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스승님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한글빛 2012. 5. 16. 09:25

큰 가르침 주신 잊지 못할 스승님
[스승의 날] 최갑수·허웅·공병우·전택부 선생님, 존경합니다
 
이대로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이기도 하다. 나라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 그리고 이 날을 ‘세종날’로 정하고 그 분 무덤이 있는 영릉에서 대통령이 참석해서 그 분을 기리는 나라 행사를 한다.
 
▲주시경 선생님을 배경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는 대통령이 참석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한번 참석한 뒤 대통령들은 참석하지 않고 문화부장관이 참석해서 이 행사를 했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훌륭한 스승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태우, 이명박 대통령은 한 번도 참석하지 않고 꽃만 보내고 문화부장관이 그 행사를 진행하더니 올해는 김황식 국무총리께서 참석을 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올해는 처음으로 내 스승 이야기를 하련다. 스승의 날에 먼저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과 주시경님이 떠오른다. 이 분들을 본받고 기리려고 나는 일생을 바쳤다. 그런데 나를 가르쳐주시고 모셨던 내 개인 스승님들 이야기는 처음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선생님들을 만났지만 초등학교 5,6학년 담임이셨던 최갑수 선생님과 한글사랑 운동을 하면서 모신 허웅, 공병우, 전택부 스승님을 잊을 수 없다. 지난날 많은 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을 받았지만 오늘은 이 분들 가르침과 고마움을 되새기련다.

1. 초등학교 때 일기를 쓰게 하신 최갑수 선생님

▲초등학교부터 군대시절까지 쓴 일기장 일부.
요즘 나이가 들면서 옛 자료들을 정리하다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 날마다 일기를 쓴 것이 매우 큰 보물이었다. 그런데 내가 일기를 쓰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 최갑수 선생님께서 일기를 쓰게 하고 날마다 검사를 하고 도장을 찍은 걸 보면서 선생님 가르침과 사랑이 떠올랐다. 지금 그 일기장을 보니 날마다 하루를 되돌아보고 더 잘할 것을 다짐한 것들로서 반복되는 일을 쓴 것이라 우습지만 그 게 주 버릇이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올 때까지 스스로 일기를 쓰면서 내 삶을 만들고 이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갑수 선생님께서 나에게 부반장을 시키시고, 교내 웅변대회를 나가게 하시고, 여러 학교 참석하는 미술대회도 나가게 하시고, 졸업식 때엔 내가 답사를 쓰고 읽게 하셨으며, 교육청장 상장까지 주신 것이 내가 자신감을 가지고 오늘까지 살게 한 원동력이고 밑바탕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스승님의 고마움을 잊고 있었으나 이제 90살쯤 되셨을 스승님이 살아 계신지 알아보고 찾아 뵐 것을 다짐하면서 이 글로 죄스러움을 대신한다. 
 
2. 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 허웅 지도교수님

▲ 1968년 대학생 때 국어운동을 할 때 찍은 사진. 오른쪽 끝이 이대로, 그 다음이 허웅 교수님.
내가 허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8년 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 활동을 할 때이다. 허 교수님은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님이고 나는 동국대 농업경제학과를 다녔으니 허 교수님의 강의나 학술 교육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허 교수님이 한글학회 회장님이 되면서 35년 동안 모시고 한글운동을 함께 했는데 많은 것을 보고 느꼈고, 분에 넘치는 사랑과 믿음을 받았다. 나는 전공도 국어가 아니고, 학교 선생이나 교수가 아니기에 한글학회나 한글운동 모임의 궂은 일은 다하고 모든 일에 앞장을 서면서도 언제나 누구에게나 무시당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허 교수님은 나를 믿으시고 걱정해주셨다. 한글단체 대표들 모두 훌륭하지만 어떤 문제가 있을 때에 허 교수님처럼 문제를 잘 파악하고 해답을 내놓지 못하셨다. 내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면 그 전에 똑 같이 고민한 것처럼 알아듣고 호응해주셨다. 그뿐 아니라 내가 집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어떻게 아시는지 힘내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내에게 잘하라고 하신다. 한글단체 대표 회의 때 다른 분들이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저 젊은 이대로 말이 맞다.”시면서 그대로 하자고 하신다. 나를 믿어주시고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내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으며 통한다고 느꼈다. 훌륭한 분이 나를 믿어주고 알아준다고 생각하니 나는 더 열심히 국어독립 운동을 하게 되었다.

