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한자말이 1%인 백기완님의 자서전 소개

한글빛 2009. 11. 16. 12:06

백기완 선생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대로의 우리말글사랑] 홀이름씨만 빼고 순우리말로만 쓴 최초 자서전
 
이대로
2009년 11월 9일 오후 7시 한겨레신문사가 연 “한겨레, 책을 말하다” 방송 녹화가 있어 오랜만에 한겨레신문사에 갔다. 우리말 독립운동 실천가인 백기완 선생이 우리말로만 쓴 자서전에 대한 방송 대담을 한다기에 백 선생님도 뵐 겸 한겨레신문사 2층 안내 실에 올라가니 한글로만 쓴 한겨레신문의 주주들 이름이 쓰인 구리판이 온 벽면에 가득하다. 그 주주 이름 가운데 내 이름도, 내 세 자식들의 이름도 있었다. 남다른 느낌으로 설레는 가슴을 안고 방송 녹화 실에 가서 조금 기다리니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76) 소장이 들어오신다. 덥수룩한 머리는 여전하시고 건강해보여서 더욱 반가웠다. 백 선생님은 “이대로 선생, 언제 귀국했나.”하신다. 내가 중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연락도 없이 갑자기 그곳에서 만나니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몇 달 되었는데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 2009년 11월 9일 한겨레신문 ‘책을 말하다’방송녹화를 마치고     © 이대로

인사를 나누고 촬영을 시작되기 전에 연출자가 “대담 진행자의 ‘멘트’가 나오면 박수를 칩니다.”라고 말하고 영어로 무어라 또 말하니, 백기완 선생이 대뜸 “야, 거 영어 안 쓸 수 없나! 한겨레 사장 오라우! 자꾸 영어로 씨부렁대면 나, 사진 안 찍어!”라고  호통 치신다. 일찍이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란 새말을 만들어 우리말로 자리를 잡게 한 분이고 오늘 이야기를 나눌 책이 홀이름씨만 빼고 토박이말로 모두 풀어서 쓴 책이고 보니 그렇게 호통을 치실만도 했다.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분이 아니면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란 책은 백기완 선생의 한살매(일생)을 적은 자서전이다. 보통 사람들은 백기완 선생을 민주화를 위한 거리의 싸움꾼, 통일 운동가, 노동운동가로서 만 알고 있는데 이분은 우리 토박이말로 글을 잘 쓰는 글쟁이요 이야기꾼이고, 큰 우리말 지킴이다. 그래서 일찍이 2002년에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에서는 백 선생을 ‘2002년 우리말 으뜸 지킴이’로 뽑은 일이 있다.

수만 명 학생들이나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할 때나, 신문에 글을 쓸 때나, 결혼식 주례사를 말할 때도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일이 없고,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보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한다. 그게 바로 겨레 얼을 지키고 빛내는 일이며, 그런 마음으로 살 때 개인도 잘 살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힘주어 부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치 이익을 탐내려는 사람들과는 다르기에 이 분을 우러러 받들고 따르는 젊은이가 많다.
 
일본 한자말을 지키고 살려 쓰자는 일류대학 국문학과 출신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우리말에 한자말이 70%라고 떠들지만 중학교도 안 다닌 백기완 선생이 쓴 책엔 한자말이 1% 밖에 안 된다. 그것도 사람이나 회사 이름 같은 홀이름씨를 빼곤 한자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들은 토박이말을 살려 쓰고, 없는 말은 만들어서 글을 썼다. 그래서 좀 낯설고 읽기 힘들기도 하지만 자꾸 읽으면 이해가 가고 재미있다.  

▲ 한겨레신문사 출판부가 낸 백기완 선생의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겉장     © <한겨레> 출판부
우리는 일제로부터 나라는 되찾았지만 일제가 빼앗아버린 우리말과 얼은 되찾지 않았다. 일제가 뿌린 일제 한자말을 법률문장과 공문서와 학술 서적에 지금도 그대로 썼다. 일제가 물러간 뒤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외솔 최현배와 여러 뜻있는 분들이 우리말 도로 찾아 쓰기 운동을 하면서 ‘건널목’이라 새말도 만들어 쓰고 ‘서울’ 이란 토박이 땅이름이 태어났다. 그 즈음 ‘비행기’란 한자말 대신 ‘날틀’이란 새 말을 만들어 쓰자는 주장을 한 분은 놀림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백기완 선생은 그 ‘날틀’을 살려서 쓰고 있다.
 
백기완 선생은 “어려운 일본 전문용어와 영어에 시달린 사람들은 꼭 내 책을 봐 달라.”고 힘주어 말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와 많이 배웠다는 자들이 우리말을 더럽히고 버린다.”고 분개한다. 6.25 전쟁 뒤 50년대에  학교에 못가는 애들을 남산 판자촌에 모아놓고 ‘달동네 배움집’이란 간판을 걸로 한글을 가르치다가 경찰에 끌려갔는데 “ 왜 ‘하꼬방촌’이라고 안 하고 ‘달동네’란 토박이말을 쓰느냐기에 그 말은 일본말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빨갱이라고 패더라.”고 말한다. 5.16 군사 정변 초기 정부가 남산에 땅굴을 파면서 ‘남산 터널’이라고 하는 걸 보면서 ‘터널’대신 ‘맞뚜래’라고 하라고 했다가 경찰에 끌려가 두들겨 맞기도 했단다.
 
