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펴내는 사상 첫 통일국어사전인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이 지난 2월 20일 금강산 호텔에서 열렸다는(<한겨레> 19일치 1면) 보도가 있었다. 이 일은 1989년에 문익환 목사가 북쪽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박용수(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선생이 만든 ‘우리말갈래사전’을 주면서 제안하고 김 주석이 동의한 일이었으나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하다가 이제 시작하게 된 것이다. 평소 남북 말글이 하나로 통하길 간절히 바란 사람으로서 뒤늦게라도 통일맞이 사전 만들기를 시작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은 이 일이 매우 중대한 일인데 세간의 반응은 뜨겁지 않다고 아쉬워하면서 일반국민이 일상생활에서 통일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지 않은 건 일상생활에서 이 문제를 절감하지 못하는 까닭도 있지만 이 사전 발간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관심이 많은 사람도 선뜻 환영하고 축하하지 못하고 오히려 걱정하고 있다. 이 사전이 잘 만들어지기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본 문제점과 걱정되는 점을 적어본다.
사전 편찬 주체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사업의 남쪽 주관단체는 사단법인 ‘통일맞이’란 통일운동단체이고 북쪽은 조선언어학회란 학술단체로 보인다. 남쪽은 민간 통일운동단체로서 사전을 만든 경험이나 전문지식이 부족하다. 그래서 국어원 쪽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위원회를 꾸린 것으로 보이는 데 책임 있게 잘 만들 지 의문이다. 만약에 잘못되면 통일맞이도 국어원도 서로 책임을 미룰 수 있어 보인다. 북쪽은 전문지식과 경험이 많고 정부기관이나 다름없는 데 남쪽은 정부기관도 아니고 여러 곳 사람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중심이 명확치 않다.
표준국어대사전 꼴이 될까 걱정된다.
1992년에 국립국어연구원(원장 안병희)은 통일을 대비해서 100억원을 들여 통일국어대사전을 만든다고 했으나 중간에 그 성격과 목적이 변질되어 표준국어사전이라 이름으로 바뀌고 온갖 잡탕말까지 올려 낱말 수만 50만을 모아 논 엉터리사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한 해에 수억 원을 쓰고 있다. 호랑이를 그린다고 했으면 고양이라도 그려야 하는데 엉뚱하게 개를 그린 꼴이었다. 그런데 남쪽의 편찬위원들을 보면 거의 국어원 중심으로 짜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국어원 쪽 중심으로 구성된 이들이 겨레말사전을 만든다니 그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미리 깊은 논의와 준비를 마치고 북쪽과 협의해야 한다. 남쪽이 자유롭고 여러 가지 의견을 가진 사회라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와 북쪽을 상대로 협상이나 협의를 할 때는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무질서해서 일 추진을 그르친다는 경험담을 들은 일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남쪽은 사전을 만드는 전문성과 통일성이 떨어지는 마당에 제각기 다른 말을 한다면 결론을 내기가 어렵다. 북쪽과 만나기 전 미리 철저히 문제를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논의한 다음에 최종안을 가지고 북쪽과 만나 들어줄 것은 들어주고 주장할 것은 주장해야 능률 있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이제 북쪽과 만난다는 의미에 중심을 둘 게 아니라 최대한 실효를 거두려고 애쓸 때이다.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남북이 맞춤법과 말본, 사전 자모 배열 순서 등 사전을 만들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먼저 남북이 갈라지기 전 맞춤법과 자모 순서와 고유한 말을 최대한 살려 쓰고 보통 사람이 알아보기 힘든 한자말과 외국말은 될 수 있으면 버린다는 원칙과 기준을 삼아야 한다. 이 사업은 외국말과 일본 한자말을 씻어내고 깨끗하고 바른 우리말을 살려서 우리말을 한층 우리말답게 만들 좋은 기회다. 표준 국어대사전처럼 낱말 수만 늘린다고 쓰지도 않는 일본 한자말을 다 넣어선 안 된다. 얼빠진 이들이 마구 들여 쓴 외국말을 통일사전에 올려선 안 된다. 이 원칙과 기준만 뚜렷하게 정하고 따르면 좋은 사전이 될 것이다.
한글학회와 사전 만든 전문가가 많이 참여해야 한다.
이번 사전 만들기에 한글학회가 직접 참여하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 한글학회는 남북이 갈라지기 전 조선어학회 후신이고 북쪽 학회도 그 뿌리가 같다고 본다. 한글학회는 또 우리 사전 만들기 원조나 다름없다. 그러니 이들이 주축이 되면 서로 합의점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또 지난날 다른 사전을 만든 회사 실무자와 전문가가 많이 참여해야 한다. 한글학회와 다른 회사 사전을 모두 검토하고 좋은 것만 고르고 가려서 가장 좋은 사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저만의 업적을 남기겠다는 욕심이나 개인감정을 부릴 일이 아니다. 또 국어운동단체의 의견을 묻고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통일사전이 될 수 없다.
셈틀과 전자통신으로 전자사전을 만들라.