3. 내가 가장 우러러보고 본받고 싶은 공병우님

▲ 공병우 박사 탄신 100돌이 되는 해에 추모식을 해드렸다. 공 박사님이 쓰신 글을 소개하는 사진.     © 사람일보
나는 공병우 박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8년 동안 모시고 함께 한글사랑운동을 했다. 공 박사님으로부터는 세벌식 타자기 자판을 눈감고 치는 것을 배웠다. 대학생 때부터 공 박사님이 훌륭한 분임을 알았지만 함께 활동하기는 1988년 미국에서 돌아오셔서 한글사랑운동과 한글기계화 운동을 하실 때였다. 공 박사님은 안과 의사이지만 한글을 기계로 쓰게 한 개척자요 선구자이시다. 미국에서 오셔서 한글운동을 하는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회장 이대로)와 한글문서편집기 연구를 하는 정래권, 이찬진님 들에게 방을 공짜로 주시며 활동과 연구를 하게 하셨다. 박사님이 82살이셨을 때이다.

겨레사랑,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글기계화 연구와 한글운동을 하시는 모습, 시간은 돈보다 더 귀하다며 시간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고 실천하시는 모습,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시는 모습을 감동이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 글을 쓰고 공부하게 해주시고, 일자리도 마련해주셨다. 얼마 전 미국 국무성에 근무한 강영우 선생도 공 박사님의 도움을 받은 분이었다. 나는 1992년 월간지 ‘여성동아’에서 내가 만난 훌륭한 분을 쓰라고 해서 “공병우 박사의 삶과 정신을 본받으면 교육, 과학, 경제 들 모든 나라문제가 풀린다.” 고 쓴 일이 있고, ‘마더 테레사’ 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4. 이 나라 큰 어른, 기독청년회 전 회장 전택부 선생님

오리 전택부 선생님도 국어독립 운동을 하면서 뵙고 함께 한글운동을 한 분이다. 전택부 선생님으로부터도 어떤 학문이나 학교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다. 돌아가시기 전 10 여 년 동안 모시고 한글운동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것이 많다. 이 분의 삶과 정신이 아름답고 따뜻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나 이 나라를 생각하고 겨레와 나라가 잘되고 하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남다르고 참되었으며 당신 이익을 생각하는 모습이 없었다. 참 어른이셨다.

▲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을 할 때 오리 선생님 댁에서 함께 찍은 사진.    
나는 전택부 선생님이 한글날국경일추진범국민위원회 회장을 하실 때 그 모임 사무총장으로서 일했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데 많은 분들이 애쓰시고 도와주셨지만 오리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안 될 일이었다. 마음 씀씀이와 말씀 하나 하나가 배울 점이었다. 내가 중국 대학에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갔을 때 내 ‘우리 말글 독립운동 발자취’란 책을 낼 때 머리글을 써주시면서 “내가 쓰고 싶었던 책을 네가 내는구나. 네 생각과 삶이 어쩌면 나와 같은지 모르겠다. 힘들어도 끝까지 그대로 가라.”시며 글을 써주시고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중국 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참된 사랑과 가르침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고 귀국하여 추모 문집을 내가 편집하고 1주기 추모식을 내가 앞장서서 해드린 일이 있다

나는 한글사랑 길에서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주고 사랑해주셨다. 훌륭한 스승님들을 모시고 한글운동을 하고 사랑을 받은 것은 큰 복이었다. 지금도 정재도 선생님이 나와 한 방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있다. 스승님들의 가르침과 사랑을 되새기며 더 바르고 참되게 살고 우리 말글 독립운동을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한다.
 
 
<이대로 논설위원(한말글문화협회 대표)>

기사입력: 2012/05/15 [10:43]  최종편집: ⓒ 사람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