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6년부터 우리 글자인 한글을 썼지만 그동안 그 글자를 제대로 써먹지 않다보니 그 훌륭함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개화기에 기독교가 들어와 성경을 우리 글자인 한글로 만들어 포교하면서 한글이 서양의 로마자처럼 소리글자로서 한자보다 더 좋은 글자요, 우리가 써야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미국인 헐버트가 한글로 ‘사민필지’라는 교과서도 만들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서재필이 한글로 '독립신문'도 만들었다. 그러나 한글을 쓰는 말법과 규정이 없어 저마다 소리나는 대로 쓰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1905년 지석영이 이런 국민 의견을 모아 한글을 널리 쓰게 하자고 정부에 ‘신정국문’이란 건의를 했고 고종이 재가했다. 그 골자는 “닿소리는 △과 ㆁ을 없애 14자로 할 것, 홀소리에는 ‘· ’자를 없애고 ㅣ와 ㅡ를 합하여 ‘=’라는 새 글자를 만들 것, 된소리는 쌍서(ㄲ, ㄸ, ㅃ, ㅆ)로 표기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반대의견이 심했고 1906년에 이능화가 ‘국문일정의견’을 학부에 내면서 한글맞춤법을 연구할 정식 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가 1907년에 학부(오늘날 교육부)에 생겼다. 이 연구소는 한글이 태어난 초기에 있었던 정음청 다음으로 생긴 우리말 정책 연구 정부기관이다.
<국문연구소규칙> 제1조에 “본소에서는 국문의 원리 및 연혁과 현재의 행용(行用) 및 장래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함”이라고 되어 있고 위원장에는 학부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 위원으로 학부 편집국장 장헌식(張憲植),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 교장 이능화, 내부 서기관 권보상(權輔相), 그리고 현은(玄은)·주시경 및 학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우에무라(上村正己)가 임명되었다. 여기 학부에 일본인 사무관이 있는 것은 1904년 일본과 맺은 ‘한일의정서’ 협약 뒤부터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일본이 우리 내정을 간섭하고 있어서다.
이 연구소는 많은 회의와 연구, 여론조사 끝에 1909년에 ‘국문연구의정안’이 나왔는데 외국말을 적을 때에 쓸모가 있지만 우리말을 적는 데에는 쓸모가 적고 발음하기 힘든 'ㆅ ㅱ ㅸ ㆄ ㅹ ◇ △ ㆆ' 등의 고문자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했으며, 된소리 표기에서 'ㄲ ㄸ ㅃ ㅆ ㅉ' 과 같은 각자병서(各字竝書) 원칙을 확립했다. 종성(밭침)에 ㄷ ㅈ ㅊ ㅋ ㅌ ㅍ ㅎ 등을 사용하는 원칙이라든지 자모의 배열순서 등 국문 표기 체계와 관련된 중요 원칙을 정했으나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시행은 안 되었다. 그리고 1933년 조선어학회가 새 한글맞춤법을 정하면서 ‘·’자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하고 거의 거의 그대로 살려서 이어받았다.
아무튼 이 ‘국문연구소’는 다듬지 않은 금강석을 다이아몬드처럼 값진 보석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정부가 훈민정음(한글) 다듬기에 나선 국가기구를 만들었다는 것이 의미가 매우 크다. 이렇게 대한제국 때에 우리 글자인 한글을 살리려고 애쓰게 된 배경은 고종이 한글이 위대함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런 깨달음을 준 미국인 헐버트와 그런 정책을 주장한 지석영, 주시경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때 이런 노력을 온 국민이 이해하고 따랐다면 한글이 빛나고 얼찬 겨레가 되어 그 때에 나라도 일어났을 것이나 그렇지 못해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이제라도 그 잘못과 아픔을 잊지 말고 수천 년 동안 중국 문화와 한문 곁가지로 살면서 뿌리 내린 중국 한문 숭배 버릇과 일본 식민지 교육으로 길든 한자혼용 습관을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가 절실하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개화기 우리 말글을 지키고 살리려고 애쓴 고종과 주시경, 그리고 일본제국 식민지 때에 그 뜻을 살리려고 목숨까지 바치며 애쓴 조선어학회 분들을 헐뜯고 일본 식민지 때 길든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쓰자는 이들이 판치고 거기다가 미국 지배 속에 살아서인지 영어를 우리 공용어로 하자는 이들까지 있으니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