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강국, 한글 사용으로 이룰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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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기계화와 정보화 선구자 고 공병우 박사 11돌을 맞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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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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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운동가들이 3월 7일 공병우 박사 11돌을 맞아
한글문화원에서 기념식을 연 후 사진을 찍고 있다. ©이대로 논설위원
| 하늘나라에 계신 그리운 스승 공병우 박사님!
또 한 해가 가서
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 3월 7일 제사 날이 왔습니다. 임이 돌아가신 날을 또 맞이하니 스승님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올해도
잊지 않고 임을 따르고 모시는 젊은이들이 어제 저녁 장안동 한글문화원 사무실에서 임의 사진을 걸어놓고 묵념을 올리고 녹음된 임의 목소리를 들으며
임의 뜻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고 그리워했습니다. 임의 무덤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큰절을 하고 술이라도 한잔 따라드리고 싶었지만 무덤도 없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셨기에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누리통신에 글을 올립니다.
스승님! 올해는 가장 적은 사람이 모였으나 아주
알차고 뜻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년이 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100돌이니 잘 준비해서 온 국민에게 임의 정신과 삶을 알리는 행사를
크게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한글을 잘 사용하면 과학발전과 세계 으뜸 정보통신강국 이룰
것
이 겨레와
나라를 위해서 우리 다짐과 계획이 잘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임이 사랑한 이 나라와 겨레, 이 나라의 말글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임의 생각과 삶을 본받으면 아무 걱정이 없는데 정치, 경제, 문화계 지도자라는 이들이 얼이 빠져서 미국 말글만 섬기며 제 나라의
말글을 깔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금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고, 한글이 시간을 벌게 해주고, 우리 자주문화와 경제를 빨리 일으켜 줄
것이라 침이 마르도록 외치셨는데 아직도 이 나라 지배자와 학자들은 그걸 모릅니다. 임은 한글이 가장 과학에 바탕을 둔 글자여서 한글을 사랑하고
잘 이용하면 과학이 빨리 발달하고 세계 으뜸가는 정보문화강국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두벌식 자판과 완성형 셈틀로는
안 되고 세벌식 조합형 글 편집기여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진짜 그 말씀을 손전화에 적용하니 으뜸가는 상품이 나왔고 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글을 쓴 손전화로 떼돈을 버는 이동통신 회사 사장도 전자통신학자도 임의 말씀과 한글의 고마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임의 품안에서 만들어진 한글문서편집기 ‘한글’로 돈을 잘 버는 사장도, 그 글 편집기를 잘 쓰는 국민도 임의 생각과 고마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 기관도 회사도 개인도 거의 모두 두벌식 자판을 쓰고 있습니다. 국어학자나 전자정보공학자도 그러니 일반인이야 말할
거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반가운 일이 있었습니다. 한글을 남달리 사랑해서 저와 함께 한글사랑운동을 하는 한 전자공학자가 제게
공병우 박사가 주장한 세벌식 조합형 셈틀(컴퓨터) 글 쓰기가 옳고 좋은 것임을 이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 박사님의 선각자, 선구자
정신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해야겠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고맙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벌식 자판을 쓰는 한글학자와
국어운동가가 있고, 셈틀로 글을 쓰고 누리통신을 제대로 못하는 분들이 한글문화단체장들이 많으니 이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저 혼자는 안
되고 한글관련 단체장들이 힘을 모아야 하는데 대부분 세벌식 자판이 무엇인지 모르고 스승님의 정신과 주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니 답답합니다.
스승님은 1988년 미국에서 오셨을 때 한글단체장들과 국어운동가들이 셈틀을 잘 부려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셈틀을 선물하면서 쓰라고
했으나 그걸 쓸 줄 모르니 되돌려 보낸 걸 보시고 매우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 때 그 분은 그 뒤 바로 셈틀 사용법을 배우고 잘 활용하셨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 후임 한글단체장은 사무실에 셈틀이 없습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아 ! 스승님! 지난해 있었던
기쁜 일,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알려드린다는 게 깜박했습니다. 임을 모시고 한글운동을 할 때인 1989년 얼빠진 노태우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뺀다는 소문을 듣고 임과 제가 가장 먼저 노태우 대통령에게 그게 사실인지 묻고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고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글단체와 함께 그 걸 막으려 애썼습니다. 임이 돌아가신 뒤에도 저는 임의 뜻을 받들어 앞장서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을 힘차게
해서 이루어냈습니다.
