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사랑

사민필지와 독립신문은 우리 말글 독립의 새벽빛

한글빛 2019. 12. 16. 20:23
사민필지 독립신문 우리 말글 독립의 새벽빛
  •  리대로 한국인공지능학회 회장
  •  승인 2019.11.09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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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회장
이대로 회장

1446년부터 한글을 썼지만 조선시대 배움 책은 한자로만 썼다. 그런데 545년이 지난 고종 때인 1991년에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한글로 ‘ᄉᆞ민필지’란 배움 책을 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고, 놀라운 일이고, 거룩한 일이다. 그리고 그 5년이 지난 고종 때인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이 주시경과 헐버트 도움을 받아 한글로 ‘독립신문’을 냈다. 이 둘 모두 한자를 한 글자도 안 쓰고 우리말을 한글로만 쓴 것으로서 어두운 밤을 밝히고 새벽을 여는 빛이었다. 또 두 일은 우리말 독립운동 발자취에서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 다음으로 가장 크고 뜻이 깊은 큰일이었다. 그것도 외국인이 나서서 그렇게 한 것은 매우 남다른 일이고 뜻 깊은 일이다.

왼쪽은 1891년 나온 ‘사민필지’ 머리 글, 오른쪽은 1896년 나온 ‘독립신문’ 제1권 제 1호.      사민필지는 띄어쓰기는 안 했지만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한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일이다.
왼쪽은 1891년 나온 ‘사민필지’ 머리 글, 오른쪽은 1896년 나온 ‘독립신문’ 제1권 제 1호. 사민필지는 띄어쓰기는 안 했지만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한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일이다.

‘ᄉᆞ민필지’는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이 한글로 쓴 배움 책이다. 헐버트는 고종 때인 1886년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서양식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영어 선생으로 왔는데 한국에 ‘한글’이란 제 글자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글자는 중국 한자보다 더 훌륭한 글자인데 한국인들은 안 쓰고 한자로 쓴 책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스스로 우리 말글을 배워서 3년 만인 1889년에 “선비나 백성들 모두 꼴 알아야 할 것이란 뜻을 담은 ‘ᄉᆞ민필지(士民必知)’란 세계 사회지리책을 써서 1891년에 출판한 것이다. 헐버트는 이 책 머리글에서 제 말글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좋은데 한국인들이 쉬운 제 말글로 세상 공부는 하지 않고 한문으로 쓴 책을 더 좋아하고 배우고 읽는 것이 안타까워 이 책을 낸다고 말하고 있다.

헐버트는 한글을 배우면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 한글을 만든 세종을 우러러보게 되었고 영문으로 세계에 한글과 세종을 알리는 글을 썼으며, 한국인보다 한글과 한국을 더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신식 교육을 반대하는 한국 선비들과 한국인들을 깨우는 것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방해해서 ‘육영공원’이 1991년에 문을 닫게 되어 헐버트는 그 해 12월에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한국이 좋아서 1993년에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와서 배재학당 안에 있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그 출판사에서 인쇄를 하면서 영문판 조필로 일한다. 그 때 한글판 조필은 배재학교 학생으로서 독립신문사 간사로 일하는 주시경이 맡았다. 독립신문은 ‘건양’이란 우리 연호를 쓰고 한양을 ‘서울’이라고 우리 토박이 이름을 쓴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이 사민필지는 배재학당과 여러 학교에서 교과서도 이용했으며 일반인들도 읽었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주시경은 1898년 6월 역사지지특별과를 졸업했는데 세계 사회지리책인 사민필지로 공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 신분으로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의 언문 조필로 있으면서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1896년 국문동식회를 신문사 안에 설립했고 1900년에 배재학당 보통과에서 영어를 전공하면서 외국어 문법 공부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글학자가 되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와 학부 안에 설립한 국문연구소에서 주임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주시경과 배재학당을 다닌 이승만이 1898년에 한글신문인 ‘협성회회보(학생회지)’를 만들고 이 신문이 한글 전용 일간지인 매일신보로 발전하는 데 모두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로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영향으로 보인다.

한글로 쓴 사민필지(왼쪽)로 공부한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8년 한글로 쓴 일간신문 매일신문.
한글로 쓴 사민필지(왼쪽)로 공부한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8년 한글로 쓴 일간신문 매일신문.

그런데 한글로만 만든 사민필지를 1895년에 한문으로 번역해서 내고, 1889년에 유길준이 그의 일본인 스승인 일본 사상가 ‘후꾸자와 유기치’가 쓴 ‘서양사정’이란 것을 보고 국한문 혼용 교과서인 ‘서유견문’을 내고, 1895년 학부가 ‘소학독본’을 내고 1902년에 “만국지리지”란 교과서를 한자혼용으로 낸다. 또한 1898년 처음 윤치호가 ‘대한황성신문’이란 이름으로 한글로 만들던 신문을 8월에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이 뒤면서 장지연, 남국억 들이 인수해 ‘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한자혼용으로 낸다. 그리고 독립신문은 1899년에 폐간되었다. 그러니 우리말을 우리 글자인 한글로 적는 우리말 독립 꿈은 물거품이 되고 일본식 한자혼용 세상으로 가다가 1910년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

왼쪽부터 1895년 한글 사민필지를 한문으로 바꾼 한문 士民必知, 1998년에 유길준이 일본인 스승 ‘후꾸자와 유기치’가 쓴 ‘서양사정’을 보고 한자혼용으로 쓴 서유견문, 1895년 학부가 낸 한자혼용으로 낸 책.
왼쪽부터 1895년 한글 사민필지를 한문으로 바꾼 한문 士民必知, 1998년에 유길준이 일본인 스승 ‘후꾸자와 유기치’가 쓴 ‘서양사정’을 보고 한자혼용으로 쓴 서유견문, 1895년 학부가 낸 한자혼용으로 낸 책.

[사민필지 머리 글: 매우 뜻이 깊은 글이라 현대어로 풀어 바꿔 소개한다]

천하 형세가 옛날과 지금이 크게 같지 아니하여 전에는 각국이 각각 본지방을 지키고 본국 풍속만 따르더니 지금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천하만국이 언약을 서로 믿고 사람과 물건과 풍속이 서로 통하기를 마치 한집안과 같으니 이는 지금 천하 형세의 고치지 못할 일이라.

이 고치지 못할 일이 있는 즉 각국이 전과 같이 본국 글자와 사적만 공부함으로는 천하각국 풍습을 어찌 알며 알지 못하면 서로 교접하는 사이에 마땅치 못하고 인정을 통함에 거리낌이 있을 것이오. 거리낌이 있으면 정의가 서로 두덮지 못할지니 그런 즉 불가불 이전에 공부하던 학업 외에 각국 이름, 지방, 폭원, 산천, 산야, 국경, 국세, 재화, 군사, 풍속, 학업과 도학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고로 대저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 팔세가 되면 천하 각국 지도와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천하의 산천, 수륙과 각국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불가불 이와 갖게 한 연후에야 외국 교접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또 생각건대 중국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법에 익숙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땅덩이와 풍우박뢰의 어떠함을 먼저 차례로 각국을 말씀하니 자세히 보시면 각국 일을 대충은 알 것이요. 또 외국 교접에 적이 긴요하게 될 듯하니 말씀의 잘못됨과 언문의 서투른 것은 용서하시고 이야기만 보시기를 그윽이 바라옵나이다.

조선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