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사랑

헤럴드경제 - 이대로 이야기

한글빛 2008. 10. 9. 23:00



“존대말 체계등 정리 우리말 세계화 초석 다져야”
한글의 탄생ㆍ수난ㆍ독립

500년 역사 생생히 담아

국회의원에 한글 명패 전달

한국은행 현판 한글 교체도

지금은 중국서 한글 전파

“이젠 한글 중국에 빌려줘야”

 

저는 주시경 선생님을 제일 존경해요. 한글을 세종대왕님이 만드셨지만 한글이란 이름은 이 분이 지어주셨죠”

 

20대 초반 대학시절부터 40년간 한글을 지키고 살리는데만 오로지 일관해온 ‘한글지킴이’ 이대로(61)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는 신문로 한글학회 입구에 세워진 주시경 동상을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1967년 국어운동대학생회로 한글운동을 시작한 이래 회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놀이터삼아 지냈던 긴 세월이 한자락 꿈같기도 하다.

‘언문’‘암글’(여자나 쓰는 글)이라며 천시했던 한글을 살리기 위해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달고 이 학교 저학교 강의를 다니신 주시경 선생님은 그에게 삶의 표상이다. 그는 주시경 선생의 ‘말이 오르면(옳으면) 나라도 오르나니’(‘한나라말’)를 주제가처럼 입에 붙이고 산다.이는 그가 한글운동을 ‘독립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창제 562돌을 맞아 이 씨는 최근 우리말글이 역사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살핀 ‘우리말글 독립운동의 발자취’(지식산업사)를 펴냈다. 훈민정음을 만들어 쓰게 된 내력부터 한자에 눌려 한글을 활용하지 못한 사정, 나라를 잃어 우리말글을 빼앗긴 뒤 피나는 싸움, 되찾은 우리말이 일본말, 한자말, 영어 등에 치여 부대껴온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해방이전의 역사적 사실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기록한 해방이후 국어 수난사는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무엇보다 민간인들의 한글사랑운동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담아낸 점이 뜻깊다.

 

스스로를 ‘국어독립운동꾼’이라고 부르는 이씨의 한글운동은 1967년 대학생국어운동모임에서 시작된다. 1964년 혁명세력이 한글전용정책에서 후퇴해 한자혼용정책을 쓰자 1967년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생들이 모여 ‘국어운동학생회’를 꾸린 것이다. 민간 최초의 국어운동모임인 셈이다..

"당시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가 ‘제1회 고운이름 뽑기 시상식’을 벌여 국민적 관심을 모았는데 현재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금난새씨 이름이 뽑혔지요. 이후 한글이름 짓기가 유행이 되다시피했어요”

 

그 즈음해 그도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 대신 돌림자를 살려 ‘이대로’란 이름을 만들었다. 한글독립운동에 이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담아낸 것으로 이름은 삶의 길잡이가 돼 주었다.

 

그는 한글만으로도 충분히 뜻이 통하는데도 늘 한자와 섞어쓰길 주장해온 쪽은 오히려 일제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알 만한 학자들과 사회지도층인사들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들려준 한글 운동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하나는 14대 국회 한글명패 사건. 당시 국회는 공고문, 배지, 공문, 명패,심지어 주차금지라는 안내문에 이르기까지 한글을 찾아볼 수 없는 국적불명의 모습이었다. 당시 한글운동시민단체들은 뜻을 모아 국회의원명패바꾸기 성금모금을 시작했다.

 

코흘리개 돈부터 할아버지 쌈짓돈까지 모아 명패를 만들어 국회에 전달하려고 했으나 국회의장, 사무총장 누구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차량검색을 피해 원광호의원 사무실로 실어나른 얘기는 첩보작전을 방불케한다. 그런 노력끝에 지금은 국회의원의 90%가 한글명패를 쓰고 있지만 30명은 여전히 한문을 고수하고 있다.

 

또 하나는 한국은행의 현판.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군정때 만든 한문 현판이 그대로 내걸려 있었다. 바른말연구회 등은 당시 조순 행장을 찾아가 따졌지만 허사였다. 정부기관의 현판은 한글로 써야 한다는 실정법을 위반한 것인데도 막무가내였다. 항의 방문이 잇따르자 결국 한국은행은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현판과 공문서 등을 바꿨다.

 

"지금도 옥외광고물관리법에 따르면 상업용 간판도 한글로 표기하도록 돼있고 영어 등을 쓸 경우 병기하게 돼있는데 어겨도 이를 처벌할 조항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예 단속조차 않는거죠."

 

그렇다고 세계화추세속에서 영어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글을 정확하고 바르게 쓰면서 영어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2년전부터 중국 절강월수외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그동안 한자를 고맙게 빌려 쓴 만큼 이제는 한글을 중국에 빌려줄 때도 됐다”며 중국에서 한글의 인기를 실감한다고 말한다.

 

이씨는 한글이 세계화되려면 외국인들이 잘 배울 수 있도록 동음이의어나 존대말 등 복잡한 말을 정리하는 말다듬기를 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언도 서슴지않았다.

이윤미기자(meelee@heraldm.comheraldm.com)