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님이
2000년 05월 08일 09시 09분에 남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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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내 일기, 국운회 초창기 |
국어운동 대학생회 초창기, 1968년 내 일기
우리는 국어운동 학생 연합회 창립 전부터 각 대학이
연합해서 활동을 했다. 그 때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다. 그 때 주로 내가 서울대나 연세대로
찾아갔다. 그 때 추억을 되살리는 뜻으로 내 일기 며칠치를 옮긴다. 연세대 로 정중헌님을 만나러 갔으나 못만나고 새 대표가 된
강창민 님을 만났으나 그도 바로 군대에 가게 되어 후배인 최노석님 이 새 회장이 되어 연세대도 활기를 되찾았고, 고려대도 박노
용 대표가 군대에 가게 되어 어렵게 되었다가 김명학님이 새 대표가 되어 함게 활발하게 뛰었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 때가
그립고 동지들이 보고 싶다.
1968.4.9
서울대에 갔다. 또 비가 왔다. 다방에서 봉원군을 만나 간단한
현상 문제를 의논하고 공병우 타자기 회사에 들러 헤어졌다. 다음 주 쯤 가두 간판 계몽 활동을 4개 대학 합동으로 하자는
의논을 했다. 봉원은 내게 연대 정중헌형에게 연락 책임을 부탁 했다. 타자회사에 선언문을 부탁하기 위해 초안을 써달라는 것
이었다. 그저께 퇴계로 해성 다방에서 우리 학교 회원 포섭을 위한 만남이 있었고 또 오늘 명동 근처 방초 다방에서 우리 학
교 총학생회장에 출마하겠다는 회창이를 만나서도 국어운동학 생회 지원을 부탁했다. 어디서나 직업의식이 나타난다. 할 수 없
나보다. 만나는 사람마다 국어운동 부탁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 다. 좀더 힘내고 머리를 써야겠다.
4.10
아침 일찍 집안 일 돌보고 내 학교로 가지 않고 연세 대학으로 직행했다. 물론 수업은 빠졌다. 어떤 일이고 잘 하려면 그
사람 의 시간과 돈과 정신력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나는 나의 희생의 대가를 어디에 바라진 않겠다. 따뜻한 봄날
연대의 교정은 정말 화창했다. 여학생이 우리 학교 에 비해 많았다. 무엇인가 잘 해야겠다는 각오가 섰다. 서울대는 몇 번 갔는데
연대는 처음이다. 연대 정형을 만나지 못했다. 학 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쪽지를 써 놓고 왔다. 그런데 봉 원군이 행사에
대한 자세한 의논을 하지 않고 무조건 따르라고 한다. 두고 볼 일이다. 지도 교수 문제와 학교 모임 등록 문제가 머리를 아프게
한다.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해서 또 믿었기에 하 는 고생이다. 나는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았다. 나는 나대 로 살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인지도 모른다.
4.17
지난 토요일에는 소공동 대호 다방에서 고대 박노용, 서울대 봉
원군과 만나 앞으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의 앞에는 가지가지 풍 랑이 예상되고 있다. 공병우 타자 회사에 다음 행사에 쓸 회칙,
취지문 부탁한 것 받아왔다. 정말로 감사했다. 그분들의 앞날에 행운이 많길 빈다. 다음주 고대, 연대, 서울대 우리 학교가 만나
간판 계몽과 한글전용 호소할 계획이다. 오늘 우리 학교 회원들 이 모여 김성배 지도교수님 모시고 말씀 듣다. 앞으로 불굴의 투
쟁을 다짐했다. 김교수님께 깊이 감사했다. 오늘 어렵지만 참고 애쓰면 보람을 얻으리라.
4.27 .
화창한 봄 날씨. 우리 학교와 서울대, 고대 연대 국어웅동학생회 는 한글전용 거리 계몽, 한자 간판 바로잡기 운동을
나셨다. 동 숭동 서울대에 모여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하고 거리로 나갔다. 패를 나누어 버스 안에서, 거리에서, 지하도에서,
다방에서 우리 의 호소문과 선언문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간판 계몽을 했다. 나는 후배들과 광화문 지하도에서 호소문을 나눠주었다.