공병우 박사님의 뜻을 이어 ‘한글날 국경일 제정’ 이루어
한글날
국경일 지정법안이 통과된 날 제가 모시고 함께 이 운동을 한 한글날 국경일 추진위원회 전택부 위원장님께 그 소식을 알려드렸더니 “한글 만세!”를
부르시며 기뻐하시더군요. 아마 하늘나라에 계신 스승님도 이 소식을 듣고 마찬가지 기뻐하시면서 “이 선생, 수고 했수다! 참으로 기쁘외다!”라고
말씀하셨을 줄 압니다. 생전에 한글 이야기가 나오면 그러셨듯이 하늘나라에 있는 전 한글학회 회장께 “허웅 선생! 소식 들었소! 아! 글쎄, 저
땅별에 남아있는 후배들이 한글날을 되살렸답니다!”라며 다른 분들께도 알려주실 줄 압니다.
스승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한글이나
과학발전에 좋은 소식이 있으면 바로 제게 전화를 해서 “이 선생, 오늘 신문을 봤소? 아 글쎄 우리 과학수준이 높아졌다고 신문에 났소! 참
기쁘외다. 빨리 보시오!”라고 어린애처럼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도 한글소식은 눈여겨보지만 과학 소식을 모르고 넘어가기에 어리둥절해
하면 답답해하시며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바로 글로 써서 하이텔, 천리안 들 게시판에 올리셨습니다.
스승님 가르침과
보살핌 덕분으로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국회의원 이름패가 거의 모두 한글로 되어있습니다. 한자 이름이 좋아서 출세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제
이름 한자가 남다르기 때문에 한자로 써야 다른 이들이 그 남다른 제 이름 한자를 알아본다는 사람, 한자가 무슨 요술방망이로 아는
지독한 한자 숭배자 몇 만 빼고 모두 제 나라 글자로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자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한자 모시기
운동까지 하던 조선일보도 거의 한글로 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민족의 얼을 뺏는 ‘영어 섬기기’
막아내야
그런데 스승님! 아주 반갑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한자를 떠받들던 경제단체와 정치인과 정부와
학자들이 영어 섬기기에 발 벗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돈만 아는 재벌들이 회사이름을 영문으로 바꾸더니 이제 정부까지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수백억 원을 들이며 영어 바람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얼빠진 사람들인데 그들이 대통령을 하겠다니 걱정입니다. 제 조상들
이름까지 영문으로 바꾸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국민이 그건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치 100해 앞에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게 살 길이고 바른 흐름이라는 듯 말입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었으니 이
영어문제 해결에 힘쓰려 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스승님! 할 말이 많지만 내년엔 온 국민에게 스승님의 뜻과 정신을 널리 알리는 일에
힘쓸 것을 다짐하고 약속하면서 줄입니다. 다시 글을 올릴 때까지 편안하소서!
한글운동가 공병우 박사는?
공병우 박사는 1906년 평안북동 벽동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평양 의학강습소에서 의술을 배운 뒤 정규학교는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1926년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38년엔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 병원
‘공안과’를 세웠는데, 당시 눈병 치료를 받으러 왔던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과의 만남이 계기가 한글사랑의 외길을 걷게
됐다.
1947년부터
한글 타자기 연구를 시작해 2년 뒤인 1949년 고성능 한글 타자기 발명한 이래 1994년 매킨토시용 무른모 한손자판을 개발하기까지 평생을
한글기계화 운동에 매진했다.
또한 ‘점자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고 서울 맹인 부흥원을
설립하는 등 시각장애인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1959년부터 1977년까지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으며, 1988년 한글문화원을 설립하여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자판문제 등을 연구했다. 바로 '자판 통일'에 대한 논의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공 박사는 결혼식을 낮에 하는 건 시간 낭비라며 반대했고, 청소 등
생활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문지방을 없애버렸으며, 사과 궤짝으로 침대를 만들어 쓰는 등 남다른 삶을 보여줬다. 또 며느리에게 폐백 인사 절하는
것은 집워치우고 악수나 한번 하자고 했던 일과, 일흔이 넘어 사진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것 등 여러 일화를
남겼다.
공병우 박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컴퓨터 통신
‘하이텔’에 한글기계화 운동과 세벌식 타자기의 장점을 알리는 글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올렸다고 회고한다.
1995년 3월 7일 공병우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족들은 "아무에게도 죽음을 알리지 말고,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기증하라"는 유언에 조용히 따랐다.
'고집쟁이'로 알려진 고인이 남긴 책으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대원사, 1989년)와 사진집 <공병우 사진집 1호, 2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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