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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1968년 왜 광화문을 새로 짓고 그 현판을 한글로 써 달았나?
2011-02-14 13:55:59 [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
요즘 광화문 현판 글씨를 한자로 쓸 것인가, 한글로 쓸 것인가, 한자로 쓴다면 누가 쓸 것인가, 어떤 글꼴로 쓸 것인가, 한글로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아니면 지난 1968년에 한글로 써 달았던 한글현판을 다시 달아야 한다는 등등 말이 많다. 앞으로 이 문제를 푸는 데 전문가와 국민이 판단을 똑바로 하도록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968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 현판을 단 까닭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밝힌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국민과 정치세력 사이에서도 엇갈리고 예민하게 대립된 상태이기에 이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으나 이쯤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에도 한 국회의원이 내게 광화문 현판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광화문에 얽힌 역사와 사실을 알아야 하는 데 그 가운데 1968년에 왜 한글 현판을 달았는지 궁금하다고 해서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정치인, 학자, 전문가. 언론인은 말할 거 없고 일반 국민과 한글단체에서도 그 한글 현판이 걸리게 된 까닭과 이야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광화문을 다시 짓고, 그 현판을 한글로 써서 단 것은 우리 겨레 5000년 역사에 보기 드문 매우 큰일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대단히 크다. 그 한글 현판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정치를 잘 하고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위대한 지도자인 세종임금 정신과 업적을 본받아 나라를 일으키고 국민을 잘 살게 만들어 역사에 남는 정치 지도자가 되길 바라는 국민의 소리를 듣고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역사 유물이고 문화재이다. 그 현판에는 한글로 겨레를 일으키자는 이 시대 국민의 간절한 소망과 시대정신이 담긴 문화재이고 국민이 정치인을 설득해 이룬 민주주의 실현 표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에 강력한 한글전용정책을 발표하고, 광화문과 여주 영릉, 온양 현충사와 탑골공원, 그리고 나라 곳곳의 중요한 유적지를 정비하고 단장하면서 그 현판을 한글로 써 달았다. 집권 초기 그렇게 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 본래 한글을 잘 알고 사랑해서가 아니다. 독재정치나 정권연장과도 거리가 멀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역사의 흐름이고 필연이다. 정권을 잡은 뒤에 국민의 소리를 듣고 정치를 잘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 뜻을 실천한 것이다. 그 실천 뒤에는 박대통령 문화정책 자문위원인 이은상 선생과 한갑수 선생이 있고 그 뒤에는 국어운동대학생회와 한글학회와 국민이 있다.
박정희, 김종필 들 군사혁명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한글로만 만들던 교과서에 일본처럼 한자를 드러내 쓰겠다고 발표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62년에서 1964년 일이다. 나는 친일 반민족, 반자주 쪽으로 가는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학에 가서 1966년에는 한일회담 무효시위에도 참여하고 1967년부터 동국대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한글 빛내기 운동을 했다. 그 때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를 시작으로 조직된 연대, 고대 국어운동학생회와 함께 연합회(회장 서울대 이봉원)를 만들어 활동을 했는데 그 활동 소식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었다. 1968년 봄에 동숭동 서울문리대에서 대학생들이 모여 한글문화창조 선언을 하고 한국방송에 인터뷰한 내 말이 하루 종일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이은상 선생의 증언이다. “1967년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회장 이봉원)와 고대(회장 박노용)회원들이 한글을 지키고 빛내자는 시위를 했다는 신문보도를 박 대통령이 보고 비서에게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군사정권 물러가라거나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는 다른 색다른 학생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비서는 문화정책 자문위원인 이은상님에게 물었고 이은상님이 바로 대통령에게 설명을 했다. 이은상님은 일제 때 우리말 사전을 만들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끌려가기도 한 분이기에 학생들의 주장이 옳다고 설명하니 알아듣고 당장 시행하도록 지시해서 한갑수 선생이 자세한 도표를 만들어 가지고 가서 대통령에 설명했다.”고 한다. 새 정부가 한자혼용으로 가는 것을 한글학회가 강력하게 반대해도 듣지 않다가 대학생(민중)이 일어나니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굴복한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한자 조기교육과 영어 조기교육을 강행하려고 해서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이 한글학회에서 그 대책회의를 할 때 내가 들은 한갑수 선생 증언이다. “청와대는 국어운동대학생회라면 꼼짝 못합니다. 그들을 내세우세요. 대학생들 건의를 듣고 박 대통령은 한글전용 정책을 강력하게 폈습니다. 그 때 쯤 청와대에서 한 밤에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내일 아침까지 청와대 안에 있는 한자 안내판을 한글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다며 나보고 한글로 써달라고 해서 밤새 써준 일도 있습니다. 그날 미국 정치인이 오는 데 우리가 세계 으뜸 글자를 가진 자주문화국가라는 것을 미국인에게 보여주려는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때 80대 노인인 한갑수님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참석하게 되어 있는 세종대왕 탄신 숭모제전에도 한번 참석하고 안 했으며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사람이다.
