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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가 1993년 한글날에 공병우 박사가 나(이대로)와 앞을 못 보는 장애인 오한중님이 함께 한글기계화 운동에 힘쓰고 있다는 보도 기사를 썼다. |
[e교육신문 www.newsedu.kr] 1990년 공병우박사는 한글사랑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 때 한글문화원 안에는 공 박사 사무실 옆에 내가 이끄는 전국 국어운동대학생생동문회가 있고 그 옆방에 이오덕 선생이 이끄는 한국글쓰기연구회가 있었다. 공 박사는 “이오덕 선생과 손잡고 한글사랑 시민운동모임을 만들면 내가 도와주겠다.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후배 대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을 넘어서 시민운동을 하려고 하던 터라 이오덕 선생과 함께 새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그 때 25 년 째 국어운동대학생회 후배들을 이끌고 한글운동을 하고 있었고 한글학회 중심으로 모인 한글단체들과 함께 한글운동을 앞장서서 하고 있었다. 이오덕 선생은 초등학교 교장을 마치고 초, 중등 선생님 중심으로 글쓰기연구회를 만들어 이끌고 있었다. 그 때 이오덕 선생이 ‘우리말 바로쓰기’란 책을 내서 인기가 대단했다. 나는 그 전에는 이오덕 선생을 알지 못했으나 그 책을 읽고 그 분이 훌륭한 분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마침 노태우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뺀다고 하고 한자단체도 조선일보 들 보수신문과 손잡고 더욱 힘차게 움직이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한글 지키기 시민운동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허웅 한글학회 회장님도 마침 잘되었다고 좋아하셔서, 한글단체 분들에게 알렸더니 서울은 말할 것이 없고 전국에서 100 여 분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부산 박홍길 교수와 김정섭 선생, 대전 유동삼 어르신과 백용덕 선생, 원주에서 14대 국회의원이 된 원광호 선생, 서울의 밝한샘,숨결새벌 선생 들 많은 한글운동가와 학자들도 참여해주었다. 이오덕 선생을 중심으로 주중식 선생과 전국 여러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참여해주어 일이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한마디로 큰 전국 모임으로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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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한글날에 중앙일보가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임준수 편집국장 들 관계자와 대담한 중앙일보 사보 특집: 나는 그 때 “한글만 쓰기 실험은 한겨레가 이미 끝냈다. 불안해하지 말라, 조선일보보다도 더 독자가 늘어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사진 속 위 가운데 사람이 글쓴이(이대로)이고 왼쪽이 임준수 편집국장이다. |
그런데 모임 이름 때문에 이오덕 선생과 한글단체 사람들 마음이 맞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 이오덕 선생은 ‘우리말바르게쓰기모임’으로 하자고 하고, 한글단체 쪽은 ‘한말글사랑겨레모임’으로 하자고 했다. 우리말을 바르게 쓰고 한글을 빛내자는 생각이기에 나는 두 이름 모두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오덕 선생은 당신이 생각한 이름을 고집했고, 밝한샘, 김두루한 선생들은 우리말과 한글을 함께 살리자는 생각으로 ‘한말글’이란 말을 꼭 모임 이름에 들어가기를 주장했다. 나는 이오덕 선생을 모시려고 했으나 모두 고집이 센 분들이라 합의가 안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발기인들이 모여서 투표로 결정하기로 해서 이름은 ‘한말글사랑겨레모임’으로 결정이 되고 대표는 이오덕 선생을 모시기로 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이름은 어떻든 간에 일을 바르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러 번 함께 일을 하자고 말했으나 듣지 않으셨다. 이오덕 선생은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일을 하려는 생각이었고, 한글단체 사람들은 한자단체와 정부에 맞서서 한글을 지키는 일을 하려는 생각이어서 함께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처음 생각한 모임은 안 되고, 내가 밝한샘 선생과 한말글사랑겨레모임 공동대표로 반쪽 모임을 이끌고 한글운동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오덕 선생은 따로 ‘우리말바로쓰기모임’을 꾸리고 따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공병우 박사님은 강력한 시민운동 모임이 되면 함께 한글기계화운동도 하길 바라고 있다가 실망해서 그 때 시작된 하이텔, 천리안 들 누리통신인들을 모아 ‘한글,나라사랑모임’을 꾸리고 한글기계화운동을 하신다. 한말글사랑겨레모임은 김영삼 정부가 한자조기교육과 영어조기교육은 하겠다면서 한글 숨통을 쥐려고 하기에 학자들 중심인 한글학회만으로는 그 숨 가뿐 싸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은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연세대 출신 최노석 후배에게 넘기고, 바모임이란 별동대를 따로 조직하고 발 빠르고 움직인다.
이오덕 선생은 그 뒤에 낸 ‘우리말바로쓰기 2권’에서 내가 도와주지 않아서 그 모임을 깨진 것으로 썼으나 실제로 내가 당신을 모시려고 애쓴 걸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1997년 얼빠진 김영삼의 세계화가 나라를 망치니 이오덕 선생이 나를 찾아와 다시 손잡고 세계화와 영어 열병에 걸린 우리말과 얼을 지키자고 하셨다. 그래서 1998년에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을 만들고 이오덕 선생과 나와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이 공동대표를 맡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나는 10여 년 활동한 한말글사랑모임을 해산하고 이오덕 선생 뜻을 살리는 쪽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1990년대 초에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지고, 김영삼 정권이 한자와 영어 조기교육을 한다고 나서고, 한자단체도 헌법재판소에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안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내는 등 한글 위기였다. 그 때 숨 가쁘게 바빴고, 공병우 박사를 모시고 치열하게 투쟁한 시기였다. 그 때 공병우 박사와 나는 해마다 4월 7일 ‘신문의 날’마다 신문사에 서재필 박사가 만든 독립신문 정신을 받들어 한글전용 가로쓰기로 신문을 제작하라고 건의문을 보내고 투고를 했다. 마침내 1995년 초에 중앙일보에서 관심을 보이고 중앙일보 편집부 조일현 차장이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그 해 한글날에 한자로 된 中央日報란 제호를 한글 ‘중앙일보’로 바꾸고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그 뒤 모든 신문이 한글 가로쓰기로 바뀐다. 참으로 기쁜 일이고, 한글역사에 빛날 큰일이었다. 모두 공병우 박사님 덕이다. 그런데 1995년 3월 7일 공병우 박사님은 돌아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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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한글문화원장은 서재필 박사가 만든 독립신문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알리는 글을 써서 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