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문화재청은 세종대왕을 똑바로 모셔라!

한글빛 2007. 11. 30. 10:12

세종영릉에서 세종임금은 통곡한다

[고발] 누더기 세종영릉을 만든 문화재청

 

 

최근 우리는 세종임금에 대한 흠모의 정으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답사를 했다. 세종임금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이 아니던가? 먼저 그 세종임금이 잠들어 계신 여주 영릉(英陵)을

살펴보기로 했다. 더위가 한창인 8월 7일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우리의 영릉행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자주 찾지 않았던 우리의 탓도 있었겠지만 고속도로

나들목을 나선 뒤 한참을 가도 영릉 팻말이 없어 찾아가는 데 애를 먹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세종임금을 여주의 인물이라며, 여러 가지 행사를 하지만 안내 팻말부터 이렇게 소홀하다면 문제가

있을 터이다.

 

 

  세종영릉 들머리엔 토종꽃은 없고, 외래꽃만 보인다.(왼쪽) 정문 기둥엔 치우천왕

  상을 등으로 가려놓았다. ⓒ 김영조

 

 

 세종영릉 복원유물 둘레에 높은 울짱 (철책)이 둘러있어 유물이 가려진다. ⓒ 김영조

 

우리나라 최고의 성현 세종임금이 잠들어 있는 영릉 들머리에 가자 우선 보이는 것은 토종 꽃들이

아니라 외래종 꽃들만 보인다. 대문 기둥엔 치우천황상을 붙여놓았는데 그 일부가 등으로 가려져 있다.

그렇게 한 까닭을 알 수가 없다. 가리려면 붙여놓지나 말지.

 

안으로 들어가서 복원해 놓은 천문, 과학기구를 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문, 과학기구가 아니라

그것들을 막아놓은 울짱(철책)이다. 무려 90센티미터의 높이로 천문, 과학기구를 가려놓으니 주객이

전도된 꼴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도 자주색 짙은 빛깔이니 더욱 가관이다. 관람객이 들어가지 못하게

보호하려는 목적이겠지만 50센티미터로 해놓아도 들어갈 사람을 없을 텐데 이렇게까지 한 까닭은

무엇일까?

 

어쨌든 천문, 과학기구를 돌아보자. 천문관측기기인 간의(簡儀), 소간의(小簡儀), 한해의 길이와

24절기를 알기 위한 규표(圭表),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水標)를 돌아본다. 그리고 만난 것은

오목해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이다. 그런데 이 오목해시계도 뭔가 이상하다. 자세히 들여다 본다.

분명히 그려있어야 할 12지신 동물 그림이 없다.

 

 

 세종영릉의 오목해시계는 일반 백성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그려진 12지신 그림이

없다. ⓒ 김영조

        

 

 

 세종영릉의 정남일구는 아래 쪽에 쇳조각을 대놓아 보기가 흉하다. ⓒ 김영조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놓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놓았다.” 세종실록 77권 19년(1437년) 4월 15일 내용이다. 이를 보면 분명히 세종임금이

글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12지신 그림을 그려넣고 쉽게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2지신 그림이 없는 복원을 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뒤에 보고 확인한 것이지만 덕수궁,

창경궁, 지하철 경복궁역, 서울 세종대왕기념관, 아산 호서대학교에 복원한 것들도 모두 그림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목해시계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해시계인 정남일구에도 큰 흠이 보인다. 아래쪽에 고정하려 한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쇳조각이 붙어 있다. 복원한 것과 다른 제질, 색깔로 눈에 띄게 쇳조각을 붙인

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문화재에 대한 감각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혼천의 따위를 돌아 최초의 자명종 시계 자격루에 다가섰다. 그런데

자격루가 왜 이리 허전한가? 원래 장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정해진 시각마다 십이지신 모양의

나무인형이 팻말을 가지고 나와 시각을 알려주고 종, 북, 징이 저절로 울리도록 설계된 자동시보장치가

있었다. 뛰어난 기술을 토대로 이룩된 하나의 자동화 시스템인데 과학기술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지만 오늘날에 평가해도 매우 탁월한 장치라고 한다.

 

 

 세종영릉의 물시계(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가 없는 엉터리다. ⓒ 김영조

 

 

 최근 고궁박물관에 새롭게 복원한 자격루는 오른쪽에 자동시보장치가 있다. ⓒ 김영조

 

그런데 여기 복원한 것은 인형이 나와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시보장치는 생략하고, 그저 파수호, 수수호,

그리고 부전 등 시계장치만 있다. 자격루에서 가장 중요한 자동시보장치를 빼놓다니 답답한 노릇이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세종 때 만든 자격루는 제작된 지 21년 만인 단종 3년(1455)부터 자동시보장치가

고장이 나 쓰지 못했다. 어가가 부서진 사건으로 파직당한 장영실 대신 고장 난 자동장치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장영실을 잠시 반성하게 한 뒤 다시 중용했다면 더 큰 공적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후 장영실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관노의 자식이란 것

때문에 사대부들의 견제가 강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 덕수궁에 있는 자격루는 중종 31년(1536)에 만든 것으로 시계장치만 있고, 자동시보장치가 없는

것인데 이후 복원된 것들은 모두 이를 토대로 한 것이란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에 건국대 남문현 교수를 중심으로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자격루를 복원하여 설치했는데 11월 28일부터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다는 소식이다.

