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이대로 한글]한자 사대주의, 영어 앞잡이로

한글빛 2013. 5. 17. 08:19

[이대로 한글]한자 사대주의, 영어 앞잡이로
    기사등록 일시 [2012-10-08 07:51:00]
【서울=뉴시스】이대로의 ‘한글’ <8>

한글은 조선시대에 정식 공문서나 교과서로 널리 쓰이진 못했지만 왕실과 양반들 사이에서 보조 문서나 편지로 많이 쓰였고, 소설과 시, 교육 보조재로 쓰였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한글로 교지도 내린 일이 있으며, 임금이 시집간 공주에게 편지를 하거나 양반집 아녀자들끼리 편지를 쓰거나, 한자를 공부하는데도 쓰였다. 김만중은 구운몽과 사시남정기를 한글로 썼다. 일찍 깨달은 분이다. 홍길동전은 최초 한글 소설로 알려졌는데 최근에 그보다 먼저 쓴 소설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이 한글을 쓴 흔적이나 문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서민들은 일만하지 글자를 배우고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 때의 언문청이나 정음청, 고종 때의 국문연구소 같은 정부기관을 만들고 한글을 갈고 닦았다면 한글이 많이 쓰였을 것이고 빛나게 되어 힘센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바보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 속국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이제는 한글을 마음 것 즐겨 쓰고 잘 활용하자.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를 시작으로 월인석보와 동국정운 들 중요한 책을 훈민정음으로 쓰고, 훈민정음을 과거시험과목으로 정하면서 훈민정음(한글)을 널리 펴려고 애썼지만 그 뒤에 중국과 한문 숭배자들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다. 홍길동전 같은 소설이나 시, 편지로 쓰였으나 한글이 우리나라 글자로 인정하지 않다가 고종 때 훈민정음을 국문(1894년 고종 칙령1호)이라고 부르고 살려 쓰려고 했다. 우리글자로 만든 신문(독립신문 1896)도 나오고 1907년에는 정부 안에 국문연구소도 만들었으며, 1908년에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어연구학회가 조직되어 우리 국문을 살리려고 애썼다.

그 때 한글을 살려서 쓰려고 애쓴 분들이 많지만 진짜로 우리 글자를 사랑하고 지키고 빛내려고 한 몸을 바친 분은 주시경이다. 주시경이 배재학당에서 로마자란 소리글자를 쓰는 미국인 선생 헐버트를 만나 똑 같은 소리글자인 우리 글자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독립신문도 만들고 일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거로 보인다.

‘한글모죽보기’ 속 첫 장에 주시경 선생의 상동청년학원 안에 있는 국어강습소(한글배곧)를 나온 제자들 중심으로 민족지도자(기타 사회 유지)들과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학회는 언어학회로 세계 최초 학회다. 그러니 한글학회(처음 이름 국어연구학회)는 우리나라 최초 학회이며 가장 오래된 학회로 이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건국운동 단체이고, 가장 업적이 큰 광복운동 단체다. 일본은 1944년에 ‘국어학회’를 창립했다니 우리보다 38년이나 늦었다.

상동청년학원 국어강습소(한글배곧) 1회 졸업생 최현배와 신명균 들이 국어연구학회 특별회원이 되었음이 적혀있다. 2회 졸업생과 다음 졸업생들도 회원이 200명이었다. 통상회원이 있는데 주시경, 김정진, 남형우, 장지영 들 10명이었다. 그 위에 의사원(오늘날 이사)이 있었는데 주시경, 김두봉, 윤욱식, 신명균, 이규영 들 5명이었다. 처음 회장은 김정진이란 분이 맡았는데 사회 유지나 애국지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지방에 한글강습소 겸 지회를 만들고 활동한다. 함남 흥흥군 사립 숙정 여학교에 조선어하기강습소를 만들고 소장에 문석열이 강사 이규영이 맡았고, 최현배는 경남 동래군에 있는 동명학교 안에 하기강습소를 만들고 한글을 가르쳤으며 동래군에 있는 사립 명정학교 안에 있는 강습소 소장은 김용곡, 교사는 권덕규라고 적고 있다. 또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난 뒤에 김두봉이 상동청년학원 한글배곧 교사가 되었다고 적혀있다. 주시경이 죽은 뒤에도 그 제자들이 한글 교육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기는 일본식 한자혼용을 한 모범 글이다. 그 때 일본식 한자혼용 신문과 책들은 우리 토박이말을 죽이고 일본식 한자말을 퍼트리는 앞잡이였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그런 말글살이에 완전히 길든다. 그 찌꺼기가 오늘까지 한글을 괴롭히고 있다.

‘국어연구학회’는 1910년 일제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니 우리말을 ‘국어’라고 할 수 없게 되니 1911년 ‘배달말몯음’이라고 했다가 주시경이 실제 회장이 되면서 1913년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고 주시경은 ‘말모이’라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다가 1914년 주시경이 갑자기 이 세상을 뜬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던 김두봉이 상해로 망명하고, 1921년 남은 주시경의 제자들은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활발하게 움직인다. 1926년 한글날(가갸날)을 만들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고,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들고, 1936년 10월 28일 '사정(査定)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공표, 1941년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갈고 닦다가 1942년 학회 회원과 후원회원들 33인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 감옥에 가둔다.

여기서 일제 때 1931년 일본 유학파 출신 박승빈(1925년 보성전문 교장)이 주도해 조선어학연구회를 만들고 친일분자 윤치호들의 지원을 받으며 ‘정음’이라는 동인지를 계간으로 내면서 1941년까지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에 반대한 일과 광복 뒤 군정 때에는 보성전문교장 현승종이 조선어학회 최현배들이 한글로 교과서를 만들고 공문서도 한글로 쓰자고 하니 발 벗고 반대한 일이 있고 미군정기 한글학회가 하는 ‘우리말도로찾기’를 경성제대 출신 조윤제와 이숭녕들이 반대하고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김종필이 한일회담 강행 뒤 경성제대 출신 이희승이 어문회’를 만들고 박승빈처럼 한글학회에 대항한 일을 주목한다.

