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식 하루 전인 광복절 이른 아침, 행사 준비가 한창이던 광화문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는 지난 13, 14일 문화재청 등에 민원을 넣었다. 시복식 당일, 하루 만이라도 한자 현판 ‘門化光’을 훈민정음 해례본체로 천에 쓴 ‘광화문’으로 가리자고 건의했다. 한자로 된 현판이 십자가와 함께 150여개국으로 방송돼 수억명이 지켜보게 되리라는 걱정에서 비롯된 청원이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세계인들이 우리나라를 중국이나 일본의 속국으로 알고 있는데, 그 장면을 보는 외국인들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중국의 한자를 쓰는 나라로 여기거나 우리 글자가 없는 미개한 나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였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 한글을 가진 자주문화국가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다. 또 한글을 사랑하는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판단이기도 했다. 옳은 소리다.
- 【서울=뉴시스】위 ‘광화문’이 아래 ‘門化光’으로 되돌아오는 데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 2014-08-27
거꾸로 “아이디어는 좋으나 시간이 촉박하다”는 요지로 불허한 문화재청의 답변 또한 상식이었다.
문제는 이 한글운동가들이 덜컥 실천을 해버렸다는 사실이다. 15일 오전 7시께 기중기를 동원해 19m 가까이 올라가 현판 표면을 ‘광화문’이라는 한글로 덮었다. 한 시간 쯤 지나 ‘門化光’ 세 글자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현장 관계자들에 의해 ‘광화문’ 스티커는 철거되고 말았다. 이후 TV화면과 뉴스사진에는 시복식 제단 뒤의 ‘門化光’이 담겼다.
한세본 이대로 사무총장은 “교황은 서울 광화문 앞 큰마당에서 시복식을 했다. 왜 하필 광화문 앞마당에서 그런 모임을 가졌을까? 그곳이 대한민국의 가운데이고 얼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경복궁의 문인 광화문은 서울 한가운데 있는 이 나라의 얼굴이다. 나라 안팎의 언론이 광화문을 비추고, 한자로 된 현판을 온 세계인들이 본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다. 멀쩡하게 잘 걸려 있던 한글 현판을 떼고 한자 현판을 단 정부가 밉고 원망스럽다”고 개탄했다.
“한글은 광화문 안 경복궁에서 태어났고 광화문 한글 현판은 그 표시이며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알리는 깃발이다. 그런데 중국의 한문 식민지였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얼빠진 무리가 2010년 광복절에 그 한글 현판을 떼고 한자 현판으로 바꿔 단 것”이라고 지적했다.
- 【서울=뉴시스】‘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현장. 한글은 없다. 2014-08-27
“우리 글자가 없어서 조선시대까지 중국 한자를 썼으며 일본 식민지 때는 한자를 혼용하는 일본식 말글살이를 한 것이 분명한 역사이지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門化光’이 ‘광화문’으로 정정된 60분 남짓, 이것은 한세본에게 쾌거였다. 하지만 당국에게는 명백한 불법행위일 따름이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의 한글을 세계에 알려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면서도 “문화재보호법 규정에 따라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광화문 현판 불법 설치 사건에 대해서는 경복궁관리소가 관계법에 따라 조치할 예정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