 

 

 

 세종영릉의 세종대왕 능역 정화비문“에는 나라에 독특한 글자 없음을 크게

     한탄하시어….”라는 엉터리 글이 쓰여 있다. ⓒ 김영조

 

 

 세종영릉 세종대왕기념관 들머리의 훈민정음 해례본 설명문, 평어체와 높임말이

 섞여있다. ⓒ 김영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끝일까? 아쉽게도 아니었다. 한편에서 있는 세종대왕 동상에 다가갔다. 동상

아래쪽엔 ‘세종대왕 능역 정화비문’이 있다. “나라에 독특한 글자 없음을 크게 한탄하시어….” 뭐라!

세종임금은 독특한 글자 없음을 한탄한 것이 아니라 중국말과 다른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할 글자가

없다는 것을 한탄하신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을 이렇게 써놓다니….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 분부를 내리셨다. ~ 이 뜻을 받들어” 아무리 군사독재 시절의 작품이라

하지만 아부의 정도가 심했다. 여기에 “1975년”을 ‘一九七五년”이라고 한자를 써놓았다.

 

또 있었다. 세종대왕기념관 들머리엔 “훈민정음을 왜 창제했을까요?”란 글이 붙어 있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본> 첫머리 번역을 앞 문장은 “~많다”로 평어체로 쓰고, 뒤 문장은

“바랍니다”라고 높임말을 썼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했을까?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세종영릉을 떠난다. 그 뒤 우린 경복궁 흠경각에도 가봤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천문학자인 김돈이 지은 흠경각기(欽敬閣記)를 보면 세종 20년 정월에 흠경각(欽敬閣)을

완성하여 그 안에 물시계를 설치하였다고 적혀있다. 곧, 강녕전 서쪽에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한 것이다.

 

 

 

  ▲ 경복궁 흠경각에는 원래 옥루기륜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복원된 지금의

  흠경각에는 옥루기륜이 없다. ⓒ 김영조

 

흠경이란 말은 ‘농경사회 지배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인 하늘을 보고 농경에 필요한 절기를 정하여

알리는 일’인 ‘관상수시(觀象授時)’를 실천하는 집이란 뜻이다. 세종은 흠경각을 편전인 천추전 가까이

짓고, 수시로 드나들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여 농사지을 때를 알아 백성에게 알려주고, 하늘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정치의 본보기로 삼았었다.

 

또 세종은 흠경각루에 갖추어놓은 춘하추동의 풍경과 7달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며 백성 사랑과 농사의

중요성을 늘 되새겼다. 세종은 백성을 끔찍이 사랑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경복궁의 흠경각엔 옥류기륜이 없었다. 세종임금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잘 드러낼 수

있는 그곳엔 세종임금의 백성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광화문을 250억 원이란 큰돈을 들여 다시

복원한다는 문화재청이 그에 견주면 아주 적은 돈으로 제대로 된 복원이 가능한 흠경각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올바른 철학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세종영릉의 문제점을 문화재청에 질의했지만 세종대왕유적관리소장으로부터

 답변이 왔다. ⓒ 김영조

 

 

우리는 이런 문제점들을 정리하여 지난 10월 25일 문화재청에 정식으로 질의를 했다. 그 뒤 여러 번의

독촉 끝에 한 달여가 지난 11월 22일이 돼서야 문화재청이 아닌 세종대왕유적관리소장으로부터

답변서를 받았다.(아래 답변서 전문 참고) 하지만, 주무관청이 아래 관청으로 책임을 떠넘긴듯한 모습

그리고 답변서의 내용이 지극히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세종대왕 동상에 있는 비문의 문장 중 “독특한”이란 낱말과 세종대왕기념관 안내문의 문장 오류,

그리고 과학유물 주변 철책 높이가 높아서 보기가 흉한 것, 정남일구 아래쪽을 쇠토막으로 보완한 점은

시급히 고쳐야 할 중대한 문제이다. 또 앙부일구 복원품에 12지신 그림이 없는 것과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 설치문제도 참고 정도로 넘어가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이 전해준 문화유산, 그 가운데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세종대왕과 관련된 유적,

유물을 이렇게 소홀히 대하다니 그것이 어찌 문화재청이 취할 바인가? 국민의 질타가 있기 전에

문화재청은 좀 더 성의있는 자세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덧붙임

11월 28일 드디어 국립고궁박물관이 완전히 개관되었다. 그동안 1개 층만 임시로 문을 열었었는데 이제

3개 층을 모두 연 것이다. 개관기념으로 개관일인 11월 28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한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자격루를 완전히 복원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우리는 11월 28일 자격루를 보러 급히 고궁박물관에 갔다. 그 자리에서 자격루 복원의 산파역을 기꺼이

맡은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관리과 서준 선생과 복원에 직접 참여한 건국대학교 남문현 교수, 연세대학교

나일성 명예교수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듣고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문화재로 답사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어지는 기사에 담을 예정이다.

 

공동취재 : 김슬옹 목원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