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글전용론 오해

한글빛 2005. 7. 4. 03:49
 
`한글 전용론`의 몇 가지 오해 1995-10-01 01:10
카테고리 : 1995년 큰마을 이야기 http://blog.paran.com/hitelplaza/876889
 글출처: 큰마을[plaza] 큰마을
 글쓴이: 강경수[kangksoo]


== '한글 전용론'의 몇 가지 오해


95. 10. 01 (일)


안녕하십니까? kangksoo 강경수입니다.
전번에 "왜 한자 교육이 필요한가"에서 간단히 언급하긴 했지만,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을 몇 가
지 지적하고 싶습니다.

(1) '한문'과 '한자어'를 자꾸 혼동해서 사용하는 습관이 있습니
다.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의도적인지는 제가 잘 모르
겠지만, 한문과 한자어는 우선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
날 '한문' 문헌에 보이는 "子曰... 운운..." 하는 글월을 오늘날에
도 일반 사람이 계속 익혀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제 눈에도 시대
착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벌써 이 글에서도 쓰이고 있는 '교
육' '필요' 같은 말들은 이른바 '한자어'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항
상 구별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 한자어 가운데는, 오랫동안 쓰여져서 아예 우리말로 굳어진
것, 일본식 한자어나 일본에서 들어온 학술 용어, 한자를 새로 조
합해서 만든 용어 등 다양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한자어들
을 한데 뭉뚱그려 모조리 '중국 말'이라고 부르는 건 도식화치고도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글에서도 보이는 '교육' '필요' '습관' 같은
말은 거의 우리말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습관' 대신에
'버릇'이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생
긴다면, 그렇다면 저에게 '습속(習俗)' '습성(習性)' '관습(慣習)'
'풍속(風俗)' 같은 말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알려주기 바랍니다.

(3) 저는 한자 교육은 (여러 측면의 교육적인 필요에 따라) 절실
히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문제와, 한글을 사랑하고 우리
말을 풍요롭게 발전시키자...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
입니다. 지금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건 '오로지 한글로만 표기하
자'라는 주장입니다. 전번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캠페인은 일종
의 '방법론적'인 선택이지 원칙적인 차원의 주제라고는 보지 않습
니다.
한번 실제로 국어사전에서 '대가'라는 말에 얼마만큼의 한자어가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흔히 쓰이기로는 '代價' '對價' '大家'
정도지만 그 밖에도 특수한 용어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일반 생
활에서야 문맥상으로 이해하면 그뿐이지 별다른 오해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이를테면 법전 같은 데에다가도 이걸 한글로 그냥 표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거의 넌센스에 가까운 오만함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4) 한자를 그냥 노출시킨 채 글을 쓰는 풍토가 일부 아직도 남
아 있습니다. 일간 신문, 관공서, 그 밖에 특수한 학술서 등. 여기
에도 여러 가지의 이유와 역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합리적인 근
거가 있는 것도, 또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일종의 식민지 유산인 경
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라면 괄호 안에 한자를 함께 쓰는 걸로 굳
어졌고, 또 그런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중입니다. 한자를 노출시키
는데다가 어려운 '문어체' 표현을 많이 쓰는 글쓰기는 점차 사라질
거라고 전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생활의 스피드와 엄청
난 정보량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싣는 표현 방식은 사라져
가게 마련입니다(예컨대 특별한 사상적인 깊이를 담은 詩 같은 데
서는 비교적 많은 한자어가 쓰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변화를 염두에 둔 상황에서 '한글 전용론'을 주장
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한자 교육'은 넓은 의미에서 인문 교육의 일종입니다. 이를
테면 유럽의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
다. 아니 우리에게는 그 이상으로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정
도의 가벼운 글을 쓸 때조차도, 여기에 쓰이고 있는 한자어들의 뜻
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된 '우리말'이 나올 수 없
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한자어들은 이미 우리말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주기 바랍니다.

(6) 이를테면 '한겨레신문'에서는 5년 이상 한글로만 썼는데도
특별히 그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경우가 거의 없었지 않은가? 한
글만 쓰게 되면 저절로 우리말의 원리에 맞는 표현 방식이 더욱 개
발되고 보급되지 않겠는가?
매우 옳은 지적입니다. 저로서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일간 신
문에서 굳이 한자를 그대로 노출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
다. 아마 일간 신문에서도 조만간에 한자는 괄호 안으로 들어갈 걸
로 내다봅니다.

(7) 제가 지금 관심을 갖는 주제는 '한자 교육'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한글 전용론'에서 관심을 갖는 주제는 '한글로만 표기하
자'라는 표기 방법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주제는 전혀 다른 차
원의 이야기가 아닌가?
바로 그렇습니다. '한자 교육'을 시키는(또 자기 스스로 훈련하
는) 문제하고 '한글로만 표기하자'라는 캠페인은 물과 기름의 관계
같은 게 아닙니다. 서로 같이 어울릴 수도 있는 주제입니다. 왜냐
하면 한자 교육은 일종의 원칙적인 성격의 논이이고, 한글 전용론
은 일종의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뭐 딱히 반대될 만한 주장은 아
닙니다.
그런데도 왜 굳이 '한자 교육'을 강조하면서 '한글 전용론'에 이
의를 제기하는가? 예를 들어, "신문이나 이런 통신상의 게시판에서
한자를 그대로 노출시키지 말자."는 식의 캠페인에는 얼마든지 저
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글쓰기에 한글로만 쓰기로
하자는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
니다.