후배들이 챙피해 했다. 호소문을 나눠줄 때 안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인사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옷 잘 입은 사람들이 고자세로 받지
않아서 미웠다. 오늘 행사에 우리 학교가 늦게 갔지만 가장 많이 나가 열 심히 해서 흐믓했다. 우리 학교 윤진이가 홍일점
여학생으로 나가 티브이 인터뷰를 하고 라디오는 내가 했다. 난 학훈단 훈련도 빼 먹었고 힘들었지만 보람있었다. 모레부터 시험인데
공부 할 시간을 빼았겼다. 그러나 뜻있는 일이기에 후회는 안 한다.
행사를 마치고 한일관에서 식사를 하면서 중앙대
대학원장이시 고 한글전용에 앞장서시는 정인섭 박사를 모시고 말씀을 들었다. 우리 학생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장하다시며 백발이
성성하신데도 뜨겁게 말씀하셨다. 간판 정리는 각 학교별로 나누어 할 것과 한 신문사씩 책임지고 한글전용 촉구 운동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간단한 오락시간을 가졌는데 흥겹게 아리랑 노래까지 부 르시며 즐거워 하셨다. 식사후 정박사와 네 학교 대표는
다방에 가서 앞으로할 일을 얘기했다. 그리고 우리 임원들은 나오다가 한글 간판 단 집을 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려 들어가 우리 회지
를 주려니 책 팔러 운 줄 알고 처음엔 쌀쌀하게 말도 못걸게 했 다. 정말로 한국의 비극이 거기에도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
을 하기로 하고 우리 목적 달성을 빌었다. 대통령께 충무공 동상 의 한자를 한글로 써주길 아뢰고자 한다.
5.2
보슬비가 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산이 프르고 세상이 깨끗하다. 기분 좋은 날이다. 어제는 대통령께 한글전용해주십사 편지를
썼 다. 그런데 오늘 한글전용에 관한 정부 계획을 발표하는 뉴스가 나왔다. 기쁘다. 나는 [그러면 그렇지! 이제 세상이 제대로
돌아 가는 구나!]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모든 것이 제대로 될 때 가 되는가 보다. 내 머리를 써야 할 때가 오나 보다.
나는 꼭 이 루어 낼 것이다. 지난달 27일 행사 때 정인섭 박사께서 우리끼리 인사말은 "안녕하세요"하지 말고 "한글전용"이라고
하자는 말씀까 지 하시고 국어운동 노래를 지어부르자 하셨다. 세상을 만들어 가 는 것이다. 벅찬 것 같지만 다 될 수 가 있다.
어제 문환이가 자기 과 친구를 소개하면서 우리 모임에 가입하기 로 했다고 했다. 고맙다. 지난번 시험 때 양율이와 경하가 날보고
시험지에 한자를 섞어썼다고 야단이고, 안교수가 한자를 쓰라고 한 다고 불평하면서 범국민운동으로 한글전용을 추진하는 데 교수가
그럴 수 있느냐고 열냈다. 믿음직스럽고 고맙다. 모임을 잘 이끌 어야겠다. 어떤 이려움이 있어도 꾿꾿히 밀고 나가자.
5.15
어제 서울대로 봉원이를 만나러 갔다. 국운회지를 얻기 위해서이 다. 봉원이가 가정교사 집에서 쫓겨나
고향에 다녀온다고 지난 토 요일에 갔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다. 고고학과 김군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기분이 우울했다. 필시 그는
국어운동 한다고 바빠서 가정 교사로서 충실하지 못했을 것으로 안다. 애국한다는 것이 개인에 게는 피눈물나는 일이다. 그 대가를
언제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 을까. 힘을 내자고 다짐한다. 그저께는 문화방송에서 서울대 고운 이름 뽑기 심사평에 대한 좌담이
나왔는 데 봉원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가정교사하는 집에 전화하니 없다고 했었다. 그런 줄도 모르 고 ..... 내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다.
5.18
국어운동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절대로 보통 노력으로 될 일 이 아니다.
무서운 각오와 의지, 그것만이 날 성공시키고 세상을 좋게 만들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모임에
철저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철하라. 너그러워라. 조그만 것 에 집착하지 말라.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보통사람처럼 움직여선 안되겠다. 좀 더 활발하고 진취적이 고 아무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살아야겠다. 남다른 노력, 피나는 투쟁만
있을 뿐이다. 나는 각오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눈앞의 작 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고 더 넓게 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피땀 을
아끼지 않겠다고 ... 내 각오가 얼마나 갈지는 의문이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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