 한글에서는 홀소리의 길고짧음을 밝혀 적지 않는다. 이것은 단점이라 면
단점이랄 수 있지만 쓰기의 편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단점을 바로잡기 위해 한자를 쓴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 할 것이다. 만일 홀소리의 길고짧음을 밝히기 위해 한자를 쓴다면 낱말 뒤 음절에는 한자를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한자의 조어력은 허깨비일 뿐이다. 입으로 말해서 알아듣지도 못할 낱말이 낱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니!
한자의 조어력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말이 많다. 한자의 조어력이 지금 처럼 뛰어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한자로 만 말만들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언어의 조어력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엉터리 같은 말일 뿐이다.
언어들 사이에는 낫고 못함의 차별이 없다. 이제까지 이야기되어온, 언어들간의 낫고 못함은 제국주의적인 학문 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각 언어들이 보이고 있는 현상은 융성과 쇠 퇴가 있다. 그것도 각 언어의 사용 집단의 강약에 따른 것인 경우가 태반이
지만 말이다. 각 언어의 본질은 낫고 못함을 따질 수 없다. 어떤 언어의 경 우에나 조어력이 있으며 그 조어력은 모두 평등한
것이다. 하지만 그 조어 력을 활용하는 데에는 차별이 있다. 그 활용의 정도에 따라 조어력이 우수 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말은 오랫동안 내버려져 왔다. 옛날에는 얼마든지 토박이말로도 새 개념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 러나
언제부터인지, 특히 추상어 분야에서 한자어가 넘치기 시작했다. 그러 자 우리말은 더 이상 새 낱말을 만들 힘을 잃었다. 특히
학술분야에서. 딴 나라에서는 일상용어의 추상화라는 과정을 거쳐 고차원의 정신 개념을 표현 하는 낱말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오직 수입에 의존만 했다. 그 결과가 바로 현재의 우리말이다. 뜻글자의 조어력이 뛰어나다는 엉터리 같은 말을 하는
이도 있다. 조어력이라는 것은 글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 라는 기본 상식조차 모르는 이다. 조어력이 뛰어나다면 한문-고전 중국어-
의 조어력이 뛰어난 것이지, 한자의 조어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한자로 말만들기가
편하다고 해서 언 제까지 한자에 우리 말글살이를 맡길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말을 버려왔다 면 이제라도 우리말을 갈고 닦아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한자는 오직 글말 에서나 통한다는 너무나 큰 단점을 갖고 있다. 아직도 한자의 조어력을 핑 계로 한자섞어쓰기를
해야 한다는 건 우리말을 죽이자고 하는 것과 다름없 는 말이다. 한자섞어쓰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한자섞어쓰기가 한글을
쓰지말자고 하는 말은 아니라고 억지를 쓴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야기했듯 이 우리말의 조어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한자로 새
말을 만드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러자면 한자를 섞어 쓰지 않는 게 최선이다. 한자어는 심오한 개념을 표현하는 데에 유리한가?
사실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은 위에서 간접적으로 한거나 마찬가지지만 짧게 이야기하겠다. 도대체 가 심오한 개념이라는 것이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우리가 어떤 소리- 음절-에 심오한 개념을 부여하면 그 소리는 심오한 낱말이 되는 것 뿐이다. 어떤
낱말에는 심오한 개념이 있어서 그 낱말을 안 쓰면 심오한 개념을 잃 어버리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한자 중독자들은 반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박경범 님이 한 말 중에 아주 바보같은 말이 있어 소개하겠다. "단어가 모 여 문장을 이루는 것이지 문장에 단어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 아주 정반대 로 알고 있다. 낱말은 문장의 맥락 속에서만 그 뜻이 명확하게 결정된다. 낱말의 쓰임이 그
낱말의 뜻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낱말 그 자체에 뜻이 숨 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문장 자체도 그 상황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언어학에 귀동냥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상식이라고 생 각한다. 이런 식으로 백번 이야기해봤자 소귀에 경읽기니
예를 한 번 들어 보겠다. 道라는 한자어는 중국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낱말이다. 아마 이 낱 말이 추상언어가 된 것은 적어도
2천5백년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낱말 은 일상용어가 아닌가? 옛날에는 일상용어로만 쓰였을 것이고 지금도 일상 용어의 쓰임이
더 많다. 하지만 중국인이 이 말에 부여한 뜻 때문에 이 말 은 엄청나게 고상한 말이 되었다. 예를 몇 개 더 들어보겠다. yoni란
산스 끄리뜨어 낱말이 있다. 여자의 성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이 낱 말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지금은 상당히 고상한
말이 되었다. 아마 여기에는 성을 금기로 보지 않는 인도의 특성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어쨌든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토박이말이 받고 있는 대접을 생각해 보면 참 아쉽다. 독일에서 철학 용어가 일상용어라는 말은 새삼스레 하고 싶지도 않다. 황일우