(8) 여러 역사적인 경로를 통해서, 특히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필요 없이 우리말을 한자어로 바꾼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율촌(栗村)'이란 마을 이름을 '밤골'(옛날에는 그렇게 썼습니다)
로 고치자 식의 이야기라면 저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한 일간 신문에서 한자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거나, 쓸데없이
일본식 학술용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에도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한글 전용론이 매우 위험한 독소로 변할 수 있다는 염
려가 드는 경우는, 급기야는 '한자를 쓰면 매국노'라든가 '한글로
만 글을 쓰는 행위가 애국적'이라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컴퓨터
라는 단어를 셈틀로 고쳐야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 날아오를 때입
니다. 저로서는 터무니없는 국수주의 이상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우선, 기존의 우리말을 한글로만 표기하자라는 슬로건과, 새로운
용어를 한글로 만들자라는 주장은 전혀 다른 이야깁니다. 위의 예
에서 '컴퓨터-->셈틀' 같은 예가 바로 후자의 경우인데, 여기에는
상당한 검토와 논란이 필요합니다. '컴퓨터'라는 말은 (서양에서
건너온 많은 학술용어들이 그렇듯이) 라틴어에서 따온 것입니다.
저로서는 쉽게 말해 '컴퓨터는 컴퓨터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이런 문제는 그렇게 쉽사리 단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이런 식의 주장은 한글 전용론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흐름에 속합니
다.
더 중요한 건, 어떤 특정한 학문(국사학이나 철학, 경제학, 인류
학 등의 인문계든 물리학이나 수학, 기계공학, 의학 등의 자연계
든)에서 쓰이는 학술용어는 대부분 한자어나 영어로 돼 있다는 사
실입니다. 어떤 경우는 한자어 자체가 특수한 유래를 갖고 있기 때
문에 한자만 그냥 합성해서는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철학, 경제
학 등). 또 다른 경우는 한자만 합성해도 대략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국사학, 인류학, 수학, 기계공학 등). 특히 한글 전용론
자의 반론 가운데 앞의 사례를 몇 가지 든 것으로 학술용어들을 도
매금으로 떠넘기는 경향이 있던데, 그런 식의 도식화는 몇몇 궤변
론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며 학문하는 태도에서는 금기 중의 금기
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실상 대부분의 한자어 학술용어
들은 그 한자의 뜻만 제대로 알면 대략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 것인
지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된 학술용어의 예를 들어보면, 한글 전용론의 위험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예가 선뜻 생각나진 않지만, 이
를테면 '정보'라는 뜻의 'information'을 '인포메이션'이라고 표기
한다고 칩시다. 제가 봤을 때는 'information' 아니면 '정보(情
報)'이지, '인포메이션' 쪽은 적절한 방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한글 전용론의 주장에서 이따금 이런 식의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더 쉬운 예로, 이를테면 '잠재심리'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
역학'이라는 학술용어가 있다고 칩시다. 한자로 이 말들을 썼을 때
그걸 읽을 수 있는 사람하고 못 읽는 사람하고 과연 누가 이 개념
들을 쉽사리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두 번 언급할 필요가 없
으리라 여겨집니다.

(9) 학술용어들을 전부 우리말로 바꾸면 된다고요? 매우 낭만적
인 주장이긴 한데, 그에 못지않게 매우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한
번 실제로 어느 한 분야에서건 그런 작업을 해보기 바랍니다.

(10) 제가 되풀이하여 한자 '교육'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말하자
면 한자를 익히는 건 다분히 '교육적인' 의미가 크다는 걸 강조하
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되풀이하여 언급하거니와, 일반적인 대중
사회에서 한자를 노출시키는 현상을 깊이 있게 비판하려는 노력은
매우 필요합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려는 노
력과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번 되풀이하여 강조하거니와, 그런 노력이 '한자
를 익힐 필요가 있다'는 요청을 몰아낼 수 없다는 그 한계 또한 명
심해 주길 바랍니다. 너무 지나친 도식화는 많은 경우에 무리가 따
르게 마련입니다. '한글 위주로 쓰자'라는 건강한 캠페인 수준에서
계속해 나간다면, 아마 지금보다도 더 많은 지지자들을 얻을 수 있
을 것입니다.

(11) 이 글은 주로 몇 가지 논의 주제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취
지에서 쓴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은 순전히 저 개
인적인 의견이므로, 다른 견해도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급한 수준에서의 건강한 비판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
다. 좀더 논의가 진전되어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일정한 선이 제
시되길 저 자신도 바라고 있습니다.

>> kangksoo 강경수


[추신] 공병우 박사나 이오덕 선생님이나 매우 존경할 만한 분들
이라는 데 대해서는 아무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그
분들을 스승으로 삼고 싶을 생각은 전혀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
립니다. 이를테면 전혀 기독교 신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기
독교식 언어를 구사하는 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