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은 573돌을 맞은 한글날이었다. 매년 한글날이 있는 시월 초·중순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이가 이대로(73)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다.
올해도 영어 오남용에 관한 토론회 주최, ‘2019 우리말 지킴이와 헤살꾼’(남의 일을 짓궂게 훼방하는 사람) 선정 발표, 한글날 기념행사 ‘세종대왕 납시오’ 참여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느라 분주했다. 1967년 대학 재학 때부터 한글운동에 뛰어든 그는 한글운동 관련 단체에서는 기둥 같은 존재다.
한글박물관 건립, 서울시 광화문 일대를 한글문화관광지로 꾸미는 ‘한글마루지 사업’, 한글날 공휴일 제정 추진 등 주요 한글 운동사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다. 주변의 한글단체 인사들로부터 ‘한글 장군’, ‘살아있는 한글운동사’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4일 한글회관에서 열린 ‘영어 남용과 혼용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정책 토론회에선 정부기관과 지자체의 영어 오남용 문제를 지적한 뒤 “공공기관이 우리 말글을 짓밟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을 고발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목청을 높여 참석한 문화부 간부를 긴장케 했다.
지난 7,8일 50여년을 한글 지킴이로 살아온 이 대표를 한글회관과 세계일보 편집국에서 만났다. “한글이 빛나면 우리 겨레가 빛나는 것 아니냐”며 인터뷰 내내 목청을 높이던 그가 말미에는 “이제는 저 같은 나이 든 사람이 더는 나서지 않게 젊은이들이 우리 말글 지키기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낮은 목소리로 신신당부했다.
―정부기관의 영어 오남용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는데.
“김영삼 대통령 때 영어 조기교육을 추진하면서 영어 바람이 불더니 김대중·노무현정부 때엔 아예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이들까지 나오더니 이제는 영어 천지다. 거리에는 한글 간판이 사라지고 영어 간판이 난무한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다. 영어 간판이 많아 외국 관광객이 서울 도심에서 사진을 찍으면 한국에서 찍은 사진인지 외국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인지 알 수가 없다. 한심한 일은 정부와 공공기관이 영어 오남용에 앞장을 서고 있다는 점이다. 실례를 보자. ‘포용성장 on, 경제활력 UP’(정부 자문회의), ‘NEXT LOCAL, 감정노동자 마음해피 and YOU’(고용노동부), ‘서울의청년 로컬의 미래를 UP하다’(서울시), ‘지진이 발생했다면 GO·GO·GO’(행정안전부), ‘눈꼬리는 내리go, 입꼬리는 올리go, 즐거운 안동’ (안동시)을 보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이러니 일반인들도 영어를 섞어서 써도 괜찮은 줄 알고, 아니 그래야 좋은 줄 알고 섞어서 쓰고 있는 것 아닌가. 현 정부는 출범 초기 한글단체의 건의를 무시하고 정부 부처에 ‘벤처’란 외국말을 기어코 넣었다. ‘중소벤처기업부’를 말한다. 중앙 정부가 앞장서서 영어 섞어 쓰기를 부채질하는 꼴이다. 정부 기관과 공무원들이 처벌조항이 없다고 법과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업무 태만과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계속 손을 놓고 있을 경우 정부 책임자들을 국어기본법과 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으로 고발할 계획이다. 수십년 동안 일본처럼 한자를 혼용하자는 이들과 싸워서 간신히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나라가 되었는데 이제 한글과 영어 혼용 나라로 가고 있다. 개탄스럽다.”
―우리 말글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와 과정은.