님이란 분은 독일의 상황은 우리와 다르다고 하셨지만 우리가 독일에서 본받아야 할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현실이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인정하자고 하면 퇴보 말고 무엇이 남을까? 독일에서도 철학용어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우리 나라에서보다는 쉬울
것이다. 왜냐 하면 독일어에서는 그 철학용어의 독특한 쓰임새만을 배우면 되지만 우리말 에서는 한자와 한자어의 쓰임과 그 철학용어의
쓰임이라는 세가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장벽이 한가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장벽이 세가 지인 셈이다. 박경범
님은 또 한가지 바보같은 오해를 하고 있다. 한자어가 세밀한 표 현에 우리말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자어 중독자들의 상당수
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보니 생각난다. 영어의 어휘가 우리말 어휘보다 수가 많기에 영어는 우리말보다 더 우수한
언어라는 것이 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어휘 수가 많다는 것이 언어의 장점이 될 수는 없다. 세밀한 표현과 광범한 표현에는 다
같이 장단점이 있다. 어느 것이 나은가는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그 언어의 말할이가 얼마나 적절하게 어휘 를 부려쓰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聞과 聽이라는 한자어를 들어서 한자어 에서는 구분되는 낱말이 우리말에서는 '듣다'한가지 뿐이라고 우리말은 못 하다고
한다.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江과 河라는 말은 어떠한가? 그 낱 말들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江은 남쪽에 있는 강을 뜻하는
말이고 河는 북쪽에 있는 강을 말한다. 그래서 장강과 황하인 것이다. 과연 이런 식의 세밀한 뜻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실은 중국에서도 이런 식의 세밀한 뜻 구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왜냐하면 현대 중국어는 단음절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朋과 友는 옛날에는 분명히 미묘한 뜻의 구별이 있는 다른 낱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朋友라는 낱말로서 융합되었 고 구분을
거의 안한다. 왜냐하면 굳이 그렇게 세밀한 뜻구분이 필요치 않 기 때문이다. 앞에서 한자의 세밀한 뜻 구분을 보이기 위해 예로 든 낱말들
도 약간만 생각해 보면 그런 식의 뜻 구분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어리둥절 할 것이다. 구태여 구분하고 싶으면 수동태를 써서
수동성을 표시하면 그만 이다. 중국어에는 수동태가 없다. 적극성을 정 표현하고 싶으면 '귀기울이 다.'라는 낱말을 적절히 활용하면
얼마든지 적극성을 표현할 수 있다. 왜 박경범 님 같은 착각을 하는가? 바로 한문을 기준으로 우리말을 보기 때 문이다. 어떤 한
언어를 잣대로 하여 딴 언어를 보면 반드시 그 단점이 부 각되기 마련이다. 이런 식의 장단점 찾기가 언어 연구의 목적은 아니다. 어
휘 수가 많은 걸로 언어의 장단점을 따지자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는 에스키모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낱말과 문장의 차이가
모호하기 때문에 낱 말의 숫자가 단연 제일 많기 때문이다. 정말로 어휘의 수를 늘리고 오묘한 뜻 차이를 확실히 하고 싶다면 멀리
찾을 필요가 없다. 사투리에서 찾으면 된다.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한자를 쓰는 이유가 어원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분명히 의 미있는 주장이다. 어원을 알면 새로 배운 낱말을 기억하기 쉽다. 이것은 영 어 낱말을 배울 때를 생각해 보면 알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낱말을 쓸 때 어원을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쓰는가? 일상의 쓰임이 더 중요하다. 영어에서 도 한번 배운 낱말의
어원을 따져가면서 글을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다만 배울 때 한때 뿐이고 그것도 다 똑같은 로마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지금 예로 든 영어는 결코 우리가 본받을 필요가 없는 언어라는 것이다.-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영어가 열등한
언어라는 것 은 아니다.-영어는 오랫동안 라틴계 민족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라틴어 어원의 낱말이 많다. 이것을 예로 들어
우리말에서도 한자어를 정당화하려 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영어 쪽에서도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왜 어원을 알면 새 낱말을 배우기 쉬운가를 생 각해 보자. 결국 낱말들 간의 체계를 알고 그 낱말을 배우기 때문에 기억하
기가 쉬운 것이다. 즉, 체계적으로 새 낱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어머니라는 낱말이 있다고 하자,母라는 뜻이 같은
한자어가 있다. 과연 왜 일상적으로 쓰는 낱말과 혼자로는 결코 쓰지 않는 한자어가 둘다 우리말 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 과연
체계적인가? 왜 일상에서는 우리말을 쓰다가 새 낱말을 만들때면 전혀 일상에서 쓰지 않는 한자어를 쓰는가? 이것은 우 리말의
체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미 한자어를 쓴다는 것 자 체가 우리말의 체계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한자를 써가며 한자어 간의 체계성만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 물론 지금 당장에는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마약과도 같아 결국 우 리말의 발전을 막을 것이다. 계속 비체계적인 우리말 낱말들이 양산되는 결 과만 낳을 뿐이다. 이미 한자말과