이은상 선생은 “박 전 대통령에게 우리 역사에서 어떤 분을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순신장군과 세종임금이라고 했다. 그럼 그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잘 알려면 한자로 쓴 세종실록과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읽어야 한다. 그 한문책을 읽어본 일이 있는가? 나는 난중일기를 국역하고 있는데 전쟁터에서 초서로 쓴 한문 한 줄을 해석하려면 최고 한문 실력자도 힘들어 몇 달이 가기도 한다. 이래서는 선조의 지혜와 역사와 전통을 이어갈 수 없다. 빨리 국역하고 한글만 쓰는 말글살이로 가야 한다. 두 분의 발자취를 살피고 본받고 선양하면 그 두 분 다음의 지도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설명하니 바로 알아듣고 무릎을 치며 좋아하더란다. 머리가 좋은 특보에 그 대통령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세종임금처럼 산업과 국방, 과학,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청량리에 세종대왕기념관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원, 임업시험장, 국방연구원 들을 세우고, 세종임금과 이순신 장군 동상도 세우고, 그 두 분이 태어난 날에는 대통령이 참여해서 숭모제전을 올렸다. 폐허가 된 두 분 유적지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 유적지와 여러 선열의 역사 유적지를 정비하고 단장했다. 흔적도 없는 광화문을 옛 일본 총독부 앞에 세우고 한글 현판을 단 것도 이런 정신과 통치 철학 실천이었다.
광화문과 한글현판은 자주자립, 민주문화 국가를 이루겠다는 푯대였고 깃발이었다.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으로 만든 민주 자주 글자인 한글을 널리 알리고 빛내어 온 인류를 이롭게 하자는 실천에서 나온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집권 초기 이런 마음과 실천이 나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국운 상승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독재정치를 한 그가 세종임금과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국민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고 본다. 그 배경에 이은상님의 나라사랑 한글사랑 정신이 있었고, 한글단체와 국민의 소리를 정부가 들어준 민주주의 기본이 서려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생각을 깊게 안 하는 조무래기 정치인이나 학자, 언론인이라면 광화문을 다시 짓고 현판을 한글로 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세종임금을 우러러보면서 세종대왕의 가슴과 머리와 눈으로 생각하고 볼 때 될 수 있는 일이다. 중국 글이나 일본문화를 섬기는 이들의 눈과 가슴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경복궁은 1395년 조선 태조대왕이 건립했고 그 때 광화문도 처음 지었으나 그 이름은 광화문이 아니고 정문이었다. 그런데 세종임금이 조선왕조가 빛나서 튼튼한 나라를 만들자는 꿈을 담아 광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광화문이 200여년이 지난 1997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근정전과 다른 궁전이 불탈 때 없어졌다. 그리고 250여 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1867년에 대원군이 외세 침략을 막고 다시 왕권과 나라를 일으키겠다고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을 중건했다. 그동안 근정전과 광화문은 돌로 된 석축만 남고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니 현판이야 말할 거 없이 없었기에 다시 지었으나 그게 처음 원형이라고 볼 수 없다. 지금처럼 목조 건물을 하나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새 소망을 담아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망하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그 식민총독부가 광화문 안에 들어서고 1927년에 이 광화문은 헐려서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는데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나무나 기와는 말할 거 없고, 현판도 모두 불타서 없어졌다. 그걸 1968년에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 앞에 시멘트로 다시 지었다. 돈과 나무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날 준공식을 하고 이제 1000년이 가도 불에 타지 않고 길이 남을 것이라고 감격어린 말을 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정치 논리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그 광화문을 때려 부수고 한글현판을 뗀 것이다.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세종정신과 국민의 소리와 나라가 일어나는 기운까지 때려 부수고 떼버린 것이다. 참으로 광화문은 600년 흥망 우리 역사와 함께 한 표상이다.
