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헐버트 박사 자세하게 알기 학술토론회 - 문학신문 보도

한글빛 2010. 10. 19. 16:20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헐버트
헐버트의 정신과 업적 기리는 학술 토론회 개최
 [한국 대표 문학신문] 한글날 564돌을 맞이해 매우 뜻 깊은 학술 토론회가 열렸다. 124년 전인 1886년 한국 최초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영어 교사로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한글로만 쓴 ‘민필지’란 교과서를 쓰고 한글의 우수성을 영어로 써서 국외 학술지에 최초로 소개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한글 발전에 남긴 큰 업적을 살피고 기리는 학술 토론회다.

이 토론회는 한글주간인 10월 5일 2시부터 종로 2가 기독청년회관(YMCA) 강당에서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가 한말글문화협회(대표 이대로)와 함께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 한글학회, 서울 와이엠씨에이가 후원하며 인탑스㈜와 프라임그룹이 협찬했다.

헐버트는 조선이 강대국 열강의 나라 개방 요구에 몹시 혼란스럽던 고종 시대에 이 땅에 와서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지키려고 애쓴 독립운동가요 국어운동가이다. 그런데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알려졌으나 한글학자로서 한글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이 많지 않고 그 고마움도 잘 모르고 있다. 이번 토론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헐버트가 한글발전과 우리 국민 교육에 이바지한 업적을 알리고 기리는 뜻 깊은 자리였다.

토론은 대진대 이근영 교수의 사회로 ▲'헐버트의 일생과 한글'(김동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사민필지가 한글발전에 끼친 영향'(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최초로 세계에 한글 우수성 알린 헐버트'(이헌복 서울대 명예교수) ▲'헐버트와 아리랑'(김연갑 한민족 아리랑 연합회 상임이사)의 헐버트의 업적 연구 발표가 진행했다.

토론은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책임연구위원과 김슬옹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영명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겸 한림대 교수, 김보희 한양대 민족음악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

김종택 한글학회장은 축사에서 “한국인보다도 한국과 한글을 더 사랑한 헐버트의 업적을 기리고 이어받아 한글을 더욱 빛내어 튼튼한 나라를 만들자면서 광화문 앞 열린마당에 동상을 세우고 그 고마움을 기리자. 그래야 외국인들이 우리를 은혜를 아는 국민이라고 알아줄 것이며 세계인으로서 바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헐버트선생의 크나큰 은혜와 사랑에 절하고 또 역사와 문화에 거리가 멀어 보이는 금융인인 김동진선생께서 헐버트선생을 널리 알리고 받들고 있는 열정에 감복하며 절하는 바입니다.”라고 제안했다.

제프리 존스 미국 상공회의소 회장은 “본인은 헐버트 박사와 같은 미국인으로서 헐버트 박사의 한국에 대한 헌신에 매우 긍지를 가지고 있으며, 저 역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의 뒤를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라고 축사를 했다.

김동진 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은 주제 발표에서 “헐버트(Homer B. Hulbert)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문 역사가들마저도 헐버트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고종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외국인으로서 고종 황제 특사를 두 번이나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애국자의 대명사인 민영환과는 참된 지성의 교감을 나눴다. 서재필, 이승만과는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였다. 또한, 일본과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더욱이 한글과 우리 문화를 좋아하고 그 발전에 큰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 학자와 정치인을 말할 거 없고 일반 국민이 잘 모르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며 헐버트의 업적과 정신을 소개했다.


사민필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주제 발표를 한 이대로 대표는 “헐버트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글로 사민필지란 교과서를 썼다. 이 사실은 한글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사에서도 중대한 일이었다. 또 가장 먼저 영어로 한글이 얼마나 빼어난 글자인지 나라 밖에 알리는 논문을 쓴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한글을 4일만 에 깨우치고 3년 만에 한글로 교과서를 썼다는 것은 한글이 얼마나 배우고 쓰기 쉬운 글자인지 증명했다. 주시경을 가르치고 주시경과 서재필과 함께 가장 먼저 한글로 신문을 만든 일도 고맙고 위대한 일이다. 이런 헐버트를 우리가 잘 몰랐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잘못된 일이다.”며 이제라도 그의 고마움을 알고 업적과 정신을 이어서 한글을 빛내어 힘센 나라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영문으로 한글의 우수함을 영문 논문으로 외국 학술지에 소개한 사실을 밝힌 이현복 교수는 “ 헐버트는 조선어는 대중연설에 적합한 말이라고 자신 있게 답하였다. 그 이유로 조선어는 공명과 모음이 풍부한 언어이며, 음절에서 모음을 어머니로, 자음을 아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모음이 인간 언어의 핵심이란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고 보았다. 조선어는 일본어에 비해 마찰음 이 덜 들어나며, 조선어와 일본어로 연설하는 것을 들어보면 조선어가 훨씬 우월함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단어의 악센트가 거의 없어서 웅변어로는 불리하다고 보았다. 조선어야 말로 영어보다 웅변어로 더 우수하다고 본다.” 고 말하면서 헐버트는 한글 세계화의 원조임을 알려주면서 한글학자요 운동가로 큰 공적을 남긴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 헐버트의 우리 음악 채보는 총 5편이 확인된다. 1896년
에 시조 한편, 아리랑, 군밤타령, 그리고 1906년 에 시조와 농요 각 한 편씩을 수록했다. 이 중 전자의 3편은 서양식 오선보 채보로는 가장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인상 깊게 인식(刻印)한 상황이나 일본인의 기록과 아리랑의 유행 상황으로 볼 때 적어도 아리랑 채보는 1차 입국 시기인 1886년 아니면 2차 입국 시기인 1893년으로 추정이 된다.” 며 헐버트가 외국인으로서 가장 먼저 아리랑을 채보한 것은 매우 의미가 크고 고마운 일이라면서 한국문화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데 한글과 아리랑이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대표 문학신문 제공 http://munhaknews.net/news/service/article/mess_01.asp?P_Index=346&fl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