토박이말의 이중 체계 자체가 체계성이라 는 것은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에스페란토는 배우기가 쉽다. 왜냐 하면 기초 낱말과
복잡한 합성어 사이에 분명한 체계가 서 있기 때문이다. 에스페란토에는 일상어에서 한 낱말이 쓰였다면 전문적인 합성어나 파생어 라고
하여 그 일상의 기초 낱말과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토박 이말과 한자어의 이원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이 이원
체계에 서 벗어나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하여 포기한다면 우리말에 과연 희망이 있을 것인가? 덧붙여 이야기한다면
영어에서도 점점 더 새 낱 말을 만들 때 라틴어 어원의 말 대신 앵글로색슨 계열의 말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라틴어 어원이라고 하여 특별히 다른 표기법을 쓰 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명심하기 바란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글자와
발음기호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 보겠다. 글자 는 물론 발음기호가 아니다. 그러나 박경범 님의 말처럼 글자와 발음기호와 는 전혀
상관없어도 되는 별개의 것은 물론 아니다. 도리어 글자를 이루고 있는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음기호로서의 측면이다. 글자에는 관
습이라는 측면도 있다. 도저히 글자는 입말의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고 따 라간대 봤자 혼란만 일으키기 때문에 입말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더라도 관습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점이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어디 까지나 발음기호로서의 측면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관습을 언제까지 따라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맞춤법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 이 제때 안되고 결국
때를 놓쳐버린 대표적 예가 영어의 철자법이다. 영어 의 엉터리 철자법은 숱하게 비난을 받아왔지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영어에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어서 개혁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결코 영어의 우수함 따위가 아닌 것이다. 중국의 한자의
경우는 말할 필요 도 없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영어의 철자법을 비판하면서 북한의 한글만쓰 기를 칭찬했던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물론 글자에는 발음기호나 관습의 요소 말고도 읽기와 쓰기에 관한 측면도 있다. 글자는 읽기와 쓰기도 편리 해야 한다. 한글은 아직
이 측면으로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 어쨌든 발음 기호가 반드시 필요한 글자체계는 우수한 글자체계가 아님을 기억해라. 한자의
단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한정도 없다. 물론 한자를 전혀 쓰지 말고 배우지도 말자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어로 과
거의 유산으로 배우고 쓰자는 말이지, 우리말을 적은 문장 중에 한자를 쓰 자는 것은 아니다. 사족으로 가로쓰기,세로쓰기에
대해 이야기 좀 해 보겠다. 분명히 세로쓰 기에도 장점이 있다. 따라서 세로쓰기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쓰라고 하는 말은 약간의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신문에 세로쓰기를 하는 것은 일기를 세로쓰기로 쓰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단위라는 것이 표준화가 필요한 것
과 마찬가지 이유다. 세로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가로쓰기에 어색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둘다 익숙해지기는 어렵다. 당연히
표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신문의 가로쓰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경범 님이 쓴 글 중에 는 말도 안되는 소리도 있었다.
도대체 위에 있는 글이 밑에 있는 글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은 어떻게 한 것일까? 극히 주관적인 경험일 뿐이다. 나는 한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다.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말을 하면 전부 다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 면서도 한자섞어쓰기를 하자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다. 옛것을 못잊어서 그 리워한다든지, 우리 것에 대한 비하가 몸에 밴 사람이다. 옛것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옛것이 현재의 우리 삶을 방해한다면 과감히 떨쳐 버 릴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수주의를 경계하는 것도 좋다. 우리 것에
대한 비하만 없다면. 우리말을 사랑하는 것도 옳은 방법이 필요하다. 어처 구니 없는 방법으로 우리말을 사랑한다면 무관심한 것보다도
못할 것이다.
덧말:박경범 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로마자를 글에 섞어 쓰는 것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사대주의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