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로 동북아중심국가 이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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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문과 백두산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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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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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일 중국 연길에서 한국, 중국, 북한 학자들이 모여 베이징 올림픽
체육용어 통일을 위한 학술모임이 있어 참석했다가 그 행사를 마치고 중국 도문에 가서 두만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본 뒤에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에
들러 윤동주 시비를 구경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 백두산에 올라가 천지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았다. 북한 쪽 두만강이 눈앞이고
백두산이 바로 건너인데 가보지 못하고 잠깐 바라만 보는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우리민족 정서가 듬뿍 느껴지는
연길
연길시엔 우리 조선족이 60%이고 거리 간판에 한글을 먼저 쓰고 중국 글은 그 아래에 쓰고 있었다. 공문서도
한글로 번역해서 쓴다고 했다. 만주 땅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조상이 살던 곳이고, 지금도 많은 동포가 살고 있어서 정감이 들고 한국의 한 지방
도시에 온 느낌이었다. 북한 국경이 바로 옆에 있으며 사람들 생김새와 먹는 것도 우리 식이고 말글이 통하니 더욱 그랬다. 중국 땅에서 우리말과
문화를 지키며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연길동포들이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곳 동포들이 우리말과 문화를 버리지 말고
즐겨 쓰면서 온 중국에 퍼트리길 바라면서 더욱 잘 살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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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먼저 위에 쓰고 중국 글을 그 아래에 쓴 간판.
©이대로 논설위원 | 중국과 북한 두만강 국경까지는
연길에서 도문까지 고속도로가 있어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바로 이웃이었다. 도문 두만강 가에서 북한 땅 남양 사이에 흐르는 두만강 물길은
100미터도 안 되었고, 양쪽 둔턱이 300에서 500미터 될 듯하였다. 큰소리로 소리치면 건너편에서 들릴 거리였다. 자동차가 다니는 다리가
하나 있으나 지나가는 차는 없고 양쪽에 보초 병사가 한 명씩 있을 뿐이었다. 기차 다리가 하나 있고 화물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너무
조용한데다가 빗방울까지 떨어지니 쓸쓸하고 허전하기까지 했다. 오늘 신문에 그곳 온성에 공업단지를 만들고 개방한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빨리 그리되고
북적대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
두만강가에서 바라보는 북녘
두만강 중국 쪽엔 한국 관광객
한패가 와서 막걸리로 기분을 내면서 뗏목을 타는 모습이 보였으나 북한 쪽은 인적도 없고 쓸쓸할 뿐이었다. 중국은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뗏목으로
돈도 벌고 다리 위에, 그어진 국경선을 구경하게 하면서 꽤 비싼 돈을 받는데 북한은 그런 재미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전망대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북쪽 땅을 바라보니 멀리 포장되지 않은 고갯길에 화물차가 올라가다가 하얀 연기를 내뿜더니 멈춰 섰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밀고
웅성거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목탄차라 힘이 없어 고개를 오르지 못한다고 안내원이 말한다. 중국 땅에 비해 북한 땅은 나무가 없었는데 불이 날까
봐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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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에서 뗏목을 타는 한국 관광객.
©이대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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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상류 쪽에 있는 북한 마을.
©이대로 논설위원 | 그때 쓸쓸하고 슬픈 마음으로 두만강가에 있는데
손전화가 울려서 보니 서울에 있는 아내가 “휴전선에서 북쪽이 총을 두 발 쏴서 긴장”이란 문자가 뜬다. 그곳에서 그런 문자편지를 보니 참으로
답답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서로 마음 놓고 오고 가지도 못하고 긴장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왜 남북 학자가 중국 땅에서도 서로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단 말인가? 그때 북쪽 학자도 연길에 와 있었지만 서로 만나 한자리에서 토론을 하지 못하고 따로 만나서 회의를 했는데, 그
슬프고 부끄러운 민족 비극이 언제 풀릴까 막막했다. 독일처럼 머지않은 날 갑자기 통일이 될지 모른다는 꿈을 꾸어봤다. 빨리 힘을 키우고 서로
노력해서 이 부조리와 불편함을 없애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는 돌아갈 때는 고속도로가 아닌 두만강가 비포장도로를 따라가서 북녘
땅을 더 구경하면서 용정으로 향했다. 그런데 비포장도로를 따라 두만강 상류 쪽으로 한참 가니 강폭이 더 좁아졌다. 강물 폭이 50미터 정도로
좁아져서 차를 세우고 한번 건너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데 우리를 안내하던 중국동포가 강 건너에 아무도 없는 거 같아도 사람이 건너가면
어디선가 바로 군인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나 건너가 보자고 할까 봐 차를 세우지 않고 멀리 북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갯길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고갯길에서 강 건너 북쪽 마을을 바라보며 통일이 될 날이 빨리 오라고 기도했다.
