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미국인 헐버트 박사

한글빛 2009. 4. 17. 18:25

고종황제가 보낸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는 4명
[이대로의 우리말글사랑] 한국인 3명과 함께 밀사로 파견된 미국인 헐버트
 
이대로
고종황제는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불법으로 맺어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여 일본제국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아 오기 위한 최후의 투쟁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인 특사로 이상설(전 의정부 참찬), 이준(전 평리원 검사), 이위종(전 주 러시아 공사관 참사관) 들 세 사람과 따로 미국인 헐버트를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 사실이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가 발행한 일본정부 기밀문서(1907년 223건) 자료집에 뚜렷하게 나와 있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을 고종황제는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강제 퇴위되었고, 한규설 총리대신 등도 이 조약에 반대하고 국민도 저항했음이 그들 비밀문서에서 알 수 있다.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관련 일본정부 기밀문서 자료집 표지. 위에 고종황제 사진이 있고 아래에 네 사람의 사진이 있다.     © 이대로
원래 제2차 만국회의는 1906년 6월에 개최할 예정이었고 고종황제는 1905년 9월에 러시아 황제로부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러시아 황제는 제1차 만국회의를 제안하여 주관한 경력으로 제2차 회의 초청권을 개최지인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초청사실을 뒤늦게 알고 두 초청권자에게 한국은 1905년 11월 17일로 외교권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초청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를 1년 뒤로 연기시켰다. 그리하여 1907년 6월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고종황제는 1906년 6월 22일 헐버트에게 특사 위임장을 주고 수교 9개국(미국,영국,러시아,이탈리아,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중국,벨기에)의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친서도 함께 가지고 가게 했다. 헐버트는 외국인이지만 만국평화회의 특사가 되어 1907년 6월에 열리게 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파한다.
 
이상설, 이준 특사는 1907년 5월 21일에 블라디보스톡을 출발,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에 갔으며 헐버트는 5월 8일 먼저 서울을 출발, 일본을 거처 이상설, 이준과 거의 같은 시기인 5월 중순에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였다. 당시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와 관련하여 헐버트만을 의심하게 되어 헐버트의 행적을 철저히 감시했다. 헐버트만이 일본의 감시 하에 있었기에 이상설, 이준의 헤이그 행은 일본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된다. 결국 헐버트는 이상설과 이준이 헤이그에 무사히 가는 데 크게 이바지한 셈이다.
 
1907년 5월 9일에 일제 통감부총무장관이 일제 외무장관에게 보낸 기밀통발 제51호에 “미국인 헐버트는 러일전쟁 중 한국 황제의 친서를 휴대하여 미국으로 가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시도하고, 그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만드는 ‘코리아 리뷰’ 지상에 한국민을 선동하는 언론을 왕성하게 하는 등 우리의 대한 정책을 저해하는 행동을 한 자로서 최근에 한국을 영구히 떠난다면서 지난 8일에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갔는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거쳐서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이용해서 일본을 저해할 활동을 한다는 풍설이 있음.”이라고 보고한다.
 
그리고 날마다 헐버트 동태에 관한 비밀보고가 오가다가 5월 19일에 이등 통감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극비문서에 “고종은 헐버트에게 거액의 돈을 주어 평화회의에 파견하면서 러시아와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기에 한양의 러시아와 프랑스 영사에게 막아달라고 부탁했는데 프랑스 영사는 협조했으나 러시아 영사는 듣지 않았다. 헐버트는 러시아에 의지해서 시베리아 철도로 유럽으로 갔다.”고 보고하고 있다.
 
7월 3일 일본의 외무대신이 헤이그 일본대사에게 “한국인 3명의 밀사 뒤에 헐버트가 지도하는 게 아닌가? 이들의 행동이 한국 황제의 칙명에서 나온 게 아닌가?”를 확인해 보고하라는 비밀 서신을 보냈는데 7월 4일 헤이그 츠즈키 대사가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보낸 답변에 “헐버트와 한국인 2명이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같이 왔으나 헐버트는 외부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파리로 가서 한국인을 조종하고 있다. 확실히 고종이 보냈다.”고 적었다. 그리고 7월 7일에 서울의 이등 통감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특별기밀 문서에 ” 한국의 총리대신이 고종황제 퇴위를 논하였다. 그대로가면 황제의 반일 행동을 막을 길이 없으니 내정 권을 빼앗는 조약 등 연구 바란다.“는 말이 나온 뒤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 되고 그 3년 뒤에 나라를 빼앗긴다.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후손에게 바르게 알리자고 말한다.     © 이대로
우리 밀사들이 헤이그의 각국 대표에게 뿌린 호소문 (1907년 6월 27일 자로 작성)에 “ 1884년 모든 국가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인정했는데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체결했으나 고종황제는 동의하지 않았고 무효다. 당시 총리대신 한규설, 법무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민영기, 외무대신 박제순들이 반대했다. 군인과 농민이 저항했고 부채경감운동에도 참여했다.”라는 내용 등과 함께 조약문을 보여주며 한국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헐버트는 1886년 23살에 한국에 와서 우리나라 정부가 최초로 세운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와서 교육자, 언론인, 한글연구가, 역사학자,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 당시 고종황제의 천서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을사늑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이어 1907년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와 관련 고종황제의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미국으로 가서 계속 국권복권운동을 한다. 그리고 일제가 물러간 뒤에 한국에 와서 1949년에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이제라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되새겨 앞으로는 또 다시 나라를 잃는 아픔을 겪지 말자.  지난날 우리는 역사 공부시간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간 대한제국의 밀사는 3명이었다고 가르치고 배웠으나 이제 역사책에 밀사는 4명이었다고 쓰고 가르쳐야 하겠다.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이 일본에 저항해서 우리 독립을 지키려고 애쓴 일은 너무 고맙고 잘한 일로써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일이고 뜻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5년 우리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은 불법 조약이었고 고종황제는 훌륭한 분이었음도 역사책에 기록하고 가르치자. 또한 일제의 강압에 무릎을 꿇은 이완용 등 매국노와 일제에 저항한 민영환 등 애국자들에 대한 일도 비교해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가르치자.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 사무총장
중국 절강성 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







 
2009/04/17 [10:43] ⓒ 대자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