남북에 사전이 많이 있고 남북 모두 전자사전이 있으며 전자통신이 잘 발달되어있다. 그러니 서로 자료를 보내주고 공개해서 전문가와 실무자가 미리 충분히 검토한 다음 양쪽의 방안을 만들고 만나서 논의하면 시간과 힘과 돈이 덜 들것이다. 지금 북쪽이 어렵다고 하지만 남쪽도 마찬가지 힘들다. 그럴수록 돈을 알뜰하게 써야 한다. 괜히 방언 연구한다고 중국에서 만나고 또 남북 지방을 오고 가는 데 돈과 시간을 보내면 유람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지금 남북 학자와 대학이 연구한 방언을 전자통신으로 서로 주고받고 정리하면 쉽다. 사전도 종이 사전은 만들지 말고 전자사전만 만드는 게 좋다. 통일 된 다음 얼마 안 있다가 사전을 다시 고쳐야 하고, 앞으로는 전자사전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만 잘 쓰면 표준 국어사전보다 돈을 덜 들이고 더 좋은 사전을 만들 수 있다.
서로 좋은 건 받아들이고 양보하라.
북쪽이 고유어를 많이 살려 쓰고 말 다듬기를 열심히 한 걸로 보인다. 그런 좋은 점은 받아들이면 좋겠다. 사전에 남쪽의 무분별한 영어 섞어 쓰기, 잘 쓰지도 않는 일본 한자말을 많이 올린 건 잘못이다. 북쪽의 정치 선전용어도 정리할 좋은 기회다. 우리 글자인 한글과 우리 토박이말을 최대한 살려 쓴다는 큰 원칙아래 서로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나쁜 건 버려라. 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은 그 원칙을 저버려서 쓰레기사전이 되었다. 서로 좋은 점을 채택하고 잘못된 건 버리는 용기와 아량을 가져야 한다. 일반 국민은 아직 남북 말법과 규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전문가만 조금 눈을 감아주고 새 말법과 규정을 만들어 교육하면 바로 자리잡을 수 있다. 완전한 일은 없고 서로 고집부리면 아무 일도 못한다.
서두르지 말고 겸손하고 정직한 자세로 사전을 만들라.
끝으로 대통령과 정부는 돈만 대고 이 일에 거들떠보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힘써주기 바란다. 남북 말글 통일에 힘쓰겠다고 많은 세금을 쓰면서 북쪽 동포는 말할 거 없고 우리 국민도 알아보기 힘든 외국말을 마구 써선 안 된다. “겨레말사전을 만들 태스크포스트팀을 만들고 로드맵을 수립 하겠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거다. 통일운동과 민족운동을 한다는 단체와 사람들이 지금 남쪽에서 우리말이 미국말에 짓밟히고 죽어 가는 것에 눈길도 주지 않는 데 큰 잘못이다. 통일 운동 단체들은 통일 사전을 만들기 앞서 미국말과 일본 한자말에 더렵혀지고 뒤틀린 남쪽 말을 다듬는 일이 먼저 할 일임을 깨닫고 이 일에 참여해주기 바란다. 사전만 덜렁 만들어 놓으면 무엇 하겠는가?
지난날 국어정책과 교육을 하는 학자와 관리들이 우리말과 한글을 더 더럽히고 죽게 했다는 말이 많다. 일본식 한자말을 한자로 쓰는 말글살이를 하자는 무리들, 1988년에 맞춤법을 바꾸고 영어 조기교육과 공용화 정책을 강행하고 통일대비 표준사전을 만든다고 엉터리 잡탕사전을 만들어서 우리 말글살이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학자와 관리들은 심판하고 겨레통일사전을 만드는 데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국민의 피땀어린 세금만 낭비하고 엉터리 사전만 내놓게 된다. 그들은 우리말을 지키고 빛내는 일을 하는 국어운동단체가 그러면 안 된다고 건의하고 호소해도 듣지 않고 남북 말글이 더 뒤틀리게 만들었다.
2003년 9월 18일치 매일경제신문에 “112억 들인 정부의 표준국어대사전이 국어 망친다”다는 기사 제목이 나왔고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지금 또 해마다 수억 원을 들이고 있다. 45만 낱말을 올린 한글학회 사전보다 더 많은 50만 낱말을 올리려다 엉터리사전을 만들어 다시 통일사전을 만든다고 나서게 되었고 또 세금만 쓰게 되었다. 나는 1992년 국어연구원이 통일대사전(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든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문제점을 말하고 남북이 만나 할 일이니 서두르지 말라고 강력하게 반대한 일이 있는데 이들은 무시했다.
이번 겨레말사전은 남북이 더 많은 돈과 힘을 들여 만들게 될 터인데 사전이 나온 다음에 돈만 날리고 “겨레말사전이 겨레말 망친다”는 소리가 나와선 안 된다는 마음에 바쁜 시간을 내어 의견을 적었다. 지금 같아서는 제대로 된 사전이 나올 지 의심이 가고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이번 겨레말사전을 만드는 분들은 더 마음이 넓고 겨레와 나라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분들이니 내 충정을 이해하고 오해하지 않을 줄 알고 관심을 보인 것이니 좋게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