참으로 안타까웠으나 어둡기 전에
용정에 들러 윤동주 시비도 보고 혜란강과 일송정도 봐야만 했기에 바삐 차를 몰았다. 그런데 무더위에 목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해 길가에 내놓고
파는 수박을 한 통을 사먹었는데 그 수박을 파는 할머니가 조선족이어서 반가웠다. 연길시뿐만 아니라 농촌 길가에도 우리 동포가 있으니 남의 땅으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그 수박을 다 먹을 수도 없고 또 반가워서 그 주위에 있는 중국 분들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우리 돈으로
800원밖에 안 하는 수박 한 통으로 웃음꽃을 피우며 잔치를 벌인 셈이다.
항일독립의 고향,
용정
용정 대성중학에 다다르니 해가 저물고 비가 왔다. 일제 때 윤보선 전 대통령과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그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건물이 그대로 있어 둘러본 뒤 윤동주 시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혜란강을 건너 연길로 돌아왔다. 혜란강이 서울의
중랑천이나 안양천보다도 좁고 물이 없어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그곳은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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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윤동주 시비 앞에서.
©이대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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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에서 바라본 다리와 북쪽 남양.
©이대로 논설위원 | 연길에서 다시
하룻밤을 자고 새벽 5시에 백두산으로 갔다. 꼭 가보고 싶은 백두산이기에 가슴이 설레었는데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니 혹시 천지를 못 볼까 마음이
더욱 울렁였다. 그러나 백두산은 기후변화가 심하다기에 희망 속에 백두산 아래에 다다르니 비가 멈추었다. 올라가는 입장료도 우리 돈으로 2만 원
정도로 꽤 비싸고 천지로 가는 자동차요금과 폭포로 가는 자동차 요금을 따로 받는데 2만원 정도나 되었다. 그런데도 중국 관광객도 꽤 많아서 줄이
100미터는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돈벌이가 꽤 되니 중국은 백두산 아래에 비행장까지 만든다고 하는 데 북한 쪽은 파리만 날리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입장료를 그렇게 많이 받으며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은 한국에서 군대훈련을 할 때 야외화장실처럼 생겨서
일을 보는 옆 사람이 보였다. 가마니 쪽으로 칸을 만들고 큰 걸 보게 하고 그 앞에 서서 작은 걸 보는 광경은 진풍경이었다. 그것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니 한심스러웠다. 급하니 할 수 없이 일을 보면서 “중국은 아직 중국이로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남녀 화장실 구분도 없는
간이화장실이었다.
민족의 기상이 느껴지는 천지, 통일로 동북아중심국가
이뤄야 그래도 지프차로 백두산 꼭대기까지 올라가기에 힘이 들지는 않았으나 바람이 세차고 구름이 몰려와서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10분 정도 천지를 보고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니 비구름이 몰아와서 바로 내려왔다. 백두산에 여러 번
가서 천지를 구경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데 하늘이 도와서 천지 건너 북쪽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빨리 통일이 되고 우리 겨레가 잘
살기를 빌었다. 그리고 유럽연합처럼 우리도 이웃 중국과 일본이 함께 동북아 연방을 만들어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일에 힘쓸
것을 다짐했다.
한, 중, 일이 사이좋게 지낼 날을 위해서 우리가 빨리 힘을 키우고 통일해야 한다. 힘센 나라가 되고 통일을
빨리하려면 남북이 말글과 정신이 통하고 그 말글로 우리 자주문화를 꽃피워야 한다는 뜻에서 이번 한국과 중국, 북한 학자들이 만난 것이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천지에서 우리가 중심이 된 동북아시대를 만들자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두산 아래 중국 땅은
드넓은 벌판이 많은 다른 중국 땅과 다르게 산이 많고 우리 고향마을 풍경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달 전 서유럽에 가니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의 국경은 철조망이나 경비병도 보이지 않고 서로 마음대로 오고 가고 있는 걸 보았는데 한국과 중국, 일본도 으르렁대지 말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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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서 동북아 평화를 생각하며 그 일을 할 것을 다짐하는
글쓴이. ©이대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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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참말로 논설위원은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1967년 동국대
국어운동학생회 창립 초대 회장 1990년 한말글사랑겨레모임 공동대표 1994년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 조직위윈장 1997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2000년 한글세계화추진본부 상임이사(현) 2004년 한글날국경일 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사무총장 2005년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 사무총장 2006년 한글날 큰잔치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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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7 [05:35]
ⓒ참말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