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에 잠을 깨어 김동길 박사님들을 읽어봤습니다. 자유를 신봉하고 자유를 지키려고 애쓰시는 박사님의 모습은 여전하십니다. 나는 공병우 박사님을 우러러 받들었고, 그 분의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공 박사님은 1988년 미국에서 돌아오셨을 때 김동길 박사님께서 한국일보에 쓰신 [한글문화 시대가 온다.]는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시면서 한글을 사랑하고 그 위대함을 알고 계신 것을 칭찬하고 고마워하셨습니다. 그 때 나도 김 박사님께서 쓰신 그 글을 읽고 한글에 대한 자신감을 더 굳게 가졌고, 김동길 박사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날마다 글을 써서 누리집에 올리시기에 가끔 글을 읽으면서 김 박사님께서 어떻게 지내시고 안녕하신지 살펴봅니다. 자꾸 글이 짧아지고 마음도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더욱이 오늘 유언장과 같은 아래 글을 보니 공병우 박사님 유언과 닮아서 두 분을 더 생각하게 합니다. 김동길 박사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두 손모아 빕니다. 한글을 지키고 빛내는 일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2011/05/03(화) -내가 죽거든, 나를…- (1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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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한 대학의 강연 요청을 받아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은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의 알마티라는 곳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납니다. 이 여행에 무슨 불길한 예감이라도 있어서 이런 글을 쓴다는 오해는 없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렇고 나와 동행하는 이들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돌아와야 하고 또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가족의 묘지가 경기도 시흥군 광석면 군자리에 있었습니다. 거기 부모님을 모셨고 그 옆에 누님도 모시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 시흥문화예술회관을 세우게 되었으니 묘지를 옮기라는 수용령이 떨어져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다 지난 4월 28일 누님은 드디어 경기도 가평에 있는 이화여자대학교 묘지에 이장되었고, 아버님·어머님은 어제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한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므로, 아들 된, 그리고 동생 된 도리는 일단 끝을 냈고, 이제는 나 자신에 관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때가 됐다 싶어 그동안 생각해 온 몇 가지 일들을 가까운 이들 앞에 밝히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매장도 싫고 화장도 싫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몸은 나를 키워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 의료원에 기증하기로 결심한지 오랩니다. 죽는 날까지 이 결심을 비밀에 붙여 두리라 다짐했지만 친구들의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아 미리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때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거든 시신을 인체 해골 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교 생물학 교실에 두라고 예언을 하셨다지만 일제 당국이 이를 용납하지 않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말을 함석헌 선생에게서 듣고는 “나도”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동안 살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따르는 법적 수속은 머지않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장례식이니 추모예배니 하는 것을 일체 거부합니다. 하늘나라 아닌 다른 곳에서 나를 만나려 하지 마세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생명의 영원함’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또는 죽은 뒤에도 매우 자유롭고 명랑한 영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피렌체의 단테처럼 나도 나의 베아트리체와 함께 천국을 거느리고 있을 겁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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