광복 뒤 조선어학회는 일제가 못 쓰게 한 우리 토박이말과 땅이름을 찾기 운동을 하고, 한글 교사를 양성하고 공문서를 한글로 쓰게 하고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고 우리말을 한글로만 적는 말글살이를 추진한다. 그러나 일본식 한자혼용에 길든 일제 지식인들이 끈질기게 한글이 빛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어 피가 터지는 논쟁을 하게 된다.


미군정 때에 보성전문학교 교장 현승종은 “어떻게 아녀자가 쓰는 한글만 쓰자는 것이냐.”면서 한글 살려서 쓰는 것을 발 벗고 발대했으며 경성제대 출신으로 서울대 교수로 있는 조윤제와 이숭녕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 교육 지식인들이 한글만 쓰기를 반대했고, 그 세력이 대한민국 시대 계속 한글학회와 한글을 괴롭힌다.

그러나 한글이 훌륭하기에 저들을 이기고 한글세상이 되려니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고 영어 바람을 일으키며 우리 말글을 죽이려고 날 뛰고 있다.

1948년 서울사대 이기인 교수가 만든 ‘사리갈말 말광’, 일본 생물학용어와 영어를 5000여 개를 토박이말로 바꾸고 그 이름도 ‘생물학 사전’이라고 안하고 토박이말로 지었다. 이 때 최현배는 말본 용어에서 ‘명사’가 아니고 ‘이름씨’라고 토박이말로 짓고, 금수현은 음악 용어 를 토박이말로 지어 쓰게 했다. 그러나 경성제대 출신 조윤제와 이숭녕들이 그걸 반대한다.

여기서 이희승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희승은 조선어학회 간사장(1934년에서 1936년)도 지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수난 때는 일제에 함흥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광복 뒤 1949년에는 한글전용촉진회 부위원장도 지냈다. 그리고 1965년까지 한글학회 이사도 지내고 1969년까지 회원이었다. 그러나 1969년 한글학회의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어문회’를 만들고부터 한글학회와 한글전용 반대 우두머리로 나선다. 그래서 그의 제자와 후배들은 한글 빛내기 반대 집단이 된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1948년 남은 대한민국, 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져서 이 나라는 두 동강이 났다. 조선어학회도 남북으로 갈리었다. 남은 1949년에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꾸어 지금까지 왔다. 북은 한글을 잘 살려서 썼으나 남은 일본식 한자혼용을 주장하는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과 이숭녕 교수가 중심이 되어 일제 지식인들과 강력하게 한글전용을 반대해서 그 싸움을 하느라고 우리말을 살리고 다듬는 일은 손도 못 대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도 1948년 건국 때 공문서만이라도 한글로만 쓰자고 한글전용법(법률 제6호)을 제정했으나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다. 1948년 헌법 원문은 한글만으로 쓰고 이승만 의장이 서명을 했다. 주시경과 배재학당 동창인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때는 그런대로 한글을 중요시했으나 공무원과 학자와 교육자들과 언론인들이 거의 일제 때 일본 국민으로 태어나 일본어를 국어로 배운 사람들이라 우리말을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던 가운데 1961년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김종필이 정권은 1964년부터 교과서도 일본처럼 한자혼용으로 한다고 하고, 문법 용어도 토박이말로 쓴 최현배의 말본 용어가 아닌 이희승이 일본식 한자말로 표준을 정한다고 한다. 한글학회 최현배가 주장하는 ‘이름씨’라는 토박이말은 안 되고 이희승이 주장하는 ‘명사’라는 한자말로 하기로 하면서 한글이 밀리기 시작한다.

이를 보다 못한 젊은 대학생들이 1967년에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고 한글 살리기에 나서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전용 정책을 펴게 하지만 지독한 일본식 한자혼용 찬성자인 김종필이 계속 정치판에 있으면서 방해하고, 서울대 국문과 출신과 유림단체 들 중국 사대모화사상에 빠진 이들이 힘을 모아 한글을 죽이려고 한다. 1990년부터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고, 국립국어원을 만들어 한글학회를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한글전용법을 한자혼용법으로 바꾸려고 하고, 교과서에 한자혼용을 하게 하려고 하는 바람에 그 싸움이 계속 되었다. 거기다가 김영삼, 김대중 정권 때엔 영어와 미국 숭배주의자들이 일어나 한글은 더 어렵게 된다.

1990년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진 15년 뒤인 2005년에 한글날 국경일 제정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공휴일이 아니어서 다시 한글날 공휴일 되찾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한글을 반대하는 세력이 2005년에 한글로 된 광화문 문패를 한자로 바꾸겠다고 하니 한글 문패로 바꾸기 운동을 한다. 광화문 일대를 한글문화관광중심지로 만드는 사업을 한다. 우리말을 바르게 쓰려는 운동도 하고 있다. 셈틀에 한글을 입력하고 출력하는 표준방법을 잘 정하는 일, 다른 나라에 우리 말글을 알리는 일도 하고 있다. 이 모두 한글을 빛내고 우리말을 살리려는 일들로서 오늘 우리가 꼭 해야 할 일들이다. 이 일은 여당, 야당이나 남이나 북, 동이나 서로 갈려서 따로 할 일이 아니라 모두 힘을 모아 함께 할 일이다.

한자를 섬기던 사대주의 세력은 이제 미국말을 섬기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리대로 http://cafe.daum.net/hanmalg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