광화문과 중국 천안문, 경복궁과 자금성은 그 상징과 위치가 닮았다. 둘 다 그 나라의 수도 중심에 있는 그 나라의 얼굴이다. 자금성 안의 현판은 모두 만주글자와 한자가 함께 쓴 것이지만 천안문엔 그 현판 글씨가 아니다. 그걸 눈여겨보자. 경복궁 안의 모든 현판은 한자지만 광화문 현판은 한글로 써도 좋다. 이제 새로 지은 광화문에 세종임금 때 훈민정음 해례본 글꼴을 따다가 유명 서예가가 혼을 넣어 만들어 달면 외국인과 후손이 감동할 것이다. 한자로 쓰면 우리가 중국 문화의 한 가지란 지난 역사를 보여주는 것밖에 없지만 한글로 쓰면 한글이 태어는 곳이 그곳임과 세종임금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리고 우리 겨레가 얼마나 우수한 겨레인지 보여주고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다시 나라 기운을 일으키는 푯대가 된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국민과 정치세력 사이에서도 엇갈리고 예민하게 대립된 상태이기에 이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으나 이쯤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에도 한 국회의원이 내게 광화문 현판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광화문에 얽힌 역사와 사실을 알아야 하는 데 그 가운데 1968년에 왜 한글 현판을 달았는지 궁금하다고 해서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정치인, 학자, 전문가. 언론인은 말할 거 없고 일반 국민과 한글단체에서도 그 한글 현판이 걸리게 된 까닭과 이야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광화문을 다시 짓고, 그 현판을 한글로 써서 단 것은 우리 겨레 5000년 역사에 보기 드문 매우 큰일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대단히 크다. 그 한글 현판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정치를 잘 하고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위대한 지도자인 세종임금 정신과 업적을 본받아 나라를 일으키고 국민을 잘 살게 만들어 역사에 남는 정치 지도자가 되길 바라는 국민의 소리를 듣고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역사 유물이고 문화재이다. 그 현판에는 한글로 겨레를 일으키자는 이 시대 국민의 간절한 소망과 시대정신이 담긴 문화재이고 국민이 정치인을 설득해 이룬 민주주의 실현 표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에 강력한 한글전용정책을 발표하고, 광화문과 여주 영릉, 온양 현충사와 탑골공원, 그리고 나라 곳곳의 중요한 유적지를 정비하고 단장하면서 그 현판을 한글로 써 달았다. 집권 초기 그렇게 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 본래 한글을 잘 알고 사랑해서가 아니다. 독재정치나 정권연장과도 거리가 멀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역사의 흐름이고 필연이다. 정권을 잡은 뒤에 국민의 소리를 듣고 정치를 잘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 뜻을 실천한 것이다. 그 실천 뒤에는 박대통령 문화정책 자문위원인 이은상 선생과 한갑수 선생이 있고 그 뒤에는 국어운동대학생회와 한글학회와 국민이 있다.
박정희, 김종필 들 군사혁명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한글로만 만들던 교과서에 일본처럼 한자를 드러내 쓰겠다고 발표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62년에서 1964년 일이다. 나는 친일 반민족, 반자주 쪽으로 가는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학에 가서 1966년에는 한일회담 무효시위에도 참여하고 1967년부터 동국대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한글 빛내기 운동을 했다. 그 때 서울대 국어운동대학생회를 시작으로 조직된 연대, 고대 국어운동학생회와 함께 연합회(회장 서울대 이봉원)를 만들어 활동을 했는데 그 활동 소식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었다. 1968년 봄에 동숭동 서울문리대에서 대학생들이 모여 한글문화창조 선언을 하고 한국방송에 인터뷰한 내 말이 하루 종일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이은상 선생의 증언이다. “1967년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회장 이봉원)와 고대(회장 박노용)회원들이 한글을 지키고 빛내자는 시위를 했다는 신문보도를 박 대통령이 보고 비서에게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군사정권 물러가라거나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는 다른 색다른 학생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비서는 문화정책 자문위원인 이은상님에게 물었고 이은상님이 바로 대통령에게 설명을 했다. 이은상님은 일제 때 우리말 사전을 만들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끌려가기도 한 분이기에 학생들의 주장이 옳다고 설명하니 알아듣고 당장 시행하도록 지시해서 한갑수 선생이 자세한 도표를 만들어 가지고 가서 대통령에 설명했다.”고 한다. 새 정부가 한자혼용으로 가는 것을 한글학회가 강력하게 반대해도 듣지 않다가 대학생(민중)이 일어나니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굴복한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한자 조기교육과 영어 조기교육을 강행하려고 해서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이 한글학회에서 그 대책회의를 할 때 내가 들은 한갑수 선생 증언이다. “청와대는 국어운동대학생회라면 꼼짝 못합니다. 그들을 내세우세요. 대학생들 건의를 듣고 박 대통령은 한글전용 정책을 강력하게 폈습니다. 그 때 쯤 청와대에서 한 밤에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내일 아침까지 청와대 안에 있는 한자 안내판을 한글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다며 나보고 한글로 써달라고 해서 밤새 써준 일도 있습니다. 그날 미국 정치인이 오는 데 우리가 세계 으뜸 글자를 가진 자주문화국가라는 것을 미국인에게 보여주려는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때 80대 노인인 한갑수님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참석하게 되어 있는 세종대왕 탄신 숭모제전에도 한번 참석하고 안 했으며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사람이다.
