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사랑

한글기계화 개척자 안과 의사 공병우 박사

한글빛 2021. 4. 1. 09:38

누구나 타자기로 한글을 쓰는 세상이 열리다

 

리대로
기사입력 2021-03-31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먹을 갈아서 붓으로 글을 썼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타자기로 글을 쓰는 것을 보고 1913년에 재미 교포 이원익씨가 가장 처음 한글타자기를 만들었는데 글자판 글쇠가 80개가 되고 타자기가 너무 커서 들고 다닐 수 없고 비싸서 실제로 쓰이지 않았다. 그 뒤 재미 교포인 송기주씨가 1933년에 글자판 글쇠를 44개로 줄인 좀 더 개선된 타자기를 만들었지만 둘 다 모두 찍는 속도가 느리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찍을 때에 글자가 옆으로 넘어져 찍히게 되어 매우 불편했다. 그 때는 책과 신문이 모두 가로쓰기가 아니라 세로쓰기여서 그랬다. 영문을 쓰는 타자기는 손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빠르고 편리한 데 그 한글 타자기는 손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느려서 누구나 편리하게 쓸 수 없었다.

 

1920년대 이원익씨가 만든 한글타자기(왼쪽), 1933년에 송기주씨가 만든 한글타자기(오른쪽)

 

그런 한글타자기를 1945년 광복 뒤 안과 의사인 공병우 박사가 영문 타자기처럼 속도도 빠르고 누구나 쓰기 편리한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1949년에 만들어서 한글기계화 시대를 열었다. 공병우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안과 병원을 개업한 의사이었는데 1945년 해방이 되니 일본인 의대 교수들이 일본으로 가게 되어 한국인들이 의대 교수를 맡게 되었을 때에 공 박사도 의대 교수가 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일본어로 쓴 “소 안과학“이란 책을 교재로 쓰려고 우리말로 번역하다가 영문 타자기처럼 편리하게 쓸 수 있는 한글 타자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앞서 나온 이원익씨와 송기주씨가 개발한 한글타자기를 써보니 매우 불편했다. 필요함과 불편함이 발명품을 나오게 한다고 공 박사는 스스로 쓰기 편리한 한글타자기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나선다.

 

 

 

그는 광복이 되어서 서울의전 안과 교수로 일하게 되었는데 한글 맞춤법도 모르고 한글로 글을 쓰는 것이 매우 서툴렀다. 그런데 영문타자기를 써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글타자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 때 안과 치료를 받으러온 조선어학회 이극로 간사장으로부터 한글은 영문 로마자와 닮은 소리글자인데 그 로마자보다 더 훌륭한 글자라는 것을 들었기에 영문 타자기를 보고 그 원리대로 한글타자기를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영문타자기를 모두 분해해서 그 원리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돈을 잘 버는 의사 일을 제쳐두고 여러 해 동안 실패를 거듭하며 문제점을 고치는 일에 매달렸다.

 

그 때 미국 군정청 문교부 ‘스미드’ 편수국장이 공 박사가 한글타자기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번 찾아와 격려하고 제대로 된 제품을 발명하면 군정청에서 먼저 사용하겠다고 응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완전한 제품이 나오기 전에 미군은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1949년에 드디어 속도도 빠르고 간편한 고성능 한글타자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1950년 초에 미국에 특허를 내고 언더우드 타자기회사에서 시 제품 세 대를 만들어 한 대는 미국 장면 한국 대사에게 주고, 한 대는 한국 연세대 언더우드 박사에게, 그리고 한 대는 발명가 공병우 박사에게 보내왔다. 공 박사는 너무나 기뻐서 대한민국 문교부에 그 사실을 알리고 장관을 만나 시연하려고 했으나 우리 문교부는 미국 군정청 문교부와 달리 외면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군이 공병우 한글타자기를 쓰고 우리나라 해군 손원일제독이 쓰면서 그 훌륭함을 알게 되어 국방부와 문교부 들 여러 부처에서 쓰게 되었고, 공병우 한글타자기의 훌륭함을 깨달은 최현배, 백인제, 주요한, 이광수, 정인섭 박사 같은 저명인사들이 ‘한글속도타자기보급회(회장 최현배)’를 만들어 세상에 알렸다. 휴전협정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에 유엔군은 영문타자기로 회담 내용을 실시간으로 기록을 하는데 한글은 손으로 쓰니 불편해서 휴전회담 통역으로 있던 언더우드씨가 공병우 박사를 찾아와 공병우 타자기를 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그 때 영문타자기처럼 속도도 빠르고 말하는 것을 바로 글로 써 내는 것을 보고 북한군과 중국군 대표도 놀라고 만족했다고 한다.