그리고 지금 ‘뉴스’란 영어 대신 ‘새뜸’이란 말을 쓰자고 하는데 ‘새뜸’이란 말뜻은 이렇다. 백 선생이 어릴 때인 추운 겨울, 깊어가는 밤이 지겨워 “엄마, 해는 언제 뜨는 거야”하고 칭얼대면 “조금만 참아, 이제 곧 ‘새뜸’이 다가 온단다.”고 말하셨단다. 이때 ‘새뜸’이란 반드시 다시 솟아오르는 해를 뜻하는 말이었다. 새롭게 오는 소리, 새롭게 가는 소리, 새롭게 뜨는 소리를 모두 모은 말이오니 제발 ‘뉴스’란 말은 때려치우고 그 ‘새뜸’이란 말을 쓰자고 말한다.
 
백 선생은 자신의 의지를 불꽃처럼 태우며 산 싸움꾼이고 이야기꾼이다. 이번에 낸 책은 그의 한 삶을 고스란히 담은 자서전이면서 우리말을 지키고 살리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가 온갖 아픔을 겪고 살아온 이야기와 독재정치와 싸운 이야기를 외국말이나 일본 한자말이 아닌 토박이말로 구수하게 적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적은 자서전이며 이 나라 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그려진 책이다. 백 선생은 옳지 못한 것에는 강한 사람이면서 불쌍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부정과 반민족 행위자엔 우렁찬 목소리로 호통을 치지만 옳고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드럽고, 불쌍한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줄줄 흘린다. 
 
일제가 물러가고 나라가 시끄럽고 어지러울 때 황해도에서 맨발로 서울에 와서 더 배우고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마음에 온갖 설움과 배고픔을 겪으며 시작된 그의 한 삶이 민주, 독재 투쟁으로 이어지고 겨레말과 얼을 지키는 문화운동을 뜨겁게 실천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보이는 책이다. 이 분의 우리말 살려 쓰기와 새말 만들기는 일제가 물러간 뒤 우리가 안 한 일을 이제라도 하는 것이다. 시위 때 많이 부르는 “산 자여 따르라.”는 민중가요는 그의 시에서 따온 노랫말이다. 그의 삶이 시요 그의 투쟁사가 소설이기도 하다.
 
 ‘맞대’(대답), ‘고칠데’(병원), ‘오랏꾼’(경찰), 불쌈(혁명), 땅별(지구), 날틀(비행기), 든올(철학), 얼래(인터넷), 새김말(좌우명), 불쌈꾼(혁명가), 양떡집(빵집), 아리아리(화이팅), 온널판(우주), 재재미쌀(현미),덧이름(별명), 알짜(실체), 나발떼(선전꾼), 지루(권태), 날노래(유행가), 때참(계기), 진꼴(패배,실패), 새뜸(뉴스)처럼, 새로 만든 말도 있고 오래전부터 쓰던 말도 있다. 처음엔 낯설지만 여러 번 읽으면 새말을 만드는 상상력도 커지고 알아볼 수 있다. ‘재테크’, ‘로드맵’ 같은 외국말은 잘 참으며 받아들이면서 우리식 새말은 흥분하며 반대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말 간판과 회사이름을 따라서 쓰는 천재성을 지닌 한국인이라면 우리식 새말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과 한글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이들은 꼭 읽어보고 그 실천 정신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모자라는 새말 만드는 기술과 이름 짓기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다.
 
백 선생은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아쉽고 한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87년 두 김씨가 서로 대통령을 하겠다고 싸워서 천년 만에 온 민중승리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동학농민 운동 때의 민중승리가 실패한 것과, 광복 때 사대주의 찌꺼기를 씻어 내지 못하고 남북이 갈린 것과 함께 민중승리 기회를 놓친 큰 아쉬움이라고 말했다.
 
백 선생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젊은이들을 보면 껴안아주고 싶다. 젊은이여 낭만을 가져라. 꿈을 가져라.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사람답게 살자.”라고 힘주어 말하며 방송을 마쳤다.  나는 백기완 선생은 이 시대의 최고 멋쟁이요 보기 드문 떵이(천재)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국 소흥에 있을 때 중국의 유명한 글쟁이인 노신의 모습이 백기완 선생을 떠오르게 해서, 백기완 선생처럼 말을 잘하고 노래도 잘 하고, 올곧게 살면서 민족혼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다짐한 일이 있다.
 
▲ 중국 소흥시 가암풍경구 안의 노씨 마을에 있는 노신 동상, 중국인들은 작가 노신을 민족혼을 지킨 문화 혁명가로 존경하는데 그 모습과 삶이 백기완 선생을 떠오르게 했다.     © 이대로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중국 절강성 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







 
기사입력: 2009/11/16 [10:39]  최종편집: ⓒ 대자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