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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 역사상 처음 우리 말글로 이름짓는 시대 열다 |
[한글 살리고 빛내기25] 한글 이름짓기 혁명을 일으킨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 |
리대로 |
1967년 5월 8일에 서울 문리대 교정에서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회장 이봉원)는 ‘고운 이름 뽑기’ 행사를 했다. 첫 회에 금상에 금수현(작곡가)님 아들딸인 금난새 형제(금 난새-내리-누리-노상)가 뽑혔다. 은상에는 민 달래, 오 귀염, 장려상에는 신 봄메, 김 송이, 장 푸르메-슬기로-다사로-하아루, 박 한미리-한누리-한서리-한길-한수리 형제가 뽑혔다. 이 행사는 우리 5000년 역사 이래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고 적는 새바람을 일으킨 매우 큰일로서 1986년까지 17회를 시행했다.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쓰면서 중국식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에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는 새바람을 일으킨 이름 짓기 큰일이었다. 아니 우리다운 이름 짓기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우리 겨레는 5000년 긴 역사를 가진 겨레로서 중국말과 다른 우리말을 쌨지만 우리 글자가 없어서 삼국시대부터 중국 한자를 빌려서 이름을 짓고 말글살이를 했다. 그러나 우리 겨레는 우리 글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자로 이름을 짓고 썼으나 삼국시대 초기엔 한자로 이름을 짓더라도 완전히 중국식이 아니고 성씨도 없이 우리말 뜻을 한자를 빌어서 이름을 지었다. 고구려를 세웠다는 ’주뭉‘은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고, 신라를 세웠다는 ’박혁거세‘는 “세상을 밝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우리식 이름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 한자를 가장 늦게 배워서 쓰기 시작한 신라가 중국 당나라 문화에 빠지면서 ’金春秋‘처럼 한문 성씨에 두 글자 이름인 중국식 이름이 뿌리를 내려 조선시대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그런 중국식 한문 이름도 지배계층인 양반이나 짓고 노비 같은 천민들은 성씨도 없이 “막동이, 돌쇠”처럼 우리말로 이름을 지어서 불렀다. 그렇게 우리말로 이름을 짓고 부른 기록이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한글)을 처음 만든 3년 뒤인 세종 31년(1449)에 김수온이 쓴 『사리영응기』란 한문으로 쓴 책에 “韓실구디, 金막”처럼 성은 한자로, 이름만 우리 글자로 적은 이름이 47명이 나온다. 또한 그 뒤 1596에 나온 ’진관관병편오‘란 한문책에는 성씨가 있는 병정 한글이름 856명, 성씨가 없는 남자 노비 한글이름 816명이 있고, 1617년에 나온 ’동국신속삼강행실’에는 효자 한글이름 1,212명, 열녀 한글이름 796명, 충신 한글이름 99명 이중 하층민(노인, 천인) 289명이 있고, 1687년에 쓴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에 1명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으며 1745에 쓴 ‘노비보’에 노비의 족보로 76가구 200여 명의 노비 상황이 한글로 적혀있다. 그러다가 1909년 대한제국 때에 민적법을 시행하면서 모든 사람들 이름을 한자로 호적에 올리기 시작해서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 마무리된다. 그리고 1940년대엔 일본이 우리 겨레 말살정책을 쓰면서 모든 조선 사람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라고 한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1945년 광복이 되어 선각자들이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기 시작한다.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가 시행한 ‘고운 이름 뽑기’에서 금상을 탄 금난새(음악 연주 지휘자) 형제가 그런 이릉인데 그의 아버지 금수현님은 ‘그네’라는 노래를 지은 작곡가로서 건국초기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을 때에 우리 음악 용어를 “도돌이표, 쉼표”처럼 우리 토박이말로 지은 분으로 광복 뒤 미국 군정 때부터 ‘김씨’란 성씨를 ‘금씨’로 바꾸고, 제 아들딸 이름을 모두 한글로 지은 한글이름 개척자였다. 광복 뒤 한글이름 개척자들은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또 여럿 있었다. ‘정종’ 전 동국대 교수는 1947년에 큰 아들 이름을 “정어지루(목원대 명예 교수)”라고 짓고 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려니 한글이름이라고 받아주지 않아서 군청과 도청까지 가서 따져서 호적에 올렸는데 그 딸들 이름을 “어지나, 나미나, 모라나, 보미나”처럼 세 글자로 지은 분이었다. 사회운동가요 정치인인 김철 선생은 1948년에 큰 아들을 ’밝힘‘이라고 우리말로 지었고, 둘째는 1953년에 ’한길(전 국회의원)‘, 셋째는 1956년에 누리(중앙대 교수)‘라고 지어 호적에 올렸다. 이렇게 공무원들보다 똑똑하고 자주의식이 강한 이들은 한글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렸으나 일반인들은 공무원들이 한글이름을 받아주지 않아서 한자로만 이름을 지어야 하는 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한글이름을 거부하는 사회 분위기를 서울대 ’고운 이름 뽑기‘행사가 무너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글이름도 호적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었고 한글이름 짓기 새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이 새 바람을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는 것은 새로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니 언론이 잘 보도해주었다. 이렇게 이 행사가 9회 째 시행된 1976년에 이 행사에서 상을 탄 가족들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모여서 '한글이름후원회(회장 밝한샘)'를 만들었고 그 다음해에 모임 이름을 '한글이름펴기모임'으로 바뀌어 시민운동 모임이 되었다. 이 모임 첫 회장을 맡은 밝한샘과 그 뒤를 이어서 회장을 맡은 배우리, 밝덩굴 선생들이 한글이름을 지어주는 일도 하니 한글이름이 점점 늘어났다. 수천 년 한문 속에 살아서 아직도 이름은 중국식 한문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가 시행한 ’고운 이름 뽑기‘ 행사는 한글을 빛내는 횃불이었고 이름 짓기 혁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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