 

 

 

그 때 휴전협정은 유엔군, 북한군, 중국군 대표가 모여 협정을 맺고 한국 대표는 끼지 못했지만 협정문 작성에는 영문타자기와 함께 한국의 공병우 한글타자기로 작성했다. 한글타자기가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한글타자기는 1965년 맺은 한임회담 때에도 그 훌륭함이 증명되었다. 그 때 우리는 회담이 끝나자마자 공병우 한글타자기로 작성한 회의록을 내놓는데 일본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렇게 공병우 고성능 타자기는 공공기관 공문서 작성은 말할 것이 없고 일반 회사들도 점점 타자기를 쓰게 되니 인기를 얻게 되고 타자기를 배우려는 사람도 늘어나 학원까지 생기고 다른 타자기도 나와 경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공병우타자기가 속도도 빠르고 사용하기 좋은 데 글꼴이 빨래줄 꼴이고 인쇄체 네모꼴처럼 예쁘지 않다는 불평이 나왔다. 그리고 타자기 사용이 늘어나고 돈벌이가 되니 다른 타자기들이 나와 경쟁을 했다.

 

 

 

그 때 국가기관에서는 세벌식 공병우 타자기를 많이 쓰고 일반 회사들은 글꼴이 예쁘지 않다고 김동훈 타자기를 많이 썼으나 공병우 타자기가 타자 속도가 빠르고 편리해서 가장 많이 썼다. 그런데 글자판이 공병우 타자기는 한글창제 원리를 따라서 3벌식이고 김동훈 타자기는 5벌식이어서 한 쪽 타자기를 쓰던 사람이 다른 쪽 타자기를 쓰려면 쓸 수 없었다. 그리고 타자기 사업이 되니 4벌식 자판을 가진 타자기도 나오고 타자방식이 다른 또 다른 타자기도 나온다. 그래서 글자판 통일 문제가 생겼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글학회는 1962년에 한글기계화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를 하고 정부에서 표준안을 냈으나 완전하지 않아서 생산자들이 따르지 않았다.

 

 

 

공병우 타자기 자판이 한글 창제 원리에 따라서 첫소리, 가운데 소리, 받침소리로 찍는 것이고 가장 빠르고 편리한 것이었는데 받침이 아래로 처져서 들쑥날쑥 빨래를 넌 것처럼 예쁘지 않다고 기업에서는 김동훈 타자기를 선호했다. 그러나 오히려 공병우 식이 글자 구별하기 좋고 새로운 한글 글꼴이라 발전된 것인데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일반인들은 자꾸 다른 방식을 찾은 것이다. 그러니 한글학회는 1968년에 정부 지원을 기대하고 재단법인 한글기계화연구소(소장 최현배)로 확대 개편하고 그 연구와 통일에 힘을 썼으나 정부 지원이 제대로 안 되어 어려움이 컸다. 그러니 연구소 한 사람이 최현배 소장에게 정부 관계자에게 뇌물을 주고라도 재정지원을 요청하자고 하니 그 말에 최현배 소장이 격분하고 쓰러져서 3일 뒤 1970년 3월 23일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정부가 아니고 ‘공병우’라는 한 개인이 한글 과학성을 증명하고 활용도를 높이는 한글기계화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고 잘한 일이다. 그런데 광복 뒤 미국 군정은 한글이 훌륭하고 편리한 글자이기에 살리고 쓰게 하려고 애쓰고 한글타자기 개발도 응원했으나 대한민국 문교부는 외면했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외국인이 한글타자기를 쓰면서 그 가치와 훌륭함이 증명되니 그제야 쓰면서 한글기계화 시대가 열리니 그 한글기계화 개척자요 선구자인 공병우 박사가 만든 세벌식 타자기가 가장 훌륭한 것인데 그 자판을 표준으로 정하지 않고 혼란을 자초한다. 그래서 그 잘못을 따지는 공병우박사를 정부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어다가 고문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고 못난 일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방명해 김대중님과 군사독재정치 타도운동도 하면서 셈틀(컴퓨터) 자판을 연구하고 민주화시대가 열린 1988년에 귀국해서 편리한 한글문서편집기 아래아한글을 태어나게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과 재산을 바치며 온갖 멸시와 수모를 참고 한글과 과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죽는 날까지 한글기계화운동을 한 공병우 박사가 고맙고 존경스럽다.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부에서 그 공로를 인정해 한글날에 훈장을 주고, 돈 잘 버는 의사 일을 제쳐두고 1950년에 처음 개발한 고성능 한글타자기를 정부가 2013년에 근대문화재로 지정해서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