이은상 선생은 “박 전 대통령에게 우리 역사에서 어떤 분을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순신장군과 세종임금이라고 했다. 그럼 그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잘 알려면 한자로 쓴 세종실록과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읽어야 한다. 그 한문책을 읽어본 일이 있는가? 나는 난중일기를 국역하고 있는데 전쟁터에서 초서로 쓴 한문 한 줄을 해석하려면 최고 한문 실력자도 힘들어 몇 달이 가기도 한다. 이래서는 선조의 지혜와 역사와 전통을 이어갈 수 없다. 빨리 국역하고 한글만 쓰는 말글살이로 가야 한다. 두 분의 발자취를 살피고 본받고 선양하면 그 두 분 다음의 지도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설명하니 바로 알아듣고 무릎을 치며 좋아하더란다. 머리가 좋은 특보에 그 대통령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세종임금처럼 산업과 국방, 과학,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청량리에 세종대왕기념관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원, 임업시험장, 국방연구원 들을 세우고, 세종임금과 이순신 장군 동상도 세우고, 그 두 분이 태어난 날에는 대통령이 참여해서 숭모제전을 올렸다. 폐허가 된 두 분 유적지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 유적지와 여러 선열의 역사 유적지를 정비하고 단장했다. 흔적도 없는 광화문을 옛 일본 총독부 앞에 세우고 한글 현판을 단 것도 이런 정신과 통치 철학 실천이었다.
광화문과 한글현판은 자주자립, 민주문화 국가를 이루겠다는 푯대였고 깃발이었다.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으로 만든 민주 자주 글자인 한글을 널리 알리고 빛내어 온 인류를 이롭게 하자는 실천에서 나온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집권 초기 이런 마음과 실천이 나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국운 상승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독재정치를 한 그가 세종임금과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국민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고 본다. 그 배경에 이은상님의 나라사랑 한글사랑 정신이 있었고, 한글단체와 국민의 소리를 정부가 들어준 민주주의 기본이 서려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생각을 깊게 안 하는 조무래기 정치인이나 학자, 언론인이라면 광화문을 다시 짓고 현판을 한글로 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세종임금을 우러러보면서 세종대왕의 가슴과 머리와 눈으로 생각하고 볼 때 될 수 있는 일이다. 중국 글이나 일본문화를 섬기는 이들의 눈과 가슴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경복궁은 1395년 조선 태조대왕이 건립했고 그 때 광화문도 처음 지었으나 그 이름은 광화문이 아니고 정문이었다. 그런데 세종임금이 조선왕조가 빛나서 튼튼한 나라를 만들자는 꿈을 담아 광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광화문이 200여년이 지난 1997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근정전과 다른 궁전이 불탈 때 없어졌다. 그리고 250여 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1867년에 대원군이 외세 침략을 막고 다시 왕권과 나라를 일으키겠다고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을 중건했다. 그동안 근정전과 광화문은 돌로 된 석축만 남고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니 현판이야 말할 거 없이 없었기에 다시 지었으나 그게 처음 원형이라고 볼 수 없다. 지금처럼 목조 건물을 하나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새 소망을 담아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망하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그 식민총독부가 광화문 안에 들어서고 1927년에 이 광화문은 헐려서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는데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나무나 기와는 말할 거 없고, 현판도 모두 불타서 없어졌다. 그걸 1968년에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 앞에 시멘트로 다시 지었다. 돈과 나무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날 준공식을 하고 이제 1000년이 가도 불에 타지 않고 길이 남을 것이라고 감격어린 말을 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정치 논리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그 광화문을 때려 부수고 한글현판을 뗀 것이다.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세종정신과 국민의 소리와 나라가 일어나는 기운까지 때려 부수고 떼버린 것이다. 참으로 광화문은 600년 흥망 우리 역사와 함께 한 표상이다.
광화문과 중국 천안문, 경복궁과 자금성은 그 상징과 위치가 닮았다. 둘 다 그 나라의 수도 중심에 있는 그 나라의 얼굴이다. 자금성 안의 현판은 모두 만주글자와 한자가 함께 쓴 것이지만 천안문엔 그 현판 글씨가 아니다. 그걸 눈여겨보자. 경복궁 안의 모든 현판은 한자지만 광화문 현판은 한글로 써도 좋다. 이제 새로 지은 광화문에 세종임금 때 훈민정음 해례본 글꼴을 따다가 유명 서예가가 혼을 넣어 만들어 달면 외국인과 후손이 감동할 것이다. 한자로 쓰면 우리가 중국 문화의 한 가지란 지난 역사를 보여주는 것밖에 없지만 한글로 쓰면 한글이 태어는 곳이 그곳임과 세종임금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리고 우리 겨레가 얼마나 우수한 겨레인지 보여주고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다시 나라 기운을 일으키는 푯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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