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사진과 경력을 묻는 분들이 가끔 있어서 소개 겸 올립니다.]
이 대로의 소개서
1. 한글전용 학생운동에 앞장서다.
1963년 고등학교2학년 때 한글운동의 필요성을 깨닫고 196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양대학교 김윤경 교수님께 “대학에 가서 국어운동을 하고 싶으나 여러 사정이 좋지 않아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편지를 하니 “꿈은 이루어지니 포기하지 말라.”는 답장을 받고 대학에 들어가 1967년에 국어운동학생회를 조직하고 한글사랑운동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 군대 복부를 마치고 나와서 전국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초대 회장으로서 후배들을 이끌면서 한글사랑운동을 하다가 1989년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겠다고 하니 국어운동대학생회 후배들과 함께 문화부를 항의 방문해서 한글날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1990년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문제안 사무총장과 함께 대학생들을 이끌고 탑골공원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2. 한글이름 펴기 운동에 나서다.
1967년 서울대국어운동대학생회가 한글이름 짓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각 대학 국어운동대학생회 회원들도 한글이름 짓기 운동에 나섰다. 그 때 아버지가 지어준 李 澤魯(이 택로)란 이름 대신 ‘이 대로’란 한글이름을 스스로 지어 사용했다.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가 시행한 ‘한글이름 뽑기’에서 시상한 배 우리, 밝 한샘 님들과 한글이름펴기운동도 함께 했고, 1993년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에서 14대 국회 때부터 한자로 된 국회의원 이름패를 한글로 바꾸는 운동을 할 때 호적도 ‘이 대로’라는 한글이름으로 재판해서 바꾸었다. 16대 국회 때 민주당의 김근태, 신기남 의원들과 함께 그 당 모두의 이름패를 바꾸게 하고 17대 국회엔 모든 국회의원 90% 한글로 바꾸게 했다. 서울시의회(의장 박주웅) 와 동대문구의회(의장 신재학)의 이름패를 한글로 바꾸게 했다.
3. 한글기계화운동과 누리통신을 이용한 한글운동에 앞장서다.
1988년 한글기계화 선구자 공병우 박사가 미국에서 귀국해서 한글문화원을 열고 한글기계화 운동을 할 때 그 분으로부터 셈틀로 글을 쓰는 가르침을 받고 1994년부터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통신을 이용해 공병우 박사를 모시고 한글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 뒤 하이텔에서 활동하던 논객들이 만든 인터넷 신문인 대자보의 상임고문, 한겨레신문 교열부 차장 박해전님이 만든 참말로 논설위원으로서 지금까지 누리통신을 통해서 한글운동을 열심히 한 누리꾼 1세대다. 공병우 박사님의 한글기계화 가르침을 이어서 서정수 교수님을 모시고 한글세계화, 국어정보화 운동도 열심히 했다.
4.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다.
1990년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면서 한글과 우리말에 더 위기가 오자 시민단체인 한말글사랑겨레모임을 조직하고 공동대표로서 한글사랑운동을 하다가 1997년 영어조기 교육을 강행하며 얼빠진 정치를 하다가 국제통화기금의 경제식민지가 되면서 아동문학가 이오덕 님과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을 창립해서 공동대표로서 ‘우리말 우리얼’이란 회지를 지금까지 내고 있고. 해마다 ‘우리말 지킴이와 훼방꾼 뽑기’행사를 하면서 한자와 영어로부터 우리말을 지키는 시민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5.한자병용정책을 저지하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과 야합한 김종필이 조선일보와 경제단체 등 보수세력과 한자병용 정책을 추진하려고 해서 한글단체가 시위도 하고 세차게 반발해 막았다. 그 때 그 반대활동에 앞장을 섰으며 영어조기 교육 반대 운동에도 선봉에 섰다. 누리통신 신문에 글을 쓰고, 정부에 건의하고, 방송에서 반대 토론을 하고 한글날에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1인 시위도 했다.
6. 한글날 국경일 제정에 앞장서다.
1990년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뺄 때도 국어운동학생회 후배들과 함께 그 저지운동에 앞장을 섰고,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진 뒤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이사로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에 나섰다. 1997년 아이엠에프의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우리말이 영어에 밀려 더 힘들게 되면서 한글단체는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에 적극 발 벗고 나섰다.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추진위원회(위원장 전택부)의 사무총장으로서 국회 활동에 적극 나서서 국회에 한글날국경일제정의원모임(회장 신기남)을 조직하게 하고 2005년에 한글날 국경일 제정법을 통과시켰다. 2006년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큰잔치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서 세종대왕 어가행렬, 열린음학회, 한글날 국경일 기념우표 발행 등을 추진한다.
6.나라 밖에 한글과 한국말 보급운동에 나서다.
40 여 년 동안 한글전용운동에 앞장서서 한글날도 국경일로 만들고, 국어기본법이 통과된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한글세상이 되었다고 보고 2007년부터 중국 절강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로서 나라 밖 한글 보급운동에 나섰다. 중국 그 대학에 태권도장도 만들어 태권도를 체국과목으로 채택하게 했고, 10월에 한글문화큰잔치 행사를 2회 째 성대하게 시행하면서 2년 동안에 그 대학의 한국어과 학생이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성과를 내게 한다.
7. 세종대왕 생가 터 찾기와 한글문화관 건립에 나서다.
2006년 세종대왕생가터복원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생가 터를 찾아 이 겨레의 문화성지로 만들자고 서울시에 건의해서 서울시가 2억 원의 예산을 책정해서 그 사업을 시작하도록 했다. 그리고 문광부에 한글역사문화관을 건립해서 온 누리에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한글문화 창조의 발상지로 만들자고 건의해서 그 추진위원회 조직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한결 선생의 편지, 외솔 선생의 만남, 허웅 교수, 공병우 박사, 전택부 선생의 지도와 사랑을 받으며 1967년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43년 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글사랑운동에 매달렸으니 한글사랑 운동에 일생을 바친 셈이다.
경 력 서
1947년 충남 서산군 해미면 언암리에서 태어남
1965년 충남 예산농업고등학교 졸업
1967년 동국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 창립 초대 회장
1968년 전국 국어운동대학생회 창립 초대 감사
1968년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꽃바치기 행사 시작
1973년 전국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창립 초대 회장
1989년 한글문화원 고문
1990년 한글학회 특별회원
1990년 한말글사랑겨레모임 창립 공동대표
1993년 외솔회 감사
1994년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이사
1994년 한글지킴이 별동대 바로모임 총무
1995년 한국바른말연구원 사무총장
1996년 국어정보학회 감사
1997년 외솔회 이사
1998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2000년 한글세계화추진본부 상임이사
2002년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본부장
2004년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추진위원회 사무총장
2005년 국어단체연합 사무총장
2006년 문광부 국어심의회 국어순화위원
2006년 한글날큰잔치조직위원회 사무총장
2007년 세종대왕생가터복원준비위원회 위원장
2007년 중국 절강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
2008년 외솔회 부회장
2008년 한국어정보학회 부회장
2009년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2009년 한글문화관건립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
표창
1995년 한글학회 한글운동 공로표창
2004년 문광부장관 우리말 작가상
2006년 한글운동 국무총리 표창
2009년 외솔상 실천부문 수상
저서_ 우리말글 독립운동 발자취 (2008년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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