“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꿈이 소박했다. 농사를 평생 업으로 할 생각하고 1962년에 예산농고에 들어갔다. 당시 정부가 1964년부터 한글로만 만들던 교과서에 한자를 섞어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농업시간인데 한자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사과나무밭에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고, 꽃을 솎아주어야 좋은 사과를 딸 수 있다’고 쉬운 우리말로 가르치면 되는데 칠판에 ‘施肥(시비), 剪枝(전지), 摘花(적화)’라고 쓰며 어렵게 가르치더라. 도서관에 가서 농업 서적을 빌려보니 대부분 일본 책이거나 새까만 한자가 섞인 책뿐이었다. 학생 입장에서 책을 읽으려 해도 우리 말글로 된 책이 없었다. 충격이었다. 당시 농민 80%가 문맹이었는데, 제 말글로 된 책도 별로 없으면서 일본처럼 한자혼용을 하자는 것은 문맹률을 더 높이는 것이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쉬운 우리 말글로 교육하고 말글살이를 할 때 문맹이 줄고 국민 지식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여겼다. 이때 한글운동이 장래에 내가 할 일이라고 여겼다. 동국대에 진학한 뒤 1967년에 국어운동대학생회를 조직해 한글운동 길에 나서 52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이름을 우리 말과 글로 짓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제 말글이 있어도 이름을 남의 나라 말글로 짓는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긴다. 나의 소신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李澤魯’(이택노)란 한자 이름 대신 ‘이대로’라는 우리말 이름을 지어 1968년부터 쓰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한자를 쓰더라도 나만은 평생 한글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이름에 담아 죽는 날까지 이 일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진짜 이름대로 됐다. 하나 이 운동도 한동안 한글 반대자들 때문에 그 바람이 많이 식었다. 그간 한글전용 운동을 하느라고 이 운동을 미루었는데 올 초부터 다시 한글이름연구소를 꾸리고 한글이름 짓기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아시다시피 지휘자 금난새나 전 국회의원 김한길은 모두 우리말 이름이다. 얼마나 좋은가. 두 분은 부친이 한글에 대한 자각이 남달라 우리 이름을 지은 거다. 요즘은 일부에서 배우리, 박한샘, 김봄누리 등 우리 이름이 많아지고 있다. 반갑기 그지없다.”
―한글독립운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과 성취가 있다면.
“돌이켜보면 지난 반세기 넘는 국어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때 한글운동보다 더 치열하고 힘들었다는 생각이다. 한글운동단체들이 국회의원 이름패와 국회 상징인 깃발과 휘장에 쓴 한자를 한글로 바꾸게 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한글을 반대하는 세력은 광복 뒤 미국 군정 때부터 공휴일이었던 한글날을 1990년 공휴일에서 빼버려서 그걸 되찾는 데도 32년이 걸렸다. 2005년에 국경일로 만들었으나 공휴일은 안 되어서 다시 투쟁해 2012년에 공휴일로 되돌렸다. 제가 앞장은 섰지만 한글운동 과정에서 고마운 이들이 적지 않다. 신기남 의원은 한글날 국경일 제정법을 제출하고 통과시키는 데 힘썼다. 국회의원 한글 이름패는 원광호·김근태 의원 공로가 컸다. 국회 휘장을 한글로 바꾸는 데 노회찬 의원이 많이 도와줬다. 고인이 되신 분들도 있는데 그분들에게 고마운 절을 하고 싶다.”
이 대표는 우리말 지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돈키호테’였다.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장 시절인 1990년 노동부가 한글전용법을 어기고 신문에 낸 광고문을 보고 발끈했다. 당시 노재봉 국무총리에게 한글전용법을 지켜 달라고 건의했으나 반영되지 않자 노 총리를 직무유기와 업무 태만, 최병렬 노동부 장관과 이원종 서울시장을 한글전용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한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시절인 1999년 정부가 일본식 한자혼용 정책을 추진해서 김종필 총리, 신낙균 문화부 장관 등을 우리말 훼방꾼으로 발표해 파장을 남겼다.
―광화문 현판도 한글로 바꿔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하는데.
“우리의 문화 정체성 문제다. 광화문은 대한민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광화문에 한자 현판이 붙어있어서 자주적인 문화 독창성을 송두리째 빼앗고 있다. 한국이 중국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변방이라는 느낌만 든다. 일부 문화재위원들은 원형 복원이 문화재 복원 원칙이라고 말하나 속 좁은 생각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연속선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과거에 묶어놓은 복고주의 생각이다. 온고지신 즉 옛것을 새롭게 고쳐 쓴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죽은 역사를 단순 복원한다는 죽은 역사관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 현판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계획과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제 삶은 한글을 안 쓰려는 사람들과의 지난한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같은 사람이 더는 안 나서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08년 한글학회를 만든 뒤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쓴 주시경 선생은 ‘나라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나라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하셨다. 한글책 보따리를 들고 한 사람에게라도 더 한글을 가르치려고 발버둥 치다가 돌아가셨다. 이후 주시경 선생 뜻을 이은 우리 학회 선열들은 일제강점기에 한글날을 만들고 한글을 지키고 갈고닦았다. 영화 ‘말모이’에서 보듯 목숨을 걸고 지켜온 한글이 아닌가.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이 우리를 깔보고 넘보니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좋지만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를 시정해줬으면 좋겠다. 우리 겨레 말은 우리 겨레 얼이다. 일본 식민지 교육으로 길든 일본 한자어로 된 행정·교육·전문 용어를 빨리 쉬운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 한글로 이름도 짓고 새 낱말을 만들어 우리 말글살이가 뿌리내리게 해주시길 당부한다. 그러면 이웃 나라가 우리를 넘보지도 못할 것이고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 나라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겠나.”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